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비라 불릴 정도의 단비가 실낱같지만 계속 내립니다. 얼마나 기다려왔던 비인지 모르겠습니다. 말랐던 건 대지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창밖으로 마주 보이는 방앗간의 참새도 젖은 몸을 말리려는지 이젠 보이질 않습니다. 강 너머 산이 비안개에 가려 연필로 그은 듯 산등성이만 드러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교인들과 오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비가 오는 바람에 일손 멈출 수 있었던 교인들과 모처럼 점심을 같이 해 먹고선 식탁에 마주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지요. 요즘 대학생들이 왜 미국 물러가라 하느냐 묻기에, 짧은 지식으로 이렇게 저렇게 대답했더니, 그럼 바로 우리들을 위해 그러는 거네요 하며 새삼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잎담배를 경작하는 이곳에선 양담배 수입 문제가 심각한 일이지요. 교인들이 돌아갔고 책상에 앉았다가 문득 뵙고 싶은 마음에 펜을 들었습니다. 지금 집사님은 무얼 하실는지요?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 한가운데를 뱅뱅 고개 흔드시며 맴도실 집사님, 왠지 제게 남아있는 집사님의 모습은 그런 모습입니다. 그런 모습이 집사님다움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그래도 언젠가 끝이 보이겠죠.
엊그저껜 원주에 나가 자전거를 한대 샀습니다. 중고 자전거였는데 값이 오만 원 하더군요. 자그마치 기어가 5단씩이나 달려있었거든요. 그래도 윗작실까지 올라가려면 두 세 번은 내려서 끌어야 합니다. 사람들하고 좀 더 자주 만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 좋겠습니다. 소파마저도 중고로 샀습니다. 거실에 놓으니 그런대로 잘 어울립니다.
별것도 아닌 것을 별것인양 여기며 살아갑니다. 별것 아닌 것을 작은 것으로 여기지 않으려 합니다만 힘든 것도 사실입니다. 제가 게을렀고 서서히 굳어져왔음을 새삼스레 느끼는 요즘입니다. 멋있는 촌장(村長)이 되어 보겠다고 떠났지만, 아직 제 가슴엔 눈물이 부족합니다. 가슴으로 끌어안기엔 눈물겨운 현실이 많습니다. 그래도 가끔은 살아있다는 사실에 문득 눈물겹고 고마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하나로 모으며 그게 본래의 마음 되어 살아야 할 텐데 아직은 띄엄띄엄일 뿐입니다.
해군으로 근무한 조카 말에 의하면 바다에 나갔다 몇 달 만에 돌아올 때면 아직 육지가 보이질 않아도 바닷바람에 실려 흙냄새 먼저 풍겨온다고 합니다. 아직은 무언지 모를 그 어떤 한 가지 것을 마지막 그리움으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어쩌면 사람에 대한 목마른 그리움을 이만한 거리에서 키우고 키워, 누구보다 먼저, 누구라도 기꺼이 그리움으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몇 번 쓴 편지지만 집사님께 쓰는 날은 비오는 날입니다. 건강과 평안과 얼마간의 행운을 빕니다.
-<얘기마을> 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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