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05)
남은 자의 몫
한 달에 한 번 찾아가 예배를 드리는 회사가 있다. 오래 전부터 이어오는 모임인데, 점심시간 회의실에 모여 예배를 드린다. 바쁜 시간을 쪼개 예배하는 모습이 소중하게 여겨진다.
정릉에서 회사까지는 40여 분 시간이 걸린다. 도중에 길이 막히면 시간을 장담할 수가 없어 대개는 여유를 두고 길을 나선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을 하면 잠깐 들르는 곳이 있다. 회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보름산미술관’이다. ‘보름산미술관’은 이름만큼이나 정겹고 평온한 공간이다. 참나무 주변으로 찻집을 겸하고 있는 건물도 그렇고, 그보다는 손님을 맞는 주인장 내외가 그렇다.
두 달을 굶듯 건너뛰고 이번 달에는 들를 시간이 되었다. 미술관 앞으로 벌어지고 있는 대규모의 아파트 단지 공사가 거반 꼴을 갖추고 있었다. 조용한 찻집으로 들어서자 오랜만이라며 환하게 맞아주는 주인의 웃음이 여전했다. 잠시 뒤 그의 아내와 동생이 약속 없이도 동석을 했다. 모두가 반가운 얼굴들, 자연스럽게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책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책 두 권을 전해 받았다. <의사 윤한덕>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설 명절에도 응급환자를 위해 자리를 지키다가 순직을 한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장 윤한덕 의사는 보름산 미술관 주인과 동서지간이다. 주인내외로부터 뉴스에 언급된 내용 이상의 이야기를 들어왔던 터였다. 그의 삶이 소중하게 기억되었으면 바라던 터에 책이 나왔다니 반가운 마음이 컸다.
환자와 병원 일이 가족보다 먼저였고 일이 삶의 전부였던 사람, 가족들에게는 얼마나 많은 인내와 이해가 필요했을까 싶어 책을 읽은 소감을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동안 몰랐던 많은 것을 알게 됐다고, 떠난 사람이 지키려 했던 가치를 진작 알아보지 못한 것이 송구하고 아쉬웠노라고 했다.
테오의 아내 이야기를 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지 꼭 10년 만에 고흐는 서른일곱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형의 뒤를 따른 것이었을까, 고흐의 유일한 후원자였던 테오 또한 그로부터 여섯 달 후 서른세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일 년 반 동안 결혼 생활을 했던 테오에게는 젊은 아내와 어린 아기가 있었는데, 테오의 아내 요한나는 당시 사람들이 아무 가치가 없다고 여겼던 고흐의 회화와 소묘 수백 점을 물려받게 되었다.
홀로 버려진 듯한 슬픔에 잠긴 요한나가 어느 날 남편의 책상에서 고흐가 남편에게 보낸 편지 뭉치들을 발견하게 된다. 고흐보다는 남편의 흔적을 만나기 위해 한 마디 한 마디, 아주 사소한 내용까지 빠짐없이, 온 마음과 온 영혼으로 편지를 읽던 요한나는 마침내 고흐를 만나게 된다. 고흐가 어떤 사람인지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가난한 무명의 화가, 고흐를 돕는 남편이 못마땅했을 수도 있었을 테오의 아내였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칠흑같이 어두운 고흐의 기일 저녁, 혼자 외출을 했던 요한나는 집집마다 빛이 새어나오고 사람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등을 돌렸을 때 고흐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요한나는 처음으로 이해를 하게 된다. 고흐는 ‘이 세상에 내 자리는 없는 것 같다’고 느끼며 살았던 것이었다. 고흐의 작품을 지켜낸 것은, 그런 과정을 거쳐 고흐를 만나고 이해하고 존경하게 된 요한나였다.
그것이 남은 자의 마땅한 몫 아니겠냐는 이야기를 할 때, 둘러앉은 모두의 마음은 숙연해졌다. 그런 우리를 책 표지 속의 한 의사(醫師, 義士)가 팔짱을 낀 채 환하게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잃어버린 마음 (1) | 2020.02.23 |
---|---|
왜 빈자리를 (1) | 2020.02.22 |
학예회 (1) | 2020.02.19 |
순종, 순명 (1) | 2020.02.18 |
한바탕 (1) | 2020.02.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