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21)
어디서 예배를 드리든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가 어찌 중요하지 않겠는가만, 예배가 중요하면 할수록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을 스스로 삼가는 것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가정에서 드리는 예배를 굳이 예배라 부르지 않을 이유가 없기도 하고, 이런 선택이 강요나 핍박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배려하고 사회의 아픔에 동참하는 자발적인 선택이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억압에 의해 누군가의 발을 닦으면 굴종이지만, 자발적으로 닦아주면 사랑이다.
모두의 마음이 같을 수는 없는 법, 서로 다른 선택을 한다 하여도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서로의 선택을 비방하거나 조롱하는 일은 불필요한 소모전이라 여겨진다. 군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던 시절, 마음대로 예배할 수 없던 시간을 두고서 우리는 배교를 떠올리지는 않았다. 훈련을 받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더 간절히 기도했고, 그런 시간을 또 하나의 예배라 생각했다.
정릉교회도 두 주째 교회에서 드리던 예배를 가정예배로 대신하고 있다. 낯설고 고통스러운 시간임에는 틀림이 없다. 빈자리를 볼 때면 교우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많은 교인들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도 빈자리를 마주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을 무겁게 한다는 것을 아프게 경험한다.
담임목사의 자리는 예배와 신앙에 대하여 적지 않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자리, 교역자와 장로님들과 의논하는 과정을 거치기는 하지만 주일예배를 가정예배로 대신하는 결정이 담임목사로서 쉽거나 당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문제를 두고 고민을 할 때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은 어느 순간부턴가 산과 들과 바다에서 예배한다. 당신이 계신 곳을 성전으로 삼았고, 사람들을 만나는 곳을 제단으로 삼으셨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말씀과 치유와 은총을 베푸셨다. 그 어떤 규정에도 얽매이지 않고, 사랑을 따르셨다.
도저히 금이 가지 않을 바위처럼 거룩한 날 안식일에 절대 권위가 부여되고 있을 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막2:27) 선언하신 분이 주님 아니신가. 그런 선언은 당시 그 말을 듣는 사람들 마음 한복판에 떨어진 핵폭탄과 다를 것이 없는 말씀이었을 것이다.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를 소홀히 여기자고 하는 게 아니다. 다만 어디서 드리든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가 예배이며, 예배의 바탕은 사랑이어야 한다.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빠진 예배를 진정한 예배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 드리느냐 그리심에서 드리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사람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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