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73)
더딘 출발
요 며칠 동안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들이 사택에 들러 숙제를 했다. 섬뜰의 승호, 종순이, 솔미에 사는 지혜 등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이었다.
그들로선 하기 힘든 숙제였다. ‘화장실에 가서 사람이 많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면 ‘줄을 섭니다.’ 하고 답하는 문제는 단순하고 쉬운 것이었지만, 문제는 아이들이 아직 글을 제대로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데 있었다. 아이들은 문제가 무얼 요구하는지 읽질 못했다.
아내가 문제를 읽어주면 그제야 아이들은 대답을 한다. 그러나 대답한 내용을 쓰질 못한다. 아내가 써 주면 그걸 보고서야 그리듯 답을 쓰는 것이었다.
학교 들어가기 전 한글은 물론 덧셈, 뺄셈, 피아노 심지어는 영어까지도 미리 배워 학교에 들어가서는 다 아는 것 한다고 시큰둥해 하며 선생님을 우습게 생각한다는 도시의 아이들, 그들에 비하면 단강 아이들은 터무니없이 뒤떨어져 있다.
출발선이 터무니없이 다른 건 공정한 달리기가 아닌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무조건 도시 아이들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글씨를 모르고 들어가 선생님께 글씨를 배우고,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을 어려워하기도 하고 존경하기도 하며 이 세상에서 제일 많이 아는 분으로 생각하는 농촌 아이들의 더딘 출발이 오히려 귀하게 여겨진다.
세상사 모르는 현실감 없는 이야기라고 웃고 말겠지만, 그래도 단강 아이들의 더딘 출발이 내겐 소중하게 와 닿았다.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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