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174)
술샘
술을 마시고 글을 쓴 적이 없다. 글을 쓴 후에도 마신 적이 없고, 먼 데서 찾아온 반가운 남동생이나 남편이 바로 옆에서 막걸리나 맥주를 한 잔 기울일 때도, 나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으니, 평소에 술을 아예 먹지 않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가족 모임과 벗들의 모임에서도 그저 물잔에 물을 따라서 함께 하는 자리를 즐기는 것이다.
술을 마시는 일이나 술을 마시지 않는 일이나 모두가 한 마음 먹기에 달린 일이지만, 나의 선택은 술을 마시지 않기로 한 것이다. 술 기운에 의지하지 않기로 결심을 한 것이 대학 신입생 시절 학과 동기, 선배들과 함께한 뒤풀이 자리였다.
어려선 종종 아빠의 술 심부름을 하곤 했었다. 아빠의 "소주 한 병, 콜라 한 통 사와라." 돈을 받으면 신나게 계단을 뛰어 올라가 슈퍼마켓에서 산 술과 과자가 든 비닐봉지를 흔들며 계단을 내려오곤 했었다. 요즘은 청소년들에게 술 심부름을 시키지 않는다고 하는데, 내가 초등학생이던 그 시절에는 술 심부름이 또 하나의 효도였다.
요즘 종종 벗들에게서 처음 술을 마신 이야기를 듣고는 웃기도 한다. 아빠의 막걸리 심부름을 간 얘기, 막걸리를 주전자에 받아서 오다가 출렁출렁 땅에 흘린 막걸리가 아까워 그대로 자기 입으로 흘려 보냈다는 이야기가 재미있다. 그러면서 그 처음의 술 경험이 계기가 되어서 지금까지도 술을 마신다고 하면, 나는 술병 마개가 너무 꽉 닫혀 있어서 어려선 술맛을 못 봤다며 그러면서 웃기도 한다.
밥상 앞에 앉으신 아빠는 투명 유리잔에 소주를 반쯤 부으시고, 나머지를 콜라로 채워서 반주로 드시곤 하셨다. 나는 소주와 콜라가 섞이는 그 투명한 모습을 신기한 듯 바라보곤 했었다. 그리고 아빠는 술을 드시기 전에 반드시 고시레를 하셨다. 거실 밥상 앞에 앉아서 술잔을 채우신 후 굳이 딱딱한 몸을 일으키셔서 주방 싱크대까지 가셔서, 아무도 없는 그곳에 술 한 모금을 흘려 보내시며, "고시레"를 하신 후 그 투명한 술을 드시는 것이었다. 술잔과 함께 뒤로 젖혔던 고개를 바로 세우시며, "아~ 맛있다!"
아빠의 술 고시레는 늘 한결같았다. 그래서였을까 어린 마음에도 눈에 보이는 술보다는, 입에 가져 가시기 전에 꼭 고시레를 하시던 아빠의 보이지 않는 그 마음이 더 궁금했었다. 아빠의 마음은 무슨 마음이었기에 그렇게 한 모금의 고시레를 한결같이 지켜오셨는지 지금도 그 마음이 궁금하다. 그 덕분인지 몰라도 아빠에게선 술주정을 본 적이 없다. 잠은 언제나 안방 잠자리에만 몸을 누이셨다. 일생을 마루에도 누우시는 법이 없으셨다. 아빠의 머리맡에는 코 푸는 휴지, 안티푸라민, 등긁게가 늘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저녁 밥상 앞에 앉으신 아빠의 고된 몸으로 흘러 들어가던 술은 어쩌면 술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가 4살 무렵 아빠가 장기려 박사님의 복음병원에서 8시간의 척추 수술을 하시고, 철심이 박힌 그 등에 짊어지신 삶의 무게를 감당하시기까지, 밥상에 놓인 한 잔의 술은 그냥 술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내가 초등학생 때도 그랬고, 시집을 와서도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아빠가 술을 사오라고 하시면 내겐 효도를 한다는 거룩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시집 간 딸아이 집에 오신 아버지께 과실주를 작은 잔에 채워 드리니, 기력이 쇠약해지신 아버지가 내게 술잔을 주시며, 싱크대에 가서 대신 "고시레"를 하고 오라며 고시레 심부름을 시키시던 모습이 최근 3~4년 전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다.
