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36)
씁쓸한 뒷모습
토요일 오후, 설교를 준비하던 중 잠시 쉴 겸 밖을 내다보는데 예배당 바로 앞 공터에 누군가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한 부인이 원예용 부삽을 들고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공터에 꽃씨를 심는 줄 알았다. 교인이 아닌 이웃이 교회 앞 공터에 꽃씨를 심는다면 꽃처럼 아름다운 마음, 찾아가서 인사를 해야지 싶어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부인 옆에는 화분이 있었는데, 화분에 흙을 채우고 있었다. 마당이 없는 이가 화분에 흙을 채우기 위해 왔구나 싶었고, 설교준비를 이어갔다. 잠시 시간이 지난 뒤 이제는 갔을까 싶어 다시 내다보니 부인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부인은 조금 전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흙을 채운 화분에다 주변에 피어난 제비꽃을 캐서 옮겨 담고 있었다. 보랏빛 제비꽃이 무리지어 예쁘게 피어났는데, 교회 조경 일을 맡은 홍 권사님이 정성껏 심은 제비꽃이었다.
아차 싶어 창문을 열고서는 그러지 마시라고, 교회에서 일부러 심은 꽃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부인은 당황해 하며 미안하다고 했다. 공터에 예쁜 꽃이 피어 있어 캐가도 되는 줄 알았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싶었다. 그런데 부인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이왕 캤으니 캔 것은 가져갈게요. 다시 땅에 심으면 아무래도 죽을 것 같네요.”
말문이 막혀 대답을 못하고 있는 사이 부인은 화분을 들고 자리를 옮겼다. 보랏빛 제비꽃이야 어디서든 아름답겠지만, 그 꽃을 들고 돌아서는 뒷모습은 씁쓸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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