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07)
잃어버린 마음
서재에서 책을 찾다가 낡은 서류봉투를 발견했다. 발견했다기보다는 책장에 놓여 있던 봉투를 오랜만에 다시 보게 되었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가 기억나지 않아 열어보았더니 봉투 안에는 몇 가지 자료들이 들어있었다. 예전에 어머니가 전해주신 봉투였다.
1984년 감신대 학사 및 석사학위 수여식 순서지, 1987년 5월 2일 결혼식 청첩장, 1988년 단강교회 성전 및 목사관 봉헌예배 순서지, 단강초등학교 학생들이 백악관을 배경으로 찍은 미국방문 사진이 1면에 실린 2001년 5월 미주한국일보, 단강마을 이야기를 담은 책 <작은교회 이야기>에 관한 인터뷰가 실린 2012년 1월 13일자 한 일간지, 지난 시간 소중했던 일들에 대한 자료가 담겨 있었다. 어머니는 내게 중요하다 싶은 날에 대한 자료를 따로 보관해 오시다가 전해준 것이었다.
봉투 안에 들어 있던 자료 중의 하나가 ‘88년 크리스챤 신인문예 당선작’인 동화 ‘소리새’였다. <크리스챤신문> 두 면에 걸쳐 소리새를 실었는데, 신문에는 심사평과 당선소감도 실려 있었다.
신문은 누렇게 빛이 바랬고 몇 군데는 작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심사평은 박홍근 선생님이 썼다. ‘나뭇잎배’와 ‘모래성’을 작사한 분으로, 내가 좋아하는 아동문학가시다. ‘나뭇잎배’와 ‘모래성’은 언제라도 입가에 맴도는 정겨운 노래들이다.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 푸른 달과 흰 구름 둥실 떠가는/ 연못에서 사알살 떠다니겠지// 연못에다 띄워 논 나뭇잎배는/ 엄마 곁에 누워도 생각이 나요/ 살랑살랑 바람에 소곤거리는/ 갈잎새는 혼자서 떠다니겠지>
<모래성이 차례로 허물어지면/ 아이들도 하나 둘 집으로 가고/ 내가 만든 모래성이 사라져 가니/ 산 위에는 별이 홀로 반짝거려요// 밀려오는 물결에 자취도 없이/ 모래성이 하나 둘 허물어지고/ 파도가 어두움을 실어 올 때에/ 마을에는 호롱불이 곱게 켜져요>
심사평이 새로웠다.
<응모작품의 대부분은 소재가 평범한 것들이었다. 개중에는 재미있는 것도 있었으나 리얼리티의 문제에서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었다. 당선작으로 한희철 지음 <소리새>를 선정했다. <소리새>는 상징성이 짙고 강한 주제의식과 깊이가 있는 동화이다. 이 작품은 대화가 없이 지문으로만 서술되어 있는 동화이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장도 나무랄 데가 없다. “그 노래는 마치 빗줄기 사이를 천천히 걸어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등 표현이 좋은 대목도 많다.
수난의 아픔과 희생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또 인간의 천박한 행동을 꾸짖기도 한다. 소리새의 노래는 한 무리의 조상의 메시지이다. 그러나 모두는 그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소리새의 노래를 듣는 감각적인 장면은 환상적이며 승화된 느낌을 준다. 서슴지 않고 당선작으로 정한 것이 기쁘다.>
내게는 더없이 고마운 글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으로부터 어깨가 으쓱해질 만큼 칭찬을 들었던 것인데, 그보다 더 고마웠던 것이 있었다. 당시 나는 동화를 쓰면서도 내가 쓰는 것이 동화일까 싶었다. 주제를 살린다며 쓰다 보니 내가 보기에도 너무 무겁고 진지하다 여겨졌다. 선생님의 칭찬은 내가 쓰는 것도 동화라고, 그게 동화라고 일러주는 것 같았다.
한창 젊을 때의 흑백사진이 박힌 당선소감도 감회가 새로웠다.
<사십인가 오십인가 동화는 그 나이 되어서 쓰는 거라던 누군가의 말을 사실로 믿으며, 몇 분의 동화를 부러움으로 읽던 때였습니다. 소리새를 따라 우리도 발 묶어 떠나지 말아야 할 곳이 있다면 ‘내 나라 이 땅’과 ‘인간다움’이라는 곳 아닐지 모르겠다며 어색함 접고 처음으로 썼던 글이었습니다. 떠날 수 없는 땅에 끝내 남아 마지막 노래 부를 자가 그립던 때이기도 했습니다. 아마 시절 탓이었을 겁니다. 그날 이후 소리새는 늘 제 맘속에 있었지만 왠지 박제된 새 같았습니다. 언제나 살아서 날아오를까, 그 기다림은 누구보다도 저 자신에게 절실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선한 격려가 참 기쁘고 고맙습니다. 한동안 힘들기도 했거든요. 한 작품보다는 쓰고자 하는 글의 방향이 틀리지 않았음을 가르쳐 주신 것 같아 기쁩니다. 심사위원 선생님과 크리스챤신문사에 감사를 드립니다. 이제 막 백일이 지난 웃음 많은 첫딸 소리에게 이 기쁨을 모두 주고 싶습니다.>
돌아보면 간절하고 뜨거운 마음으로 동화를 썼던 시절이 있었다. 마음속에 찾아와 우물처럼 자리 잡은 이야기들, 손에 군살이 박히도록 두레박을 내리고는 했었다. 그 마음을 잃어버린 지가 꽤나 오래되었다. 어머니가 전해준 봉투 속에서 만난 처음으로 썼던 동화 ‘소리새’, 그 때의 뜨거움과 간절함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내다보는 창문 밖으로 봄비라 하기에는 성급하고 겨울비라 하기에는 게으른 비가 조용히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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