내 어린 시절엔 친지들이 모이면 어느 집이든 술상이 참 흔했다. 같은 술을 마셔도 그 술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삶의 모습들은 참 달랐다. 중요한 건 술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중·고등학교 때 수학 여행을 가면, 가방에 몰래 맥주캔을 넣어 오는 친구들이 더러 있었다. 방문을 잠그고 커다란 방에 둘러 앉아서 한 모금씩 맥주캔을 돌려가며 마시는 모습을 보기도 했었다. 내 차례가 되어 한 모금을 권하면 나는 고개를 흔들었고, 친구들도 내게는 두 번 권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학생이 되어서 처음 술을 마시게 된 것이다. 선배들은 국문과를 술문과라고 이름하기도 한다고 했다.
다행히 고3 한문 선생님의 한 말씀이 좋은 길이 되었다. "너희들 대학 가면 남자들한테 함부로 술 따라주면 안된다. 남자 중에는 세 명한테만 술을 따라줄 수 있다. 아버지, 남편, 스승". 이 말을 지키기로 한 것이다. 6시 학과 수업이 모두 마치면, 선배들과 동기들이 우르르 식당이 아닌 술집으로 모였다. 주점, 맥주집, 소주집이 그때는 유행이었다. 선배고 동기고 술병을 돌려가면서 서로가 서로의 빈 잔을 채워주는 것이, 젊은 날의 빈 가슴을 채워주며 우정을 나누는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다. 바쁘게 채워지던 술잔들도 내 바로 앞에 놓인 남자 동기나 선배들의 술잔은 잠깐씩 비어 있었다. 우정의 흐름이 끊기듯 내가 술을 따라주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놀리는 이도 있었다. "앞에 앉은 사람 술잔이 비었는데도 술잔을 안채워주면 시집을 못간다는데..." 웃으며 말하곤 했다. 그러면 나도 따라 같이 웃으며 신념을 지키곤 했었다.
4월 신입생 시절 인문대 건물 뒷편 벙커, 대선배님(복학생)이 둘러 앉은 신입생들에게 한 명씩 이름들을 물으며 첫인사를 나누는 자리였다. 공평하게 나누어준 종이컵에 대선배님이 돌아가며 따라준 소주. 내 생애 처음 받은 술은 투명한 소주 1센티. 그때 내 입 속에는 새우깡 세 개가 반쯤 씹혀 있었다. 다 함께 건배를 하고 정말로 소주를 찔끔 입에 머금었을 뿐이다. 그런데 소주를 마신 것은 내가 아닌 부서진 새우깡들이었다. 새우깡 맛이 바뀐 것이다. 십 여 명이 넘는 무리들 앞에서 뱉을 수도 없고, 잘 삼켜지지도 않는 그 쓴맛 새우깡을 겨우 겨우 겨우 삼키며 속으로 결심을 했었다. "절대로 술보다 안주를 먼저 입에 머금지 않는다!"
그날 술 한 모금을 마신 후의 몸의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머릿속이 핑 돌고, 몸을 가누는 일이 마음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게 어울리게 된 선배와 동기들은 낮에는 배움의 벗이었고, 저녁이면 술벗이 되었다. 1학년의 봄, 그날도 술집을 나와서 열 명이 넘는 술무리들이 우르르 들어간 곳은 노래방이었다. 그때 내게도 약간의 취기가 있었다. 선배 언니가 노래를 부르고, 나는 맞은 편에 앉아서 노래방 기기에서 나오는 가사를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마음이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마음의 기운이었다. 가만히 마음을 보고 있었기에 알아볼 수 있었던, 술기운에서 온 마음이었다. 술기운에 가슴이 열리고 따뜻해지고 느긋해지는 느낌을 본 것이다. 순간 "아! 이래서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구나." 아빠가 반주로 드시던 술도, 학교 수업을 마친 술무리들이 이렇게들 술을 마시며 우정을 나누는 이유도 바로 이 느낌이구나! 이 좋은 느낌을 위해서 술을 마시는구나 하는 깨달음은 감동이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방에 혼자 앉아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술이 주는 유익인 마음이 열리고 따뜻해지고 느긋해지는 이 좋은 느낌을 계속 가져갈 수 있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더 생각을 이어나갔다. 이 좋은 느낌을 위해서 매번 술을 찾는다는 것은 술에 의지를 하게 되는 일이다. 왠지 술에 의지하려는 마음이 마음에서 꺼려지는 것이었다. 그러면 술에 의지하지 않고, 이 좋은 느낌만 가져가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데 생각이 닿았다. 그때 재생 기능을 생각했다.
