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87)
날 때부터 걸어서
설 명절을 맞아 흩어져 있던 식구들이 어머니 집에서 모였을 때, 어머니가 봉투 하나를 가지고 오셨다. 봉투 안에는 여러 장의 사진이 담겨 있었다. 사진 중에는 오래된 흑백사진들도 있었는데, 특히 예배당 앞에서 찍은 단체사진에 눈이 갔다. 내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모두 보낸 고향교회의 옛 예배당과 새벽마다 종을 쳤던 종탑을 배경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찍은 사진이었다.
당연히 사진 속 인물들에 관심이 갔는데, 옛 예배당 앞에서 찍은 두 장의 흑백사진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이제는 93세, 하지만 사진 속 한창 젊은 어머니는 두 장 모두 아기를 안고 사진을 찍은 것이었다.
어머니가 안고 있는 아기가 누구인지를 떠올려보니 한 명은 바로 위의 형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아래 동생이었다. 사진을 찍은 연도를 볼 때 형과 동생이 당연하다 여겨졌다. 마침 사진 속에 담긴 형과 동생이 어머니와 함께 사진을 보고 있는데, 오래된 흑백사진 속에는 형과 동생만 있고 나는 없었다.
형은 어디 갔냐는 듯이 동생이 힐끔 나를 쳐다보기에 어머니 대신 내가 대답을 했다.
“나는 날 때부터 걸어서 이런 사진이 없나 봐.”
실없는 소리를 해도 웃음으로 받아주는 날이 명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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