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고 건조한 겨울을 푸르게 지나온 소나무가 조금은 수척해진 얼굴로 솔잎마다 낱낱이 따스한 봄햇살을 쬐며 온 산과 마을로 푸른 숨을 내뿜고 있는 봄날입니다. 어느새 우리 마을의 골목길까지 노란 송화가루가 날려와 골목길이 노랗습니다. 봄날의 숲속은 또한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의 교실처럼 시끌시끌 소란스러운가봅니다.
겨우내 마른풀 더미 밑에 움츠려 있던 숲의 작은 생명들이 깨어나며 흙을 들썩이는 소리, 마른 가지 끝 노랑빛을 피우던 산수유꽃이 지고, 듬성듬성 분홍빛을 피우던 진달래가 진 후 비로소 산은 연두빛 살을 찌우기 시작합니다. 우리 아이들의 얼굴처럼 활짝 활짝 빛이 납니다.
하얀 목련이 교정을 환한 등불처럼 밝히는 3~4월의 신학기 교실에서는 책상도 낯설고 담임선생님 얼굴도 낯설고 앞으로 일 년을 함께 보내게 될 급우들의 얼굴도 낯설고 모든 것이 낯설고 새롭기만 합니다.
그리고 남녀공학 일반고등학교 2학년 신학기 교실 역시 잠에서 깨어나는 숲속 생명들 만큼이나 시끌시끌한가 봅니다. 들려드라고자 하는 이 한 이야기는 학교 안에서 학생들 사이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짧은 시일 내에 학생들 사이에서 종료된 학생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미 사건종료 이후 제 딸아이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라서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는 입장이고, 또한 더 캐물을 수도 없는 입장이라서 딸아이로부터 전해 들은 사건의 전말만 간단히 들려드리겠습니다.
이미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간 사건이지만, 지난 일 년 동안 저는 혼자서 이 학생들의 이야기를 문득문득 떠올릴 적마다 제 가슴속에선 흐뭇한 미소가 봄날의 꽃처럼 피어나는 경험을 했거든요. 그 흐뭇한 경험을 이곳에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2022년 입화산 자락의 한 일반고등학교 2학년 신학기 봄날의 어느날 집에서 저녁밥을 먹다가 딸아이의 입에서 우물우물 문득문득 새어나오던 짤막한 이야기의 요지는 이러합니다.
한 남학생을 사이에 둔 두 여학생과의 삼각관계 이야기입니다. 한 남학생과 썸을 타던 A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남학생 옆에는 이미 조금 먼저 인연을 맺은 또다른 B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겨울방학을 지나는 동안 그 B여학생은 자신과 먼저 인연을 맺은 남학생이 신학기 무렵 새로 썸을 타고 있다는 A여학생의 존재를 알게 된 후 분노하여 일어나게 된 학폭 사건입니다.
사람의 입은 무섭습니다. 언어폭력의 상처는 결코 말로 다 이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으니 그 말씀은 하느님'이라는 요한복음의 첫문장처럼. 무형의 말이란 생명을 지닌 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입에서 떨어진 말은 씨앗이 되어서 누군가의 마음밭에선 잡초처럼 자랄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교육부에서도 또한 초등학교 교실에서도 언어폭력과 신체폭력은 동일선상에서 다룬다는 사실 쯤은 이미 초등학생들도 인지하고 있는 상식입니다.
최근에 수면으로 드러난 민족사관고등학교 정순신 검사 아들이 가해자가 된 학폭사건을 통해서 알게 된, 가해 학생의 입에서 나온 죽창과 칼날 같은 언어폭력들에, 저 역시 같은 학부모로서 저는 제 몸이 죽창에 찔리고 제 살을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낍니다. 피해학생과 그 부모들의 아픔을 저도 가슴으로 겪으며 지금도 아파하고 있습니다. 수차례의 자살 시도 끝에 결국 학업을 포기한 피해학생은 여전히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제는 성인이 되었을 그 분이 지금 현재 어디에 살고 있든지 푸른 산처럼 푸른 하늘처럼 지켜주시기를 염원합니다. 일상을 살아가다가 문득 이 작은 염원 한 점을 제 마음으로 품는 순간마다 반짝 제주도의 봄바람 한 자락처럼 봄햇살 한 자락처럼 문득 올려다 본 밤하늘의 별빛 한 점으로 그 분의 가슴에 가닿겠지요. 보이지 않지만 마음으로 갈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길이 있고,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고, 보이지 않는 발길이 있음을 저는 늘 인정합니다.
그리고 많이 안타깝습니다. 2018년의 민족사관고등학교의 신학기부터 현재 2023년 국회 청문회까지 열리게 된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에 그 어디에서도 재학생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모든 생활을 함께 하는 기숙학교 안에서 일어난 일인데도 말입니다.
