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89)
염치(廉恥)
‘염치’라는 말을 떠올리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일이 있었다. 지난 해 겨울 <대한기독교서회>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다. 사순절을 맞으며 작은 책 한 권을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사순절 묵상집과 대림절 묵상집 원고를 몇 번 쓴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아예 단행본으로 출판하고 싶다는 의견이었다. 글의 주제도 정해진 터였다. 지켜야 할 마음 20가지와 버려야 할 마음 20가지를 묵상하자고 했다.
제안을 받으며 몇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짧은 일정이 마음에 걸렸다. 글을 쓸 기간도 넉넉하지 않은데다가 연말연시는 교회에 여러 가지 일들이 몰려 있는 때, 마음을 집중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보다 더 조심스러운 것이 있었는데 주 독자층을 젊은이들로 생각한다는 말이었다. 뜻은 좋지만 그 말이 내게는 모순처럼 들렸다. 주제는 가볍지 않은데, 글의 내용은 무거우면 안 되는 것으로 다가왔으니 말이다. 지켜야 할 마음과 버려야 할 마음이라는 짐짓 진지한 주제를 젊은 층과 나눌 수 있을지는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나도 이젠 나이를 먹었고, 생각은 더 이상 발랄하거나 창조적이지 못한 채 무겁거나 진부하거나 비루하거나 고루해졌다.
그렇게 주저하는 마음이 컸으면서도 끝내 청탁을 받아들였던 것은 마음속을 지나가는 한 생각 때문이었다. 혹시 이 일이 내 마음을 체에 걸러보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었다.
지켜야 할 마음 20개와 버려야 할 마음 20개는 그것을 정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합하면 모두 40개의 마음, 대추나무에 연 걸린 것처럼 복잡하게 뒤엉겨 있는 마음을 그렇게 명확하게 분류하여 나누는 것이 어찌 쉬울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원고를 쓰게 되었는데, 글을 쓰며 지켜야 할 마음의 하나로 정한 것이 ‘염치’(廉恥)였다. 꽤 여러해 전 춘천에서 경험했던 일이 떠올랐다. 춘천중앙교회에서 경로대학 강의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갈 때였다. 화교(華僑)들을 위한 학교 앞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학교 건물 벽면에 걸려 있는 커다란 글씨가 눈에 띄었다. 아마도 교훈(敎訓) 아닐까 싶었는데, 눈에 확 들어온 말이 있었다. ‘廉恥’였다. 세상에, ‘염치’를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니! 염치를 가르치고 배우는 것을 교육의 목표로 삼은 학교가 있다는 것이 반가움보다도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젊은이들이 공감을 할까? 우리가 지켜야 할 마음 중에는 체면과 부끄러움을 아는 ‘염치’가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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