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얘기마을(26)
제 집 버리지 못하는 달팽이처럼
달팽이가 제 집 이고 가는 것 같았습니다.
어둠속에 지워져가는 작실로 가는 먼 길, 할머니 등에 얹힌 커다란 보따리가 그렇게 보였습니다.
땅에 닿을 듯 굽은 허리, 다다른 팔십 고개.
보따리 가득한 건 강가 밭 비에 젖어 허옇게 싹 난 콩들입니다.
질라래비훨훨, 질라래비훨훨,
새 나는 모습 아이에게 가르칠 때 했다는 질라래비훨훨처럼,
앞뒤로 손 연신 흔들며, 노 젓듯 어둠 훼훼 저으며, 검은 길 걸어 오르는 김천복 할머니.
아무리 무거워도 평생 제집 버리지 못하는 달팽이처럼.
<얘기마을>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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