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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지금 한반도호, 공영 안내 방송은 조작 중

by 한종호 2022. 7. 5.




2014년 4월 16일 아침 7시 40분 경 텔레비전에서 자막으로 보도되던 수학여행객을 태운 여객선의 기울어짐. 놀란 마음에 무사하길 기도했으나 의심은 하지 않았다. 

저 커다란 배가 가라앉기까지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질 테고, 대한민국은 얼마든지 구조 능력을 갖춘 조선 강국이 아니던가. 그때까지만 해도 한 치의 의심도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공영언론의 보도를 믿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의 뉴스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날의 평범한 일상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생명 구조에 주어진 시간을 가늠하면서 뛰어난 대한민국 육해공 구조대의 활약상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분과 초를 다투어야 할 육해공 구조대의 모습이 나타나기도 전에 곧장 깊은 바닷속으로 침잠한 듯 감감했었다. 인근 바다에는 민간인들로 보이는 작은 어선들만 듬성듬성 세월호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모습. 그러한 모습이 참 이상하게 다가왔다. 

오전 8시를 넘기고 9시, 어느 시점에서 헬기를 통해 구조되던 팬티만 입은 중년 사내 모습이 보였고, 그때부터 수상했다. 수학여행 여객선이라면 학생들의 모습이 먼저 줄지어 보였어야 했다. 그때부터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감을 직감했었다. 

오전 10시가 넘으며, 텔레비전에선 '에어포켓'이란 단어가 반복적으로 들려왔고 지금껏 그 단어는 뇌리에 박혀 있다. 그게 무엇이란 말인가. 그 커다란 배의 꽁지인지 머리인지 모를 짙푸른 끝부분만 빙산의 일각처럼 하늘에 닿아 숨을 쉬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 에어포켓의 콧구멍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그때까지 보이지 않던 배 안의 모든 생명들에게 그 한 가닥의 숨줄이라도 가 닿기를 빌고 또 빌었다.

멀리서나마 세월호의 처음부터 침몰까지 공영방송을 통해서 지켜보았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지금도 이 모든 일들이 꿈만 같다.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는다. 올해는 세월호 8주기가 되는 해이다. 세월호의 시계는 그날에 멈추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은 문제가 우리들 가슴에서 한 순간도 멈춘 적 없이 흐르고 있다. 

그날의 세월호는 비록 처참하게 바닷속으로 가라앉았지만, 한없이 펼쳐진 우리들 가슴의 바다에선 여전히 진실의 해가 떠오르길 희망하고 있다. 같은 하늘 아래 숨을 쉬며 이 땅을 밟고 살아가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진실을 수장시킬 권리는 없는 법이다. 그처럼 진실을 찾는 일이란 그와 같은 과오가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세월호의 문제가 어느덧 가정과 학교를 넘어서 국가와 민족과 시대와 역사의 과제가 된 것 같다. 이제는 우리 한반도호에 주어진 역사의 선생이 내준 숙제가 된 셈이다. 결결이 꼬인 실타래처럼 아무리 어려운 숙제라고 해도 시대의 모범생들은 최선을 다해 숙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지금도 어디에선가는 각자의 자리에서 노력을 다 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지구별 학교에선 진실을 사랑하며 배우려는 학생이라면 그 누구든 마음의 교실에선 모범생으로 통할 것이다. 폐호흡을 하며 이 땅을 살아오는 동안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마음이니까.

지금까지 세월호 참사를 지켜보면서 가장 먼저 분개했던 대상은, 당연히 무능한 정부에 분개하지만, 그보다 먼저 가슴을 치며 분개했던 지점은 세월호 선내 안내 방송이었다. 그 방송을 믿고 자신들의 행동 지침으로 삼으며 잠잠히 따르며 구조를 기다리며 희망하며 기도하던 학생들의 순전한 모습을 떠올리면 오늘도 가슴이 무너진다. 이와 같은 언론의 조작이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는가.

그날 아침에 내가 보고 들었던 텔레비전 공영언론방송의 왜곡 보도(어느 시점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전원 구조가 되었다는 자막을 보았었다.)에 처음엔 안심했고 결국엔 분개했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 이후 유튜브를 통해 확인한, 학생들이 마지막 순간에 가족들한테 보낸 동영상 메세지 안에서 반복적으로 흘러나오던 선내 안내 방송.

"가만히 있으세요."

요즘 공영방송을 보고 있노라면, 내 귓가에도 "가만히 있으세요."라는 선내 안내 방송이 반복적으로 들려오는 것만 같다. 이 소리가 세월호 선내에서 그날처럼 조작된 안내 방송이 아니길 바라는 한 생각도 붙잡아 보지만, 그러한 나의 기대감에 찬물이라도 끼얹듯, 연일 윤통과 김명신의 행보는 그 민망한 팬티 차림의 조타수 신세를 자처하는 듯 보인다. 