리차드 막스의 팝송을 듣고, 정태춘과 박은옥, 시인과 촌장, 김광석, 유제하, 김현식, 사랑의 기쁨, 아드린느를 위한 발라드를 재생시키는 기계, 카세트가 생각이 났다. 기계가 재생을 하는데, 그보다 더 뛰어난 감각 기관이 바로 사람의 몸이 아니던가! 몸이 지닌 재생 기능을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내겐 술이 필요치 않게 된 것이다. 그때 일으킨 한 생각으로 인해서 나는 술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술이 없어도 좋은 술기운을 몸에서 재생시키면 그만인 것이다. 그날 술무리들이 술집을 나와서 들어간 노래방에 앉아서, 마음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꼈던 그 술기운을 이미 가슴에 저장을 시켜둔 것이다. 한 번의 경험으로 충분한 것이다. 그리고 언제든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재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21살에 먹은 한 마음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지만, 얼마전 벗한테서 조금씩 받은 투명한 와인 두 잔의 추억이 따뜻하고 맑은 산기운으로 남아 있다.
나의 어린 시절에 몇 안되는 따뜻한 기억들도 사실은 몸의 무한 반복 재생 기능으로 재생을 해와서 오늘이 되고 있는 것이니까. 하나의 별이 별무리가 되는 것처럼, 작은 별빛이 점점 자라서 태양빛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기억을 왜곡하진 않는다. 단 한 순간의 눈빛, 한 순간의 따뜻한 모습도 내 기억 속 하늘에선 잊혀지지 않는 보석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상처를 입히는 세공과 자본의 손길을 거친 다이아몬드보다 한 방울로 맺힌 이슬이 더 아름다운 이유를 스스로가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혼자서 고요히 내 어둔 마음 속에 한 점 별빛처럼 또는 한 순간의 추억이나 한 마음을 알처럼 품고 있으면, 빈 마음이 충만해지곤 한다.
어느 날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시민의 불복종>을 읽다가, 술에 대한 아름다운 글을 보았다. 이 자리에서 함께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곳에 싣는다.
" 당신이 담근 술을 마시지 말고 자연의 여신이 담궈주는 술을 마시라. 그 술은 염소가죽이나 돼지가죽 부대에 담겨 있지 않고 수많은 아름다운 산딸기 속에 담겨 있다.
술을 담고 음식을 절이고 보관하는 일은 자연의 여신으로 하여금 하도록 하라. 왜냐하면 매 순간 온 자연이 우리를 건강하게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그 외에 다른 목적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의 경관에서는 우리가 감상할 마음의 준비가 된 만큼의 아름다움만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 외에는 눈꼽 만큼도 더 볼 수 없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시민의 불복종] 중에서..
한 마음을 먹으며, 한 순간 가슴 속 아름다운 기억들을 재생시킨다. 그래서 때때로 내 가슴은 샘물이 흘러 나오는 샘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아픔이 흘러 나와서 눈물로 흐르기도 한다. 그리고 이제는 그 물길이 나만을 위한 좁은 물길이 아닌, 밖으로도 흐르는 공평한 강물이 되는 것을 본다. 그리고 때론 술이 없어도 마음이 열리고 따뜻해지고 너그러운 가슴이 되는 술샘이 되기도 한다. 시간이 갈수록 넓어지고 깊어지는 샘이다. 그 마음은 또한 자연과 진리에 취해서 무르익은 마음의 취기 같기도 하다.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 하늘과 흙과 풀 냄새가 나는 사람 앞에서, 글로 만난 아름다운 마음 앞에서, 자연과 진리와 자유의 향기가 나는 사람의 마음 앞에서, 나는 종종 취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특이한 사람이라곤 생각지 않는다. 누구든 자기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에서 일상을 살아가다가 문득 자기 안에 흐르는 마음을 가만히 보거나, 일어나는 생각을 이어서 곰곰이 생각을 더 이어간다면, 같은 걸음을 걷게 되는 것이다. 한 뿌리에서 나온 사람의 마음은 다를 수 없는 이치다. 나는 그 단순하지만 명료한 일을 한 걸음 한 걸음 걷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걸어 들어가는 마음의 호젓한 산책길을 오늘도 걷는다. 문득 아빠의 "~오늘도 걷는다마는~"이 재생이 된다. 나는 그 마음의 산책길 언저리 어디쯤을 걸어가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리고 글을 쓸 때는 언제나 맑은 정신으로 쓰려고 한다. 그러다가 종종 잠에 들었다가 깨었다가 할 때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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