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장을 한 장 뜯었을까. 칸이 넓은 누런빛 종이에 연필로 쓴 글씨였다. 서너 줄, 맞춤법이 틀린 글이었지만 그 짧은 편지가 우리에게 전해준 기쁨과 위로는 너무나 컸다.
잘 있노라는, 주민등록증을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아마 초등학교에 다니는 주인 아들이 썼음직한 편지였다.
서울로 갔다가 소식 끊긴지 꼭 한 달, 박남철 청년이 잘 있다는 편지가 온 것이다. 그가 있는 곳은 경기도 파주였다.
그동안 낙심치 말고 기도하자 했지만 모두의 마음속엔 어두운 예감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라고 입을 모으는 것을 보면 어두운 예감이 어디까지 미쳤는지를 알 수 있다.
서둘러 답장을 썼다. 이번 주엔 아버지 박종구 씨가 파주를 다녀오기로 했다. 아버지를 따라 남철 씨가 돌아왔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불행한 삶이라면 그나마 고향에서 아는 이웃들과 나누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싶다.
엄마만 살았어도 그렇게 아들을 내보내진 않았을 거라며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던 허석분 할머니는 편지가 왔다는 말을 들으시고 역시 누구보다 기뻐하셨다.
“고맙네유. 새벽마다 할 줄두 모르는 기도를 하면서, 그래두 하나님이 지켜 달라구 기도했는데. 그 기도를 들어주셨나 봐유.”
사회가, 사람이 아주 악하지만은 않다는 신뢰감이, 팔자걸음, 히죽 웃음 남철 씨 모습과 함께 마음에 담긴다.
-<얘기마을> 198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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