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289)
법원이 있는 마을
- 검찰 개혁이 자리 바꿈만이 아니길 -
내가 태어나서 자란 고향인 부산의 대신동을 두고 어른들은 교육 마을이라고 불렀다. 구덕산 자락 아래로 초·중·고 여러 학교들과 대학교가 있고, 미술·입시 학원들이 밀집해 있던 마을, 소문으로만 듣던 술주정꾼이나 깡패들이 잘 보이지 않던 건전한 동네로 추억한다.
산복도로가 가로지르던 빽빽한 산비탈 마을에는 6·25 피난민 시절에 지어진 판잣집도 간혹 보였으나, 그와는 대조적으로 큰 도로를 중심으로 번번한 평지에는 돌담이 높아 내부가 보이지 않는 양옥 저택들이 잘 자른 두부처럼 반듯하게 줄지어 들어선 동네, 인적이 드문 넓다란 골목길을 지나가는 바가지 머리의 꼬마한테도 반갑게 손을 내밀어 흔들어 주는 건 언제나 하늘 아래 푸른 나뭇가지와 담장을 넘어온 빨강고 노란 꽃들이었다.
언젠가 궁금증이 일어서 물었던 기억이 있다. 활짝 활짝 핀 꽃처럼 집들의 대문을 열어놓고 살던 이웃들과는 달리, 언제나 철대문으로 닫혀 있는 저 높고 커다란 집에는 누가 사냐고, 툭 내뱉는 첫 마디가 "법원에 다니는 사람들이 살지".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중·고등학교들이 하나 둘 다른 마을로 이전을 하게 되고, 법원이 거제리로 옮겨 가게 된 후 내가 살던 친정집을 비롯하여 서대신동과 동대신동은 재개발업자들의 밥이 되었다.
대청동 6·25 충혼탑이 있는 대청공원 산 끝자리에 있던 혜광고등학교에서 쭉 아랫 마을로 내려오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줄곧 살아온 하얀 벽돌로 지은 친정집이 있었다. 멀쩡한 새 집을 부수겠다는 재개발업자들의 횡포에 끝까지 재개발을 반대하시던 친정 아버지는 분양권도 받지 않으셨다. 그렇게 하시다가 끝내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홀로 남은 친정 엄마한테서 집을 뺏은 후 통장에 넣어준 돈으로는, 부산 변두리 시골 마을에 20평대 아파트 한 채도 살 수 없어서, 엄마는 이 십년 거치된 원금만 살려 삼성 생명 보험을 깨셨다. 그렇게 동원 개발이 손을 댄 친정 마을은 사라지고 순식간에 아파트가 올라간다는 소문만 듣다가, 지난 여름날 보수동 책방골목에 가려고 지나던 길에 본 한 장면이 돌처럼 가슴을 누른다.
아파트 초입에 우람하게 서 있는 건 마을 뒷편에 숨어 있던 동일교회였다. 아파트와 같은 회색빛 색상인 걸로 보아 땅과 교회 건축까지 동원 건설에서 교회의 입맛에 맞추어 통조림을 해준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골집 한 채도 살 수 없는 돈을 땅값이라며 던져 주며 쫓겨난 힘 없는 노인들이다.
한 때 교육 마을을 자랑하던 대신동은 사람 살기가 좋아서 애초에 살던 주민들이 이사를 가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자녀들은 외지로 떠나가고, 어른들은 나이가 드시고 어느새 대신동은 노인 마을이 되었다. 힘 없는 노인들이 한 평생 일구어 마련하신 제 집이지만 땅까지 빼앗는 일은, 어린 아이 손에서 사탕을 빼앗는 일보다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 뒤로 나는 이름이 같은 동원 식품을 먹지 않으려 맘 속에선 홀로 씨름을 해오고 있다. 그 큰 힘 앞에 힘 없는 내가 저항하는 방법이다.
이 모든 마을의 번영과 쇠함의 중심에는 법원이 있었다. 법원을 중심으로 있을 때는 마을이 흥했으나, 법원이 옮겨 간 후 대신동은 이빨 빠지고 앙꼬 빠진 마을이 되었다. 반면 거제리는 지금도 계속해서 흥하고 있는 마을이다.
