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두런두런(5)
우리는 모르는 만큼 말한다
헨리 나우웬의 책을 읽고 있던 아내가 내게 물었다. 한 문장을 읽을 터이니 그것이 무엇을 두고서 한 말인지를 알아 맞춰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눈을 감은 뒤 아내가 읽어주는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나는 탄광의 본고장 뉴캐슬에 석탄을 지고 가는 기분이요, 네덜란드 사람의 표현대로라면 ‘올빼미 천지인 아테네에 가면서 올빼미를 데리고 가는 격’이며, 프랑스 사람의 말로는 ‘물을 들고 강에 가는 꼴’이 아닐 수 없다.”
동병상련 때문이었을까, 아내가 읽어주는 문장을 들으며 마음에 와 닿는 느낌이 있었는데 그 느낌은 틀리지 않았다. 강론(설교)에 대한 이야기였다. 헨리 나우웬이 온종일 사전을 들여다보면서 다음날 해야 할 강론에 필요한 단어를 찾으며 썼던 글이었다.
설교는 어떤 목회자에게라도 무거운 짐일 것이다. 아무리 편안한 시간을 보낸다 하여도 마음은 설교에 대한 부담으로부터 자유롭기가 어렵다. 달팽이처럼 평생 지고 가야 하는 마음의 짐, 혹은 평생을 멈출 수 없는 마음의 씨름인지도 모른다.
불안할 때 꾸는 꿈은 때마다 달랐던 것 같다. 어릴 적에야 무서운 동물에게 쫓기는 꿈을 자주 꿨고, 학창 시절엔 전혀 공부를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시험을 보는 꿈, 군 생활을 마친 뒤로는 분명히 제대를 했는데도 또다시 군대에 끌려가는 꿈을 꾸곤 했다.
목회를 시작하고부터는 아무 준비 없이 제단에 서는 꿈을 꿀 때가 있다. 제단에 올랐는데 설교 노트가 보이지 않을 때도 있고, 바지를 입지 않거나 양말을 신지 않고 제단에 서 있을 때도 있다. 그런 모습이 꿈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면 설교가 목회자에게 주는 중압감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짐작하게 된다.
설교를 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것 중의 하나는 정말로 중요한 부분이 빠져있다는 생각이다. 성경을 근거로 하여 이런 저런 말을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빠뜨린 채 사소한 것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빠질 때가 있다.
‘내가 믿는 것은 말해진 적이 없는 모든 것입니다’라는 릴케의 고백에 비춰 생각해보면, 어쩌면 우리는 아는 만큼이 아니라 모르는 만큼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아무리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하여도 결국은 모르는 만큼, 경험과 사유가 가 닿지 못한 만큼 말을 하는 것일 게다.
모르는 만큼 말을 하는 이 아릿한 한계와 아픔을 누가 얼마나 짐작을 할까. 결국 말 너머에 남겨지는 진실을 헤아리는 혜안은 어디서 어떻게 구해야 하는 것인지.
한희철/동화 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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