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82)
수도원에서 1박 2일
성 베네딕토 왜관 수도원 분원에서 1박 2일을 보내게 되었다. 토머스 머튼의 영성과정은 이미 신청이 마감되었다고 한다. 선배님들 얘기론 간혹 사정이 생겨 빈 자리가 나기도 한대서 혹시나 싶어 전화를 드렸더니, 빈 방이 있지만 좀 추울 텐데 그래도 괜찮으시겠냐고 물으신다. 하룻밤 추운 방에서 지내는 경험도 익숙함에 묵은 정신을 깨우기엔 좋은 환경이다 싶어 흔쾌히 승낙과 함께 감사 인사를 드렸다.
여러 번 강론을 들으러 오면서, 낮에 방문들이 활짝 열려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좁다란 방에 나무 책상 하나, 철재 의자 하나, 일인 침대가 양쪽 벽으로 나란히 놓인 모습을 맑고 신선하게 들여다 보곤 했다. 방문에서 정면으로 나무 책상이 먼저 보인다. 오래된 나무 창틀이 어릴 적 옛집에서 본 그대로다. 유리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복도 바닥까지 굵은 빛그림자를 그려 놓았다. 심심한 수도자의 방이 환하게 순한 웃음으로 반기는 얼굴 같다.
도착해서 배정 받은 열쇠를 손에 쥐고 3층 복도를 지나며, 방 번호를 확인하면서 햇살 가득한 방만 찾았다. 복도 끝까지 걸어가서 아무리 찾아봐도 번호가 맞지 않아 혹시나 싶어 반대편을 보니, 그늘진 방이 거기 있는 줄은 처음 보게 된 것이다. 순간 가슴께를 스치는 선들한 바람에 환하던 마음에 그늘이 지는 듯했다.
방안에 들어서니 맞은 편 방에 계시던 아주머니가 열린 방문으로 먼저 인사를 건네 오신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이 "해가 없어서 어떻해요?", 나는 인사를 드리며 괜찮다며 말하자마자, 아주머니는 괜히 엉거주춤 "방문을 닫을께요." 하시며 닫으신다. 드디어 나 혼자 있는 방이다. 처음 거하는 소박하고 단순한 수도자의 방이 5성급 호텔 스위트룸보다 마음에 평온한 자유함을 준다. 고층 건물보다는 생명을 해치지 않으면서 평등하게 지은 기도의 방일 테니까.
평소에도 햇살을 좋아하다 보니, 요즘 들어 아침이면 마루에서 거실창을 등 지고 앉아 고요한 시간을 자주 갖는다. 오래 머물수록 마음은 더 가라앉으면서 점점 따뜻해져 오는 시간 너머의 시간이다. 일상 속에서 사람들과 얽힌 일들로 복잡하고 어수선 마음을 애써 털어내기보다는 그대로 가슴에 안고서 그냥 앉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마주하는 어둡고 시린 가슴은 겨울 같기도 하고 추운 밤이 되기도 한다. 처음엔 그 쓸쓸한 느낌이지만, 그래도 일어나지 않고 조금 더 오래 고요히 머물러 앉아 있기로 한다. 가슴 한 가운데 예수를 떠올리면서. 그러면 가슴이 점점 따뜻해져 오고 뜨거운 샘물 같은 게 차오르는 것이다.
그런 줄 알기에, 바깥에 햇살이 아무리 좋다지만, 내면에서 해처럼 때론 별빛처럼 떠올라 시린 가슴을 따뜻하게 물들이는 그 내면의 햇살이 더 좋은 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머무는 방이 비록 그늘진 방이지만, 마음에는 그늘이 지지 않는다. 고요히 머물러 매 순간 숨이 거칠어지지 않도록, 예수를 가슴에 품고서 그렇게 오래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날이니까. 더 바랄 것이 없다는 마음이 따뜻한 한 줄기 바람처럼 가슴께를 스친다. 그러면서 돌아서면 금방 배가 고프듯 마음은 춥고 어둡다며 또 엄살을 부리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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