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워버려야 할 것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88)

 

 태워버려야 할 것 

 

드라마와 소설을 통해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로 다가온 이가 허준이다. 허준과 유의태 사이에 있었던 일 중에는 다음가 같은 일이 있다.

 

유의태 문하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허준에게 뜻밖의 일이 주어진다. 창녕에 사는 성대감의 아내 정경부인 심씨의 병을 고치라는 유의태의 분부였다. 용하다는 숱한 의원들이 찾았다가 하나같이 손도 쓰지 못하고 포기했을 정도로 부인의 병은 깊고 위중한 상태였다. 양반 중에서도 양반인 권세 어린 대감집 인지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유의태는 허준의 사람됨을 알아보고 아들 도지 대신 겨우 십여 명의 병자를 돌보았을 뿐인 의가의 풋내기 허준을 보낸다.


대감의 권세에 굴하지 않는 단호한 처신과 지극한 정성으로 허준은 불가능해 보였던 정경부인의 병을 기적처럼 고쳐낸다. 마치 약사여래불의 재림을 보듯 사람마다 경외의 눈으로 허준을 바라보는 것은 당연했다.


고마움의 표시로 집을 한 채 지어주겠다는 대감의 호의를 깨끗하게 물린 허준이었지만, 결국은 선물 하나를 받아들고 대감집을 나서게 된다. 내의원 입격에 꿈이 있는 걸 알게 된 대감이 내의원을 관장하는 도제조에게 소개장을 써 준 것이다. 도제조인 우의정은 대감과 교분이 두터운 사이로 대감의 소개라면 내의원 취재에 합격을 보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일이었다. 천민의 신분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 허준은 대감이 써 준 천거서를 감격하여 받아들고 집으로 온다.


허나 다음날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소개장을 받아왔다는 말을 들은 유의태는 소개장을 내놓으라고 불호령을 하고, 허준이 보는 앞에서 그것을 불살라 버린다.

 

 

 


“비록 세상이 어지러워 공(公)과 사(私)가 애매한 풍속이기로서니 인명을 다루는 의원은 사사로운 인정으로 자격을 얻을 수 없다.”


이런 나약한 자가 자신의 문하에서 나왔다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수치로 여기며, “벼슬 높은 자의 서찰 따위로 네 앞날을 열려고 마음먹은 순간에 너는 이미 나를 배신한 것, 너와 나의 인연은 끝났다.”며 유의태는 허준을 자신의 집에서 매섭게 내쫓고 만다.

 

그게 스승, 멘토의 모습이었다. 허준에겐 생명과도 같았던 소개장을 단숨에 불살라버리는, 사사로운 정에 이끌림 없이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가르는, 진정한 스승은 그런 것이었다. 예수를 스승으로 따르는 우리에게 불태워 버려야 할 소개장이 없는 것일까? 내 앞날을 보장해 줄 것 같은 소개장을 받기 위해 예수를 등지는 일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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