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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스스로 법복을 벗은 조선인 최초의 판사

by 한종호 2020. 12. 25.

신동숙의 글밭(295)


스스로 법복을 벗은 조선인 최초의 판사


오늘 성탄절 전야는 가장 어둔 밤이다.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어 뜬눈으로 지새운다. 하지만 밤이 깊을 수록 별은 유난히 밝게 빛난다는 하나의 진리를 붙든다. 까맣도록 타들어간 내 어둔 가슴을 헤집어 그 별 하나를 품는다. 별을 스치듯 부는 바람에 그제서야 거친 숨결을 고른다.


지난 2020년 한 해 동안 우리가 겪어오고 있는 일들을 하나 둘 돌아보면, 수학 여행 때 단체로 뭣모르고  롤러코스터와 바이킹에 올라탔을 때처럼, 숨을 멎게 하는 듯 늘어나는 아픈 이들의 증가수와 평범하던 일상의 중력을 거스르는 과도한 포물선과 휘몰아치는 기세를 벗어나고 싶어도 여전히 벗어날 수 없는, 마스크를 벗을 수 없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팬더믹과 어쩌면 그보다 더 우리 사회를 어지럽히는 부정부패의 바이러스를 보고 있다. 바이러스들은 혼돈의 밤이다. 사랑과 자유와 정의를 덮는 어둔 밤이다. 흔하던 만남과 모임들을 끊어 놓는 단절이다.


동짓달의 어둡고 긴 겨울을 지나며, 봄 소식보다 먼저 우리들에게 찾아오길 기다리는 건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기세를 멈출 백신일 것이다. 우리 모두가 백신을 기다리고 있지만, 내게는 그전부터 마음에 틈타려는 어둠과 혼돈과 공허의 바이러스를 멈춘 아니 채운 나름의 백신이 있다. 때때로 하얀 별빛과 같은 그 백신이 나를 고독과 침묵이라는 내면의 뜰로 인도해준다. 이미 내면에 있는 평온의 하늘과 땅이 밝게 펼쳐진다.


법정 스님, 토머스 머튼, 성철 스님, 혜암 스님, 다석 류영모 선생의 제자 박영호 선생님의 강의, 유튜브로 듣는 코리안 아쉬람의 동서양 융합 강의, 그리고 페이스북에 올라오는 선하고 바른 생각을 지닌 페친들의 글과 사진과 그림들이 고마운 마음의 치료제 백신이다. 선현들과 눈 밝은 분들이 내 어둔 마음의 바이러스를 다스려준 별처럼 환한 백신이다. 


책과 유튜브와 페이스북으로 이분들을 만나다 보면, 푸른 숲속을 산책하는 듯, 맑은 하늘을 보는 듯, 자연과 진리와 인간이 삼위일체가 되어 아름다운 왈츠를 추는 듯, 석간수처럼 맑은 물 한 사발 들이킨 듯, 청아한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정취에 감싸여 젖어들게 된다. 깊은 심해로 잠수를 해서 들어가듯 스승이자 벗들과 함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는 만큼 깊은 호흡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내 심령이 기뻐서 정화가 되면 또 하루를 한순간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 요즘 들어 유독 자주 어루만지듯 얼굴을 닦듯이 보고 또 보는 한 분이 있다. 1888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사서삼경 등 한학에 통달했으며, 14세 때에는 과거 시험에서 장원 급제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스무살이 되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1913년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곧바로 조선인 최초의 판사로 임명된다. 서울과 평양 등지에서 10여 년간 법관 생활을 하면서도, 그의 내면에서는 지워지지 않는 물음이 있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인간인 내가 어떻게 다른 인간을 벌을 줄 수 있는가?' 하는 인생에 대한 깊은 고뇌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그에게 결정적인 계기가 찾아온다. 어느 젊은 청년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후 나중에 진범이 나타나자 헤아릴 수 없는 자책감과 회의감에 몸부림치지 않을 수 없었다. 1923년 여름, 그의 나이 36세에 스스로 법복을 벗고 3년 동안 전국을 떠돌며 엿장수와 노동자로 방랑한다. 당시에 두 아들과 아내를 둔 그였지만, 가족들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석두(石頭)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고 불교에 귀의한다. 그 후 그는 일일일식(一日一食)과 장좌불와(長座不臥)로 오래 참선하는 스님으로 '절구통 수좌'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공부에만 전념한다. 그의 법명이 효봉 스님이다.


효봉 스님이 불교정화운동을 하시느라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 머물고 계시던 1955년 초 어느 추운 겨울날 전라도에서 상경했다는 24살 청년의 인사를 받고 출가를 허락하신다. 당초 이 청년은 서울을 거쳐 오대산으로 들어가 삭발 출가를 할 예정이었으나 공교롭게도 출발 당일 폭설이 내려 교통이 단절 되는 바람에 한 스님의 소개로 효봉 스님께 인사를 올리게 된 것이다. 