조작된 방송의 패악을 우리는 이미 세월호 사건을 통해 뼛속 깊이 보았고 분노했다. 그런데 오늘날 그보다 더 심각한 공영언론방송의 조작에 대해선 이렇게 무감각할 수 있을까. 그날의 세월호 속 학생들의 심정에 가 닿아보려 하지만, 여전히 아프고 답답하고 넘을 수 없는 사선의 선처럼 한계다.

KBS, SBS 유명 방송PD는 오늘도 먹방으로 풍요와 입을 경배하며, 정작 사회적 진실 앞엔  빵 터지는 웃음으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다. 인기로 먹고 사는 연예인들 중엔 윤통 앞에서 웃음을 팔고 영혼까지 팔고 있는 이들도 보았다. 이 세계를 우리는 사바세계라고 한다. 사바 사바, 고통이 끊이지 않는 세상이란 뜻이다. 6·25 동족상잔의 비극 이후 허리가 두 동강이 나고, 지구별에서 섬이 된 국가, 지금 현재 우리의 위치는 한반도호.

스페인 나토회의에 구지 참석해서 국제적으로 무시와 망신을 당한 윤통 정부의 무능력을 덮어주며 언론이 조작을 하고, 범죄자 김명신의 행보를 추앙하는 언론이 범죄 혐의를 명품옷으로 가리며 조작하고 있는, 지금 한반도호에서, 정작 국민들이 알아야 될 진실을, 공영언론은 여전히 왜곡·조작함으로 깊은 바닷속으로 진실을 수장시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중이다. 왜들 그럴까.

역사는 나선형처럼 반복된다고도 하는데, 그날의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늑약의 을사오적이 오늘날엔 여러 지체로 환생한 듯 보인다. 오적도 진화를 하는지, 국가의 오적을 넘어 육적 칠적도 되는 것 같다. 

우리 몸속의 염증과도 같은 국가의 적이란, 진실을 조작하는 언론, 범죄를 조작하는 검사, 역사와 교육을 조작하는 학자와 정책자, 주가를 조작하는 경제인, 국민의 입과 눈을 조작하는 유능한 방송인. 의심치 않도록 맹목을 강요하는 종교인. 진실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 동시에 그들은 하나같이 자본과 물질의 풍요와 맘몬의 신 앞에 엎드려 경배하고 있는 땅속 괴생명체들로 보인다. 

그러한 조작 앞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자연과 진리와 나의 직감이다. 눈앞에 펼쳐 주신 자연과 앞선 선각자들을 통해 보여주신 진리와 나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 직감을 뒤따르는 이성은 직감의 그림자일 뿐이다. 내 안의 신성이 나에게 보내는 메세지는 언제나 묵상 중 때론 비몽사몽 간에 가슴을 스치는 직감이었다.

나의 눈과 귀와 입과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스리는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아가는 우리는 밝고 커다란 배달민족이라는 자각. 순수를 지향하며 내면으로 통하는 길이 되는 것은 오로지 진실 뿐이다. 진실은 진리로 통하는 유일한 문이기 때문이다.

진실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사랑이란, 진실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언론이란, 진리에 뿌리를 내리지 않은 믿음이란, 어떠한 의미인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게 된다.

진실이란 별 다른 게 아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이다. 왜곡이란 잘못 바라보는 일이다. 조작이란 초점이 어긋나고  의도적으로 비틀어버리는 일이다.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인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말장난일 뿐이다. 

진실되게 바라보는 일이란, 우리들 가슴에 공평하게 살아 있는 양심이 초점이 되어서 양심에 비추어 바라보는 일이다. 그러한 진실이란 내가 먼저 아는 일이다. 권위에 비추어 아는 것이 아닌, 저 무인도에 혼자 있어서 스스로가 먼저 아는, 해가 뜨고 달이 뜨는 일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 사람을 가장 사랑하는 방법은 그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는 일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내겐 그렇게 두 눈의 시선이 하나의 초점을 맞추어 또렷이 환히 보이는 그 순간이 곧 평안과 자유와 행복으로 이어지던 경험이 있다.

몸이 있어 그리고 숨을 불어 넣어주시는 하늘이 있어, 오늘도 하늘을 바라보며 드문드문 별과 달을 바라보며 이 땅을 걸어가다가, 때때로 어디서든 멈추어 그대로 앉아 잠잠히 진실에 뿌리를 내리는 일. 그 자리가 바로 내면에서 진실의 꽃을 피우는 자리. 이 땅을 살아가면서 쉼과 안식을 누리는 지상의 천국이 아닐까. 

진실의 다른 이름은 자유. 두 다리가 되는 진실과 자유의 양날개를 펼치어 훨훨 이 땅을 살아가면서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천국의 삶처럼 그렇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 그러한 복된 삶이 저기 먼 내세의 천국이 아닌 바로 눈앞에서 활짝 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예수와 부처와 선각자들을 통하여 나는 들었고 이미 보았다. 

오늘 새벽에도 들려오는 뒷산 뻐꾹이 소리처럼, 이러한 내면의 소리가 공영언론방송에서 조작된 소리보다 더 선명하게 들려오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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