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88)
작은 십자가를 보며
고마운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리라. 우리로서는 작은 것을 당연함으로 나누었을 뿐인데, 그 일을 고맙게 여겨 귀한 마음을 보내왔다. 상자 안에는 마음이 담긴 인사말과 함께 성구를 새긴 나무판과 십자가가 담겨 있었다. 두 가지 모두 직접 만든 것이었다. 성구가 새겨진 나무판은 교우들이 모여 식사를 하는 아가페실에 걸어두었고, 작은 십자가는 목양실 책장에 올려두었다.
평범한 십자가라 여겼는데, 오늘 새벽에 들어서며 보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무슨 나무였을까, 껍질을 벗긴 나무의 흰빛은 알몸처럼 다가왔다. 십자가의 고통 중 가장 큰 고통은 가시면류관을 쓰고, 못이 박히고, 창으로 찔리는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무 위에 매달려 발가벗겨지는 것보다 더 큰 고통과 수치가 어디 있겠는가? 드러나야 할 것은 우리의 치부, 그런데도 발가벗겨진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가만 바라보니 나무 몇 곳에 까만 점들이 있다. 잔가지를 잘라내고 남은 상흔일 것이다. 우리가 아직도 다 헤아리지 못한 십자가의 아픔이 왜 없겠는가? 아무도 모르게 버린 마음들, 그래서 아무도 모르는 상처로 남은 일들이 십자가 안에는 적지 않을 것이다.
나무의 굵기로 볼 때 세로로 세워진 나무는 거꾸로 서 있었다. 아래쪽보다도 위쪽이 더 굵었다. 어쩌면 십자가는 위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서는 것인지도 모른다. 위태해도 이 땅에, 부조리한 현실에 뿌리를 박는 것이다.
십자가 아래쪽엔 툭 불거져 나온 부분이 있었다. 나무의 본래 모양이 그랬겠다 싶은데, 십자가를 만드는 이는 그 모양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불뚝 튀어나온 부분이 있다고, 매끈하지 않다고 나무를 버리지 않고 본래의 모양 그대로를 살린 것은 십자가를 만든 이의 십자가 묵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찌 십자가를 묵상하지 않으며 십자가를 만들 수가 있겠는가.
툭 불거져 나온 부분이 문득 내게는 꺾인 무릎으로 다가왔다. 십자가는 무릎이 꺾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발로 서려는, 내 생각대로 하려는 그 무릎을 꺾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뒤 바라보니 툭 불거져 나온 부분과 거기에 남아 있는 나뭇결의 모양이 마치 무릎 뼈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처럼 보였다.
더 못 본 것이 무엇일까 싶어 새벽예배 후 십자가를 책상 위에 올려두고 바라보았다. 꺾인 부분에 다시 눈이 갔다. 어쩌면 툭 불거져 나온 저 부분은 십자가에서 흘린 땀과 눈물과 피가 고여 있는 것 아닐까, 서로 엉겨 있는 것 아닐까 싶었다. 십자가에서 흘린 한 방울 한 방울은 모두 진액과 같아서 쉽게 떨어질 수 없었고, 몸을 타고 흐르던 땀과 눈물과 피가 저 자리에서 모여 응어리진 것은 아닐까 싶었다.
십자가로 인하여 내 안에 응어리진 곳은 어디일까, 그런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아랫부분이 툭 불거진 채로 거꾸로 선 십자가는 내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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