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218)
부산을 움직이는 건, '정의'보다는 '정'과 '의리'
참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정부의 권고인 코로나19, 2단계 안전 수칙인 비대면 예배와 사회적 거리 두기를 대부분의 교회와 단체와 모임과 개인들까지도 지키고 있는데 반해서, 유독 부산에선 270군데 현장 예배를 선포, 강행한 실태를 두고 무엇으로 설명을 할 수 있을까?
아마도 너그럽고 올바른 생각을 가지신 분들 입장에서도 아무리 헤아려 보아도 통탄해 할 개신교의 그릇된 단면일 것이다. 그렇지만 부산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필자의 입장에선 어렴풋이 아련하게나마 부산 사람들의 그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부산 사람들은 환경 태생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정'과 '의리'가 많은 사람들이다. 6·25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인한 부산 피난민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 온정까지 떠올리지 않더래도, 필자의 유년 시절에 깊이 각인 된 동네 이웃들의 마음은 참으로 온정이 많았다.
어른들이 일터로 나가고 점심 때가 되면, 아이들끼리만 놀던 작은방에 올망졸망, 게중에 제일 나이가 많은 언니래야 초등학교 2~3학년, 그 아래로 줄줄이 다섯 동생들, 옆집 동생들까지 다 모이면 족히 열 명이다. 그러면 큰 언니가 국밥을 끓여 먹자며 흙투성이 동생들을 불러 모은다. 그러면 우리는 다같이 큰 밥상을 펴고 스텐 밥그릇과 숟가락을 인원수대로 제 앞에 놓고 얌전히 둘러앉는다. 그러면 방이 꽉 찬다.
국민학교 저학년 생이던 옆집 큰 언니가 동생들을 위해서, 아침에 먹다 남은 찬밥에 쉰 김치와 라면 두 개를 한데 넣고 한솥에 국밥을 끓이는 것이다. 동네 아이들까지 열 명이 나누어 먹던 두레 밥상에서는 내 것, 내 동생이 따로 있지 않았다. 모든 동생들 밥그릇에 똑같이 국자로 나누어 떠주던 옆집 큰 언니의 공평하던 손길. 그 시절 아이들끼리 나누어 먹던 가난한 두레 밥상에서, 나는 피와 살을 나누던 예수의 성찬식을 보았다. 바쁜 어른들이 말해 주지 않아도, 그저 어깨 너머로 보고 배운 공평하고 차별 없던 섬김과 나눔이었다.
그 당시 나의 유년기를 되돌아보면 우리집에서 점심밥을 먹었던 기억이 없는데, 온종일 무얼 먹고 살았던가 싶다. 종일 굶어도 별로 배고픔을 느끼지도 못하고 온종일 동네를 쏘다니며 놀았던 기억 뿐이다. 언니 오빠들이 부르던 노래를 따라서 입에선 노래를 흥얼거리며 참새처럼 폴짝폴짝 뛰어서 좁은 골목길과 산비탈길 온 동네를 때론 산새처럼 가볍게 뛰어서 오르내리곤 했었다. 그때 그 시절이 내겐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자유로 기억된다. 그때 본 하늘이 지금껏 보아 온 하늘 중에서 가장 커다랗게 펼쳐진 내면의 하늘인 것이다.
유독 몸집이 작아서 초등학교 1학년 때 몸무게가 18키로, 다섯살 나이의 평균 몸무게쯤 된다. 하지만 내 주위에는 함께 놀아줄 옆집 언니와 동생들이 있었고, 놀이터에는 공평하게 놀아주던 언니 오빠들이 다정하던 산동네 마을이었다. 작은 나를 대하시던 동네 아주머니와 아저씨들의 눈길과 말 한 마디도 어질고 따뜻했었다. 그 당시에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동대신동에 자리한 서부교회(당시에 아시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등록 교인 수가 많다고 소문이 난 교회)를 다니던 교인들이 많았다. 나는 아버지의 반대로 인해 크리스마스에도 교회를 가본 적이 없었다. 단지 주일날 교회를 다녀온 언니 오빠들의 입에서 흘러 나오던 "탄일종이 땡땡땡~,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가 내겐 알 수 없는 복음의 종소리였다.
아홉 살이 되고 아랫 마을로 이사를 내려와서 학교를 졸업하기까지 부산 곳곳에는 많은 추억이 서려 있다. 태어나서 유년기를 보낸 서대신동,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사셨던 동대신동, 보수동 책방 골목, 깡통 시장, 국제 시장, 광복동, 남포동, 자갈치, 송도, 태종대 그리고 부산 지하철이 개통 된 후 식물원, 범어사, 동물원이 있던 성지곡 어린이 대공원, 해운대, 광안리, 서면, 범일동, 범내골, 하단, 명지, 엄궁, 북한이 무서워서 못 내려온다는 다대포까지 지금도 주말이면 종종 찾는 고향이다. 토머스 머튼의 강론도 코로나19, 2단계 안전 지침이 발표 되기 전까지 매주 부산에서 듣고 있던 중이었다. 지금은 이 모든 게 멈추었다. 이 시기와 더불어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시편 46편 11절)의 말씀이 가슴으로부터 들려오는 것 같다.
