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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술만 퍼먹은

by 한종호 2019. 7. 6.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84)

 

술만 퍼먹은 

 

부산을 다녀왔다. 먼 길이지만, 다녀올 길이었다. 한 지인이 전시회를 열었다. 지인이 전시회를 연다고 불원천리 먼 길을 달려갈 입장은 아니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다녀온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종이로 작품을 만드는 종이공예는 한 부분을 표현하기 위해 수십 번, 수백 번 손이 가야 하지만 별로 티가 안 난다. 하지만 작가의 눈에는 그냥 지나갈 수 없는 부분이 있어 칼질을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 하지만 먼 길을 달려간 것은 작가의 그런 수고 때문만은 아니었다. 산고의 고통 없이 작품을 내어놓는 작가가 어디 있겠는가.


고단하면서도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길, 그런데 딸이 아버지의 길을 이어 걷기로 했다. 아버지가 하는 작업을 눈여겨보고 그 길을 함께 걷기로 하고, 아버지의 작품과 딸의 작품을 함께 내거는 전시회였다. 누구보다 딸에게 따뜻한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어쩌면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난겨울, 그는 귀농 후 땀으로 지은 집을 한 순간에 잃었다. 집에 불이 난 것이었고, 숟가락 하나 건지지 못한 채 삶의 근거를 졸지에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엄동설한 한 복판에 집을 잃었으니, 그 뒤에 이어진 시간이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런데 그는 100일 만에 집을 다시 지었다. 모든 것이 넉넉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막막함, 딱 한 계단씩을 열어주시는 은총을 힘입어 집을 지었다. 그는 기적이라 말했고, 그의 아내는 은혜라 말했다. 대신 그는 자신의 몸을 연장이자 도구로 삼아야 했고, 매 시간 이를 악다물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회는 잿더미를 뚫고 고개를 내미는 연둣빛 싹처럼 여겨졌다.

 

 

 

 

전시회가 열리는 곳을 찾아 작품을 보고, 허름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우리만큼 먼 길 달려온 일행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밀양으로 향했다. 부산에서 더 보고 싶은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라는 일정, 그가 다시 세운 집으로 향했다.


같은 자리에 비슷한 집이 서 있었다. 굳이 말하지 않았다면 예전에 들렀던 집과 다르다는 생각을 못했을 것이었다. 그는 야외에 만든 화덕 위에 큰 솥을 걸고 닭을 삶기 시작했고, 덕분에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어느 날 다시 집을 짓느라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는데 저만치 인기척이 나더란다. 바라보니 동네 할매, 할머니 한 분이 멍하니 서서 그냥 울고 계시더란다.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기가 막힌 상황에서도 그의 아내는 말했단다. 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남기자고. 그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병원으로 출근을 했고, 친한 환자들에게도 티를 내지 않고 평상시처럼 일을 해 환자들이 뉴스를 보고 불난 소식을 먼저 알게 됐단다.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집 바로 옆이 산이어서 큰 불이 번질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그 불을 막아준 것은 집 곁에 서 있는 소나무 몇 그루, 그들은 자신들의 몸을 태우며 그 자리를 지켜 불길을 막았단다. 시커멓게 변한 채 우두커니 서 있는 소나무 몇 그루가 성스러웠다. 한 이웃이 농막을 빌려주어 석 달간을 지냈는데, 농막 안에 방한 텐트를 치고 다 큰 딸과 아들과 함께 온 식구가 잠을 자서 그 때처럼 가족들이 가까이 지낸 시간이 드물었다며 웃는 웃음이 해맑다. 토종닭이 푹 삶아질 때까지 이어진 이야기는 길고도 눈물겨웠고 고마웠다. 

 

그렇게 들었던 이야기 중에 가장 마음이 뭉클했던 이야기가 하나 있다. 동네에 있는 식당에 갔더니 주인인 욕쟁이 할머니가 그를 보곤 대뜸 한마디를 하더란다.


“니 땜에 저 산에 사는 스님이 사흘간 술만 퍼 먹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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