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얘기마을(31)
고픈 얘기
수요예배를 마치고 방에 들어와 잠시 쉬는데, 부엌문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나가보니 광철 씨였다. 작실 분들과 돌아가다가 다시 내려온 것이었다.
“웬일이에요, 광철씨?”
“지난 번 가져다 드린 밤 잡수셨어요?”
밤이며, 땅콩이며, 호박이며, 광철 씨는 늘 그렇게 먹을 것을 전하려 애를 쓴다. 예배시간 이따금씩 제단에 놓이는 들꽃도 광철 씨 손길이다. 그게 광철 씨 믿음이요 사랑이다.
들꽃을 꺾어서, 밭뙈기 호박을 심어서, 남의 집 일하곤 한 줌 땅콩을 얻어서 못 드리는 헌금 대신 드리는 광철 씨, 가장 가난하고 가장 깨끗한 드림이다.
광철 씨는 밀린 얘기를 했다. 안쓰럽다 여길 뿐, 아무도 그의 얘기 귀담아 들어주는 이가 없다. 엄마 돌아가셨을 때 장례 치러주어 고마웠다고, 장사날 밥이라도 제대로 드셨는지 모르겠다고, 엄마만 안 돌아가셨으면 곧이어 다가온 아버지 환갑엔 전도사님 모시고 예배를 드리려고 했었다고, 엄마가 그러자고 몇 번이나 얘기 했었다고, 올핸 호박을 제대로 못 심어 호박도 많이 못 따다 드린다고, 일 안 가면 밤이라도 많이 주울 텐데 그렇지 못하다고, 지방여름산상집회 때 가나안 농군학교에 갔던 일 좋았다고, 내년에도 또 하면 또 가고 싶다고....
정말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들어주는 이가 없는 광철 씨. 이야기가 고팠던 것이다. 무지무지 고팠던 것이다. 전도사는 그래도 내 얘기를 들어주지 않을까, 가던 길 되돌아 내려온 것이다. 더듬더듬, 어쩌면 토하듯 끄집어낸 이야기들.
웬일인지 가슴이 떨려 안으로 졸아들고, 울컥 전신에 눈물 시내처럼 흘러 광철 씨 이야기를 듣는다.
그래, 대책 없더라도 듣자. 듣기라도 하자. 말간 슬픔, 떨리는 가슴, 눈물 외엔 받을 길 없는 바보같이 여린 삶, 그렇게라도 지키자. 하얀 달빛 밟으며 몇 번씩 인사하고 다시 작실로 오르는 광철 씨. 야윈 몸 불안한 걸음새를 바라보며 흐린 두 눈으로 꽁꽁 마음속 다짐을 한다.
<얘기마을>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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