그 옛날 3·8선 협정이 원치 않게 맺어진 후, 피난민들 대부분이 자기네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이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은 갈 곳이 없어져 버린 후, 부산 산동네 언저리 어디쯤에 머물러 터를 잡은 자리 그대로, 나중에는 부산이 정겨운 제 2의 고향이 되어서 살아가시던 분들이 많으셨다. 영주동에는 피난 시절 굶주림이 무서워 쌀집을 한다던 어느 이웃도 있었다. 피난 시절 부산이 대한민국 임시 수도가 되면서 많은 지식인들이 대거 피난을 내려왔었고, 해외 선교사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학교와 병원도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지방이지만 서울 못지 않게 대학교도 많이 있어서, 울산과 전라도, 경남 각지에서 유학 온 대학생들도 주위에 흔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무렵에만 해도 부산에는 다닐만한 직장이 마땅치 않았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주요 기업체와 전문 인력을 요하는 직장은 필자가 졸업하던 당시만 해도 서울에 집중이 되어 있었다. 선배와 동기들은 졸업과 동시에 너나 할 것 없이 전문 직종에 취직을 하기 위해선 고향인 부산을 떠나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나 역시도 그 무렵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었고, 지금까지도 고향인 부산으로 내려온 동창들보다는 서울에서 기반을 잡고 살아가고 있는 동기와 선배들이 더 많이 있다. 3년 여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인 부산으로 다시 내려가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에는,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반가움보다는 모든 생활 수준이 십년은 뒤쳐진 옛날로 돌아가는 듯한 갑갑함이 있었다.
모든 실시간 방송과 뉴스는 신기하게도 서울 현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즐기던 문화와 예술은 서울이 중심이었다. 서울에서 누리던 직장 생활과 교육, 문화 생활을 하기에 부산은 아무래도 뒤쳐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선명히 예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보와 문화 소외 지역이라는 점에선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다. 얼마전 부산역 지하철이 수해로 잠기던 그 시각에도 중앙 언론에서는 집중 보도가 되지 않았던 점이 지적되기도 했었다. SNS가 활발한 젊은 세대들과는 달리 그 만큼 최신 정보로부터 뒤쳐지고 깜깜한 부산 어른들은 어쩌면 오늘도 그 옛날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와서 다행인 점은 오래 전 (고)노무현 정부의 혁신 도시 정책으로 부산에는 금융권 본사가 내려오게 되었고, 부산 국제 영화제의 인지도가 올라가면서 영화 도시와 해양 레저 관광 도시로써 그 입지를 다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KTX 코레일이 개통이 되면서 부산 사람들의 숨통도 조금은 트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옛날 6·25 피난 시절을 겪은 부산 어른들의 정서는 여전히 '정의'보다는 '정'과 '의리'인 것이다.
아마도 의리의 사나이 하면 부산 사나이일 것이다. 나의 남동생만 해도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생전에 좋아하시던 (전)박근혜 탄핵 대통령을 아직도 마음에서 떨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거기에는 달리 이유가 없는 것이다. 누구는 의리가 아니라 지역 이기주의라는 말로 대신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의리를 져버리지 않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하는 그들의 정서를 쉽게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리에 밝은 타 지역 사람들이 보면 참으로 답답한 모습이리라는 걸 충분히 짐작하지 못하는 바가 아니다.
광인 전**이 그렇게 무식하고 무례한 소리로 떠들어 대도 한결같이 그를 유독 열렬히 지지하는 지역층은 부산 경남의 목회자들인 것이다. 그들에겐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의 진리와 정의의 참뜻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한솥밥을 먹는 전**에 대한 정과 의리가 더 중요하기에 '정의'를 '정'과 '의리'로 슬쩍 버무려, 다만 끝까지 챙기려는 마음일 것이다. '정'이고 '의리'고 사람의 '도리'라고 그렇게 여기는 것일지도 모른다. 필자가 겪었었고 익히 겪어 온 정서로 미루어 짐작컨데 오늘날 읽을 수 있는 부산 사람의 정서는 이러한 것이다.
주위에서 아무리 개독교라는 욕을 먹고 무식하고 못났어도 그들에겐 내 식구인 것이다. 그것이 그들에겐 사람에 대한 도리요 슬쩍 나아가 사랑일 것이다. 아무렴 그렇다 하더래도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이처럼 부산은 안타깝게도 오늘을 그 옛날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내 그립고 정든 고향 부산이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전**을 끌어 안고서 가고 있는 웃픈 현실이다. 내가 사랑하고 지향하는 맑은 예수의 사랑과 진리와 정의보다는, 낯선 피난민들에게 제 식구들이 먹고도 모자랄 밥까지 나누어 주던 온정처럼 정과 의리가 더 진해서, 밥김이 모락모락 일어나 하늘을 뒤덮어 눈 앞을 가리는 구름처럼, 자욱하게 덮힌 하늘을 보는 것만 같은 그런 답답한 심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신대 석좌교수 손봉호 선생의 말을 빌어, 전**이 자신을 두고 순교자라고 하는 것은 신성 모독에 해당된다. 그를 성경과 예수에 기반을 둔 목회자라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그는 불순한 정치꾼에 가까운 것이다. 개신교가 이렇게까지 욕 먹는 상황을 두고 같은 개신교인으로써 부끄럽고 그저 답답한 것이다. 언제나 사랑과 진리와 정의의 맑고 푸른 하늘이 나는 늘 그리운 것이다. 유년기에 보았던 그 맑고 푸르고 광활한 하늘이 오늘도 여전히 가슴으로 펼쳐져 숨을 쉬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눈을 감지 않아도 보이는 것이다. 내게 나누어 줄 보물이 있다면 이 하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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