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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어부가

by 한종호 2019. 5. 21.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39)

 

 어부가

 

부끄러운 일이지만 농암종택을 찾기 전까지는 농암을 몰랐다. ‘어부가’로 널리 알려졌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내게 떠올랐던 것은 윤선도의 어부가뿐이었다. 자료를 대하니 농암에 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1542년, 농암은 정계를 은퇴했다. 종2품 '영감(참판)' 신분으로 물러났다. 인기와 여망으로 보면 '대감(판서)'도 가능하고 '정승(좌,우 영의정)'도 가능했지만 관심이 없었다. 임금, 동료들의 만류도 뿌리쳤다. 도성 경복궁과 한강 제청정에 마련된 전별연은 조선조 유일의 정계은퇴식이었다. 임금은 친히 금서대(金犀帶)와 금포(錦袍)를 하사하고, 편안한 귀향이 되도록 호행관리가 인도하라 명령했다. 전 관료들이 참석했고 전별시를 지었다. 이 날 전별연은 궁궐에서 한강까지 동료, 벗들의 전별행차가 이어졌고, 이를 본 도성사람들이 담장처럼 둘러서서 “이런 일은 고금에 없는 성사”라는 말이 나오게 했다. 퇴계 이황은 “지금 사람들은 이러한 은퇴가 있는지도 모릅니다”라고 했다. 김중청金中淸은 “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그 누구도 그런 사람이 없었는데, 오직 우리 농암 선생께서 쇠퇴한 풍속에서 분연히 일어나 용퇴했다. 회재晦齋(李彦迪), 충재冲齋(權橃)께서 전송대열에 서고, 모재慕齋(金安國), 퇴계退溪(李滉)께서 시를 지어 전별했으니, 중국의 소광疏廣, 소수疏受가 떠날 때의 1백량의 수레가 줄을 이은 영광에 어찌 비유되겠는가. 이는 우리나라 수천 년 역사 이래 없었던 일로, 우리 농암선생이야말로 천백만 명 가운데 단 한 분뿐이다”라고 했다. 『실록』은 이를 ‘염퇴恬退’라 규정했다.>

 

<은퇴 후 거듭되는 상경上京 명령에도 불구하고 올라가지 않으니, 나라에서 1품인 숭정대부崇政大夫의 품계品階를 내려 예우禮遇했다. 그래서 조선전기 보기 드문 ‘재야재상’이 되었고,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이 직책을 띠고 있었다. 1555년 6월 13일, 89세에 몰沒하니 나라에서는 효孝와 절개의 정신을 기려 ‘효절공孝節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조선 500년, ‘대로大老’라고 불린 인물은 흔하지 않으며, ‘효절’이란 시호 역시 농암이 유일하다. 농암은 전 생애에 걸쳐 명예를 포기하여 더 큰 명예를 얻은 삶을 몸소 보여주어 우리에게 행복한 삶이 어떤 것인지 말해주고 있다.>

 

 

 

 

고향으로 돌아온 농암은 귀먹바위 ‘농암聾巖’에 올라 감격적인 시조 한 수를 읊었는데, 그것이 ‘농암가’이다.

 

농암에 올라보니 노안이 더욱 밝아지는구나
인간사 변한들 산천이야 변할까
바위 앞 저 산, 저 언덕 어제 본 듯 하여라

 

농암의 대표적인 작품 ‘어부가’가 미친 영향도 컸다.


<‘어부가’는 이후 퇴계의 ‘도산12곡’에 영향을 주었고, 이한진의 ‘속어부사’, 이형상의 ‘창보사’ 등에 이어지고, 드디어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로 이어졌다. 윤선도는 ‘어부사시사’의 서문에서 ‘어부사를 읊으면 갑자기 강에 바람이 일고 바다에는 비가 와서 사람으로 하여금 표표하여 유세독립의 정서가 일어나게 했다. 이런 까닭으로 농암 선생께서 좋아하셨으며 퇴계 선생께서도 탄상해 마지 않으셨다’고 했다.>

 

참으로 훌륭한 분을 기억하지 못했다는 무지와 무관심을 부끄러워하며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선 농암 이현보의 ‘어부가’를 찾아 읽었다. 시대와 시절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뭉클 전해지는 심정이 있었다. 원문 그대로는 아니지만 ‘어부가’는 다음과 같았다. 함께 동행하며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 호대원 목사님에 의하면 선비에게 어부의 일이란 정신세계와 세상을 이어주는 경계와 같은 일이었다.

 

이 중에 시름없으니 어부(漁父)의 생애이로다
일엽편주(一葉扁舟)를 만경파(萬頃波)에 띄워 두고
인세(人世)를 다 잊었거니 날 가는 줄 몰라라

굽어보니 천심녹수(千尋綠水) 돌아보니 만첩청산(萬疊靑山)
십장홍진(十丈紅塵)이 얼마나 가렸는고
강호(江湖)애 월백(月白)하거든 더욱 무심(無心)하여라

청하(靑荷)에 밥을 싸고 녹류(綠柳)에 고기 꿰어
노적화총(蘆荻花叢)애 배 매어 두고
일반청의미(一般淸意味)를 어느 분이 아실가

산두(山頭)에 한운(閑雲起)하고 수중(水中)에 백구(白鷗飛)라
무심(無心)코 다정(多情)하니 이 두 거시로다 (이 두가지 뿐이로다)
일생(一生)애 시름을 잊고 너를 좆아 놀으리라

장안(長安)을 돌아보니 북궐(北闕)이 천리(千里)로다
어주(漁舟)에 누었신들 잊은 때가 있으랴
두어라 내 시름 아니라 제세현(濟世賢)이 업스랴

 

위의 시도 원문 그대로는 아니었는데 그것마저 이해가 쉽지 않은 터에 조금 쉽게 뜻을 풀어놓은 것이 있었다. 

 

이런 (어부생활) 속에 근심 걱정할 것 없으니 어부의 생활이로다
한 척의 조그마한 배를 끝없이 넓은 바다 위에 띄워 놓고
인간 세상의 일을 다 잊었으니 세월 가는 줄을 모르겠도다

(아래로) 굽어보니 천 길이나 되는 푸른 물, 돌아보니 겹겹이 쌓인 푸른 산
열 길이나 되는 속세의 띠끌(어수선한 세상사)은 얼마나 가리워졌는가
강호에 밝은 달이 밝게 비치니 더욱 무심하구나

연잎에 밥을 싸고 버들가지에 잡은 물고기를 꿰어서
갈대와 억새풀이 우거진 곳에 배를 대어 묶어 두니
이런 자연의 참된 재미를 어느 분이 아실까

산봉우리에 한가로운 구름이 피어나고(일어나고) 물 위에는 갈매기가 날고 있네
아무런 사심없이 다정한 것은 이 두 가지뿐이로다
한평생의 시름을 잊어버리고 너희들과 더불어 지내리라

멀리 서울을 돌아보니 경복궁이 천 리로구나
고깃배에 누워 있은들 (나랏일을) 잊을 새가 있으랴
두어라, 나의 걱정이 아닌들 세상을 건져낼 위인이 없겠느냐

 

‘인간 세사를 잊었거니 세월 가는 줄을 알랴’, 그렇게 노래할 수 있는 시간이 부디 내게도 찾아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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