바로 그날 선학원에서 머리를 깎은 청년이 법정 스님이다. 상좌를 받지 않기로 유명한 효봉 스님이었기에 평생 단 두 명의 상좌를 두었다. 그 중 한 명이 법정 스님이고, 나중에 파계를 한 고은 시인이다. 효봉 스님은 불교정화운동과 비구승과 대처승 간의 화합, 후학 양성에 힘쓴다. 그리고 대한불교조계종의 초대 종정으로 추대 된다. 


내가 효봉 스님을 알게 된 것은 법정 스님을 통해서다. 법정 스님이 내겐 석간수라면 효봉 스님은 더 깊고 맑은 숨어 있는 샘이 된다. 효봉 스님이 살다간 시대는, 역사적으로 가장 어둡고 암울했던 조선 말기와 일제 강점기와 전쟁과 혼돈과 겪변기의 근현대이다. 그에 못지 않게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2020년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라는 적과의 전쟁터에서, 코로나19 팬덤으로 어둡고 무거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가슴을 조여오는 건 코로나19 바이러스보다 더 우리 사회를 어둠과 혼돈 속으로 휘저으며 정의의 맑은 하늘을 뒤덮으려는 죄를 짓고도 법복으로 벗지 않으려는 속까지 검은 법복의 구름이다.


    사진:법정 스님이 찍으신 강원도의 오두막



하지만 밤이 어두울 수록 별은 밝게 빛난다는 진리는 여전히 빛난다.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것이 우리가 배워온 교과서에선 별처럼 빛나는 효봉 스님과 법정 스님과 같은 훌륭한 분들의 이름과 이야기를 볼 수 없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들 유년기의 그림책과 교과서에서부터, 어둔 시대에 별처럼 빛나는 효봉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랄 수 있었다면, 지금 법관 생활을 하는 많은 이들의 눈빛이 별처럼 빛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꿈처럼 해 본다. 그리고 만약 법전 맨 앞 서문 자리에 효봉 스님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면, 법복을 입은 이들이 차마 국민들이 손에 쥐어준 천칭을 제 사리사욕 쪽으로 쉬 기울이지는 못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수 년간 검사가 꿈이었던 딸아이의 꿈을 엄마로써 그 싹을 자른 일이 있다. 왜 검사가 되고 싶은지 거듭 물었더니, 멋져보였단다. 웹툰과 만화책과 텔레비젼에서 본 법관들의 삶이 그렇게는 풍요롭게도 비춰졌다고 한다. 고전보다 손에 가까운 웹툰, 경전보다 손쉬운 텔레비젼이 우리들 자녀들 주변을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그런 딸아이에게 효봉 스님의 이야기를 간간히 들려줬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느 순간 딸아이는 자기는 검사가 되면 안될 거 같다며 스스로 꿈을 지웠다. 


딸아이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만 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만 권이라고 하는 수는 한 단어 그림책까지 합한 허수이긴 하다. 뒤늦게 엄마로써 뼈저리게 후회하는 것은 사자소학과 사서삼경과 성경과 불경을 놓고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것이 부모로써 소치다. 옹알이와 걸음마도 떼기 전부터 딸아이를 데리고 집과 도서관과 서점을 돌면서 시간과 돈만 있으면 손쉽게 읽을 수 있었던 만 권이 넘는 책들의 경중을 따져보니, 한 권의 경전만 못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다. 물론, 자녀의 유년기에 동양학문을 가르쳐 줄 서당을 이곳저곳 알아보고 대안학교를 열심히 알아보기도 했었지만, 마땅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엄마가 가르치기엔 스스로가 부족했다. 


학교에 입학 후 배운 학문은 먼저 읽은 만 권의 책들이 지닌 깊이와 다르지 않다. 그것만으로는 진정한 인간이 나올 수 없다. 인간이 되는 길은 학교와 학원 밖에서 따로 배우고 익혀야 하는 근본 진리라는 사실이 서글프다. 법관 시절 효봉 스님이 고민했던,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씨앗처럼 던질 수 있게 하는 학교 교과목과 학원이 우리 자녀들 곁에 어디 있던가?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 스스로 묻고 또 묻는다.


나는 지금도 찾고 있다. 오늘도 밤하늘을 올려다 보며, 어둠 속에 별을 찾듯이, 세상이 아무리 춥고 어두워도 한 점 별처럼 빛나는 눈 밝은 이를 찾는다. 사리사욕의 검은 법복을 훌훌 벗어던지고 우리에게 정의의 맑은 하늘을 보여줄 사람 하나를. 그렇지만 그런 그를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있으려면, 먼저 내 자신 안에서 그런 눈을 떠야한다. 결국은 '너'의 문제가 '나'의 문제로 귀결된다. 



참고 도서 :<효봉 스님 이야기>, 김용덕, 불일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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