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 얘기마을(153)
장마 인사
지난밤엔 천둥과 번개가 야단이었습니다. 야단도 그런 야단이 없었습니다. 잠시 쉴 틈도 없이 천둥과 번개가 하늘을 갈랐습니다. 파르르 번개가 떨면 창가까지 자라 오른 해바라기 이파리는 물론 논가 전기줄까지도 선명했고, 그 뒤를 이어서 하늘이 무너져라 천둥이 천지를 울려댔습니다. 신난 빗줄기도 맘껏 굵어져 천둥과 번개가 갈라놓은 하늘 틈을 따라 쏟아 붓듯 어지러웠습니다. “다들 휴거 됐는데 우리만 남은 거 아니야?”는 아내의 농담이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을 만큼 두렵기까지 한 밤이었습니다. 때마침 정전, 흔들리는 촛불 아래 밀린 편지를 쓰다 쫓기듯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아침 일찍 작실로 올랐습니다. 늦은 밤의 기도가 없진 않았지만 무섭게 내린 비, 언덕배기 광철 씨네며 혼자 사는 할머니 몇 분이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작실로 오르는 길은 이미 길이 아니었습니다. 철철 흐르는 물들이 돌들을 패며 길을 따라 흘러 또 하나의 개울이 되어 있었습니다. 고무신 신기를 잘했습니다.
아랫작실, 길가에 나와 있던 할머니 한 분이 광철 씨네 들린다는 말을 듣고 고맙다고 합니다. 며칠 전에는 아픈 광철 씨를 집으로 불러 저녁 대접을 했다 합니다. 나 또한 고맙다는 인사를 합니다. 종교는 다르지만 고맙다 인사하는 서로가 왜 그리 가깝고 다감한지요.
헛간 같은 방, 광철 씨는 여전히 누워 있지만 집 바로 옆,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밤새 도랑을 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윤연섭 할머니는 마루에 앉아 젖은 콩을 까고 있었습니다. 빗속에 싹 난 콩이 절반입니다. 자식 네들 먹거리 전하는 재미에 홀로의 외로움 이기시는 할머니, 마당에 강아지가 한 마리 늘었습니다. 건너 편 달진네 이틀 품 팔고 품값삼아 받았다 합니다.
길가 흐르는 물에 빨래를 하던 허석분 할머니도, 찬송가를 뒤척이다 잠깐 누운 김천복 할머니도 모두 편안했습니다. 남의 일 갔다 와선 일찍 누워 간밤 천둥 번개는 딴 세상이었던 허석분 할머니와는 달리 김천복 할머니는 그 요란함에 좀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며칠 전, 친구들과 함께 다녀간 둘째 아들을 위해 만들었던 마구설기 떡을 다시 한 번 쪄서 함께 들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앞으로 열흘 정도 비가 더 올 거라 했다지만 별 걱정은 없었습니다.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이 단순한 인사가 뜻밖에도 꽤나 든든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할머니 집 앞 개울엔 겁나게 불어난 물이 넘칠 듯 흘러가고 있었습니다만.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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