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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빛바랜 시간들

by 다니엘심 2020. 1. 22.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83)

 

빛바랜 시간들

 


첫 목회지 단강에서 지낼 때 매주 만들던 주보가 있다. <얘기마을>이란 소식지였다. 원고는 내가 썼고, 옮기기는 아내가 옮겼다. 특유의 지렁이 글씨체였기 때문이었다. <얘기마을>은 손글씨로 만든 조촐한 주보였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적었다. 내게는 땅끝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물론 적을 때마다 조심스러웠다. 누군가의 아픔을 함부로 드러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늘 마음을 조심스럽게 했다. 언젠가 한 번은 동네에선 젊은 새댁인 준이 엄마가 주보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목사님, 욕이라도 좋으니 우리 얘기를 써 주세요.” 

 

민들레 씨앗 퍼지듯 이야기가 번져 700여 명이 독자가 생겼고, 단강마을 이야기를 접하는 분들도 단강을 마음의 고향처럼 여겨 단강은 더욱 소중한 동네가 되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마음을 합한 이들도 있었고, 먼 길을 찾아와 단강마을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고, 성탄절을 함께 보내기도 했다.

 

잘 묶어두었던 <얘기마을> 주보를 엉뚱한 일로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첫 번째 책인 <내가 선 이곳은>을 낸 출판사에 열다섯 권의 주보묶음을 넘겼는데, 이사를 하면서 잃어버렸다고 했다. 내게는 더없이 소중한 시간들, 하지만 더 이상 그 시간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일까 싶었다. 남아 있는 것을 추리니 온존하지 못한 모습으로 엉성하게 모였다. 하긴, 단강에서의 시간은 마음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족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나던 터에 최용우 전도사님이 <햇볕같은 이야기>에 단강마을 이야기를 올리기 시작했다. 결혼을 하고 신혼여행 중에 단강에 들러 성탄절을 함께 보낸 전도사님으로, 문서선교를 조용히 그러나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있는 분이다. 

 

내게는 빛바랜 시간과 다를 것이 없는 시간들, 그럼에도 그 빛이 아주 사라지지 않는 기억들, 페이스북에 한 꼭지씩 단강마을 이야기를 올리는 것은 <햇볕같은 이야기>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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