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01)
잘 익은 소나무
소나무에 대해 물었던 것은 최소한의 지식을 얻기 위해서였다. 조경 일을 하는 홍 권사님께 한 두 마디만 들어도 소나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싶었던 것이다.
인우재 앞에는 소나무가 몇 그루 서 있는데, 산에서 씨가 떨어져 자란 작은 것을 캐다 심은 것이 시간이 지나며 제법 자란 오른 터였다. 나무가 잘 자란 것은 좋은데, 문제는 앞산을 가리는 것이었다. 인우재에선 마루에 앉아 앞산을 바라보는 즐거움이 쏠쏠한데, 산을 가로막고 있으니 답답했다. 나무를 다듬을 줄은 모르고 이참에 밑동을 잘라내야 하나 싶어 권사님의 의견을 물었던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은 권사님은 나무를 봐야지 대답을 하지 않겠느냐며 기꺼이 시간을 냈다. 권사님과 함께 인우재를 찾은 것은 그런 연유였다.
도착 후 잠시 숨 돌릴 새도 없이 권사님은 소나무를 다듬기 시작했다. 아직 소나무가 얼어 있다면서 마당에 있는 반송부터 다듬기 시작했다. 아, 나무를 아는 사람들은 나무가 얼어 있는 것도 대번 아는구나, 새로웠다. 심어만 놓고 한 번도 손을 안 대기는 반송도 마찬가지였다. 몇 년째 면도를 하지 않은 노총각 면도하듯 나무를 다듬기 시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는 아주 다른 나무로 바뀌었다. 얼떨결에 노총각을 면하여 예식장에 선 신랑 같았다.
트럭 뒤에 장비를 싣고 온 권사님은 본격적으로 나무를 다듬어 나가기 시작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자를 건 자르고, 다듬을 것은 다듬었다. 큰 가지와 줄기도 잘라야 할 것은 미련 없이 잘랐는데, 나 같으면 한참을 망설여야 할 것 같은 순간에도 권사님은 전혀 망설이는 기색이 없었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몸이 따라 움직였는데, 모든 동작들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권사님이 일하는 모습을 눈여겨보니 나무에 올라 전지를 하기 전에 먼저 하는 일이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톱으로 가지를 두드렸다. 그렇게 살아 있는 가지인지, 죽은 가지인지부터 확인부터 했다. 죽은 가지를 잘못 밟으면 부러져 다칠 수도 있는 것이었고, 나무를 다듬으며 죽은 가지를 남겨둘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권사님은 가지에서 나는 소리를 통해 가지의 생사를 확인하지 싶었다. 일정하게 이어지는 동작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
그날 내가 한 일은 권사님을 돕는 일이었다. 위에서 자른 나무를 한쪽에 치우는 것 밖에는 없었다. 대신 권사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가지를 자르느라 나무를 오르락내리락 했고, 종일 톱질과 가위질을 했다. 권사님에 비해서는 훨씬 가벼운 일을 했음에도 저녁때가 되었을 때 나는 나도 모르게 어기적거리며 걸었다. 그런데 권사님은 아무런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다음날 아침 일찍 들러 내 몸이 괜찮은지 묻기까지 했다. 권사님이 몸살 안 났는지를 묻자 저는 몸에 배서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을 했다.
올해 권사님의 나이가 일흔 넷, 나이에 비해 일이 과하다 싶은데 권사님 일하는 모습 속엔 원숙함이 담겨 있었다. 하는 일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그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아는 전문성, 그리고 그것을 무리 없이 해내는 몸에 밴 근육과 움직임, 잘 익은 사람이란 저런 사람이구나 싶었다. 내게는 권사님이야말로 잘 익은 한 그루 소나무였다.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순종, 순명 (1) | 2020.02.18 |
---|---|
한바탕 (1) | 2020.02.17 |
그들 자신의 죽음을 주십시오 (2) | 2020.02.15 |
종들의 모임 (2) | 2020.02.14 |
자화상 (2) | 2020.02.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