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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흙 당근 할머니의 정성값

by 한종호 2019. 11. 30.

신동숙의 글밭(17)/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흙 당근 할머니의 정성값

 

제가 살고 있는 작은 마을의 장날입니다. 가까운 시골에서 모여든 농사 짓는 분들의 농산물. 부산에서 모여든 수산물 상인들. 마을의 텃밭에서 이웃들이 손수 가꾼 채소들. 그리고 나름의 장날 구색을 갖춘 옷가지, 이불, 생필품, 두부, 메밀 전병, 잔치 국수, 어묵, 떡, 참기름, 뻥이요~ 뻥튀기, 색색깔 과일들, 곡식들, 밤, 대추.

 

가을날 오일장은 풍성한 추수 감사날입니다. 한 해 동안 지은 수확물 중 가장 좋은 것으로 차려 놓고 손님을 기다립니다. 눈길 한 번, 멈추어 서는 발걸음 한 번을 기다리는 간절한 눈빛. 그 생을 끌어 당기는 눈빛들이 모여 햇살처럼 비추면 무겁던 하루살이에도 윤기가 돕니다.

 

땅바닥에 올망졸망 모양도 제각각인 흙 당근 한 무더기를 쌓아 둔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당근은 집에서도 떨어지지 않는 반가운 식재료. 다져서 볶음밥도 하고, 조림에도 넣고, 깎아서 생으로도 먹는 달고 아삭한 주황 당근. 곁에 쭈그리고 앉으신 할머니께 값을 물으니 한 봉지에 천 원이라 하십니다.

 

할머니는 당근을 담으시고, 나는 이 천 원을 꺼내서 드립니다."할머니, 농사 지으셔서 거져 다 주시면 우째요. 이 돈도 작아요." 했더니, 손사래를 치시며 천 원만 달라십니다.

 

꾹꾹 이 천 원을 손에 쥐어 드리려니, 할머니는 맞잡은 비닐 봉지를 붙드시며 서너 번 검고 투박한 흙손이 왔다갔다 합니다. 그렇게 당근을 덤으로 더 담으십니다. 저는 저대로 그만 담으셔도 된다며 작은 실갱이가 오고 갑니다. 물방울처럼 퉁퉁 부딪힌 할머니와 제 마음이 순간의 온정을 나누었는지, 미안하던 마음 한 켠이 따뜻해져옵니다.

 

흙 당근 할머니의 마음은 거져 주는 흙을 닮으셔서 그런지, 힘겹게 농사 지으신 자식 같은 당근을 거져 주시면서도 할머니의 표정에는 인심을 쓰는 듯한, 생색을 내는 듯한 기색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그 마음을 거절할 수 없어서 흙 당근 한 봉지를 묵직하게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미안하도록 뭉클하게 따뜻해져오는 마음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굽으신 허리로 한 해 동안 농사 지으셨을 할머니의 땀과 수고로움과 정성에 한 끝도 미치지 못하는 당근값. 한 봉지 가득 이 천 원. 할머니의 정성은 무엇으로 값을 치뤄 드려야 하나, 어느 누가 알아주실까. 마음이 흐르고 흐르다가 낮은데 계시는 하나님한테로 눈물이 빗물처럼 고입니다.

 

제가 치르지 못한 할머니의 정성을 하나님이 알아주시고, 대신 정성값을 치뤄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 흙에 손 한 번 안 묻히고 먹기만 하는 염치 없는 마음. 가장 작고 못생긴 당근 한 알 닮은 작은 마음. 작고 작은 마음을 모아서 감사 기도 드립니다.

 

그렇게 잔잔히 흐르는 마음을 따라 걷는 걸음 걸음이 점점 새털처럼 가볍습니다. 주황색 당근빛으로 노을이 아름답게 물드는저녁답, 작은 마을의 하루는 그렇게 무르익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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