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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

사랑의 고춧대

by 한종호 2021. 4. 25.



지난겨울 박수철 씨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론 누구보다도 아주머니가 버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몸 한쪽 편을 못 쓰는 남편 온갖 뒷바라지 하랴, 어떻게든 고쳐보려 천근같은 몸을 기대 오는 남편을 부축해 멀리 횡성까지 침 맞으러 다니랴, 치료비라도 보태려 틈틈이 농사지으랴 정신이 없습니다. 


몸이 서너 개라도 쉽지 않을 일을 아주머닌 혼자 감당하고 있습니다. 누군가 겪어야 할 고통이라면 자식보다는 자신이 겪겠다며 고통의 한계를 몸으로 정해놓고 힘든 내색 없이 온갖 일을 꾸려갑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담보로 고통을 홀로 맞고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 찾는 아주머니의 마음은 절박할 수밖에 없어 기도 끝엔 늘 눈물입니다. 


어느 날 박수철 씨 집을 찾아 아주머니와 함께 마루에 앉았을 때였습니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냐며 아주머니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문을 열었습니다. 

 


없는 시간을 내어 뒷밭에다 고추를 심었더니 그런대로 잘 자라 올랐답니다. 그 만큼의 키라면 막대기로 고춧대를 세워줘야 했는데, 어디 산에가 고춧대를 베어 올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시간도 그렇도, 나무를 베는 일이 아주머니에겐 쉽지도 않은 일인지라 아픈 남편의 처지가 더욱 한스럽게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애써 노력해도 툭툭 막히는 일들, 맥이 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누군가 땀을 뻘뻘 흘리며 지게를 지고선 마당으로 들어서더랍니다.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정은근 집사님이었는데 지게 위에는 고춧대로 쓸 만한 나무가 한 짐 얹어 있었습니다. 내가 꿈을 꾸나, 멍해진 아주머니 앞에 나뭇단을 내려놓은 집사님은 이내 또 다시 산으로 올라 한 묶음 고춧대를 또 한 번 져 날랐습니다.


이 뜨거운 날 농사일도 안 해본 사람이 산에 올라가 얼마나 고생을 했겠냐며, 그렇게 고마울 데가 있냐며 아주머니 목소리는 사뭇 떨렸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남편은 병세가 차츰 호전이 돼 이젠 막대기를 짚고 혼자 걸을 정도가 됐습니다. 불편해도 식사도 혼자 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선선한 바람과 함께 고추밭에 고추는 빨갛게 익어 첫물 따기를 합니다. 붉고 매운 고추. 우리는 밥보다도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정말 그 뿐임을 마음 깊이 배웁니다.

-<얘기마을>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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