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십사만사천명

by 한종호 2020. 3. 8.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19)

 

 십사만사천명

 

이단이나 사이비에서 ‘전가의 보도’(傳家寶刀)처럼 가장 즐겨 애용하고 인용하는 것이 ‘십사만사천명’이 아닐까 싶다. 십사만사천명이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숫자로, 인침을 받은 자들(7:4), 어린 양과 함께 시온 산에 선 자들(14:1), 속량함을 받은 자들(14:3)에 해당된다.

 

우리가 하는 말을 들어야 십사만사천명에 들 수 있다고,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해야 십사만사천명에 들어갈지 말지 한다고 사람들을 겁박한다. 십사만사천명에 들어가기만 하면 영원히 왕노릇을 하게 된다고 현혹한다. 그런 유치한 겁박과 현혹이 어디 있을까 싶은데, 그게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다.

 

 

 


십사만사천명에 들어가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 다른 사람으로 채워지기 전에 내가 들어가야 한다는 욕심과 초조함 속에서는 어떤 사랑도 믿음도 찾아볼 수가 없다. 등수 매기기가 구원에서도 여전히 작동을 하는 기가 막힌 역설을 본다.

 

며칠 전 지인들과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서 십사만사천명 이야기가 나왔다. 이건 꼭 교인들에게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며 보탠 말이 있다.


“구원 받을 자가 십사만사천명 밖에 안 된다면, 하나님이 크게 실패한 것 아닌가? 그동안 살았던 사람들이 얼마나 많고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구원 받을 자들이 고작 십사만사천명 뿐이라면, 나는 그런 하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그런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라 부를 수가 있겠어.”

 

무엇에 마비된 것일까? 그런데도 십사만사천명에 목숨을 거는 것은.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디서 예배를 드리든  (1) 2020.03.10
그리운 오병이어  (1) 2020.03.09
언제간수밌나요  (1) 2020.03.07
이만희를 바라보는 '서글픔'  (1) 2020.03.06
내어놓아라  (1) 2020.03.0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