검사가 로망이던 동생네가 살고 있는 집은 법원 바로 뒤편에 있다. 작은 아이와 절친의 엄마, 그녀의 남편이 부장 판사라고 했다. 동생네는 자연스레 아이들과 엄마들이 어울리며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법원의 판사와 검사들의 삶을 가까이서 엿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작은 조카가 고학년이 되고, 임기를 마친 부장 판사의 딸인 절친은 다른 지역으로 전학을 가게 되고, 어려서부터 말도 떼기 전부터 큰 아들에게 판사와 검사가 되라며 자신의 꿈을 투영하던 동생의 장미빛 노래는 그쳤다. 그 법관들의 삶을 가까이서 들여다 보았기 때문이다.
늘 일상 속에서 대하는 사람과 사건들이 범법자들이기에 판·검사들은 자신들 가족의 신변에 대해서 우리들보다 더 큰 불안감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스트레스와 과로사는 높고 견고한 법원의 담벼락도 바람처럼 자유로이 넘나들 줄 아는 우리네 현대인들의 동행자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부모들은 법원이 있는 마을로, 법원에 더 가까운 마을로 오늘도 불나방처럼 몰려든다. 아파트값은 치솟고, 반찬 가게는 흥한다. 법원이 있는 마을의 방과후 선생님은 외제차를 타고 다니고, 엄마들은 자녀를 줄세운다. 그러다가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 격상 이후 인구 밀집 지역인 법원을 중심으로 학교와 학원, 식당과 카페가 먼저 멈추었다.
울산도 다르지 않다. 울산에서 가장 흥한 마을은 법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학교와 학원 밀집 지역인 옥동이다. 부산처럼 울산의 아파트값이 가장 비싼 지역이다.
그 옛날 자신들의 자녀가 판·검사와 변호사가 되기를 열망하던 부모들이 있었다. 강남의 사찰은 옛부터 수학능력시험으로 먹도 산다는 말이 스님의 입에서 나돌 정도이다. 예배당에 새벽 기도 자리가 채워지는 것도, 절마다 백일· 천일 기도의 목탁 소리가 시냇물처럼 끊이지 않는 것도, 가장 커다란 이유는 엄마들 마음 속으로 흐르는 열망의 목소리는 아닌지 되돌아본다.
검찰 개혁의 목소리를 높이는 자는 누구이며, 자녀를 판·검사로 만들려 기도의 목청을 높이는 자는 누구인지, 불나방처럼 법원 가까이로 몰려드는 학부모들 가정의 자녀와 가장 높은 아파트값을 자랑하는 자 누구인지. 두루두루 곰곰이 묻고 또 묻는다. 진정한 검찰 개혁은 단순한 자리 바꿈이 되어선 안된다.
대한민국의 학부모가 바뀌지 않는 한, 일제 강점기에 뿌리를 둔 경성제국대학 앞에 자신들의 자녀를 줄세우기 위한 치열한 기도의 열망과 경쟁심을 내려놓지 않는 한, 진정한 검찰 개혁이란, 올바른 씨앗 없이 올바른 꽃을 피우려는 헛된 일일 뿐이다. 삐뚤어진 판사와 검사가 된 아들의 등을 업고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삐뚤어진 부모가 있는 한 그 뿌리는 뽑히지 않은 것이다. 욕망의 톱니바퀴는 혼자서 돌아가지 못한다. 나는 그 욕망의 톱니바퀴 어디쯤 있는지, 나 스스로를 먼저 돌아본다.
법은 나와 내 가족과 내 집안 식구들만의 밥이 될 때 고인 물처럼 부패하기 시작한다. 썩은 밥처럼 썩은 법은 어느 누구도 먹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법이 가진 씨앗인 공평하고 정의로운 성품이 그대로 진리의 땅에 뿌리를 내려 온 땅을 끌어 안고서, 진실의 좁은 꽃대를 지나 하늘을 우러르며 오를 때, 그런 올된 법은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만인의 밥과 물과 공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이 추운 겨울날 구수하고 푸근한 김이 하얗게 오르는 밥 한 그릇 나누어 먹고 싶다. 두레 밥상에 둘러앉아 빵과 포도주를 나누던 예수의 마음이, 오늘도 이 하루를 지피는 모닥불이 된다. 법은 밥처럼 그래야 한다.
- 사진, 2020년 부산 카톨릭 대학교 정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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