학교라는 장소는 선생님도 계시지만 많은 학생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입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은 학생들이 가장 먼저 알고 가장 잘 알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학교 안에서 학생들 사이에서 일이 발생했는데 주위에 학생이 하나도 보이지 않다니. 이것이 정상적인 학교의 모습인지 스스로 자문해 보고 또 해보지만, 그럴 수록 가슴이 턱턱 막혀옵니다. 나라를 위한 인재를 배출하기 위해 설립된 민족사관학교라는 이름이 제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아, 딱 한 곳에서 재학생이 나옵니다. 피해 학생이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 학교로부터 분리조치가 취해지지 않아 여전히 학교를 다니고 있던 가해학생이 자기 아빠는 검사라서 재판에서 이긴다며 웃으며 떠벌릴 때 옆에서 함께 웃던 몇몇의 급우들 그리고 또다시 가해진 2차 가해, 여기서 피해학생은 '악마를 보는 것 같다.'라고 적었습니다. 그 피해학생은 에초에 아무런 잘못이 없었습니다.
이 사건과는 조금 성격이 다르지만 언어폭력에 있어서는 여학생들의 입은 칼날보다 무섭습니다. 그것도 자기의 남친을 빼앗긴 여학생의 분노는 어른들 사이에서도 스스로의 눈을 멀게 하며 제 온몸의 세포를 스스로 파괴시킬 만큼의 무서운 불기운을 일으키게 되는 것 같습니다.
고2 신학기 3~4월의 교실, 아직은 담임선생님도 새로 만난 급우들도 모든 것이 낯선 공간. 급식실에 함께 갈 친한 친구가 단 한 명이라도 곁에 있었다면 숨이라도 쉴 수 있었을 텐데, 새로 썸을 타기 시작했다는 A여학생에게는 그런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합니다. 딸아이의 증언에 의하면 A여학생과 B여학생을 중학교 때 각각 알고 지내긴 했지만 친한 친구는 아니라는 말로, 이야기의 초반부터 먼저 거리두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이들도 자기들만의 보는 눈이 있는지, 셋 다 거기서 거기라는 말로 말을 그치더군요.
B여학생은 쉬는 시간마다 여러 친구들을 거느리고 A여학생 반에 찾아와서 언어폭력을 가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소문은 삽시간에 전 교실로 퍼져나갔고, 차마 귀에도 입에도 담을 수 없을 정도의 욕설과 비방으로 A여학생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영문을 잘 모르는 급우들은 수근대기만 할 뿐 아무도 나서서 말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교실이란 곳은 눈치도 빠르고 소문도 빠른 곳입니다. 해 뜨는 아침부터 하루해가 지기 전까지 함께 밥을 먹고 생활하는 공간인 교실은 그래서 늘 소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언어폭력을 당하던 A여학생은 시간이 갈수록 교실 안에서 점점 더 고립이 되어갔다고 합니다. 아무도 먼저 말을 걸어오는 급우도 친구도 하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럴 수록 B여학생의 분노에 찬 언어폭력은 도를 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제 앞에서 말을 이어가던 딸아이도 간간히 한숨을 쉬며 차마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더군요. 제가 표현을 달리하여 옮기자면, A여학생은 이미 삽시간에 학교 안에서 더러운 바닥을 닦는 천조각이 되어 있었습니다.
딸아이도 같은 반에서 일어나는 일을 더는 지켜볼 수 없었던가 봅니다. 언어폭력을 당하며 학교 안에서 고립되어가던 A여학생을 중학교 때부터 알고는 지냈지만 별로 친하지는 않았다며 먼저 선을 그은 딸아이에겐, 초중고를 함께 다닌 절친 한 명이 또한 현재 같은 반이었습니다. 이 둘은 셋을 더 모았습니다. 나머지 셋도 다들 같은 중학교를 다닌 친구들입니다. 그렇게 다섯이 모였다고 합니다.
다섯 명의 여학생들이 취하기로 한 행동은 딱 두 가지였습니다. 급식실에 갈 때 A여학생과 함께 가고, 쉬는 시간에 A여학생 옆을 둘러싸고 있기입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별 말없이 그냥 매일 그렇게 행동했더니, 찾아오던 B여학생의 발걸음도 점차 그치고 언어폭력도 잠잠해지고 급우들의 수근대던 소리도 잠잠해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딸아이는 이 사건 전말의 이야기를 저에게 들려주었고, 일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의 사건은 흐르는 시냇물처럼, '이 또한 지나가리라.'의 성경 구절처럼 그렇게 잠시 학교를 들썩들썩 시끌시끌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흐르는 시냇물처럼 그저 지나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꺼리가 생겼다가 흐르고 묻히고 그리고 늘 새로운 꺼리가 이어지는 곳이 학교 뿐만 아니라 우리 사람들이 살아가는 땅의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고비를 넘으면 또 한 고비로 이어지는 산자락처럼요. 그렇지만 벼랑 끝에 서서도 스스로 호흡이 거칠어지지 않도록 마음을 지키는 일이 이제는 저의 본업이 되었습니다. 먹고 사는 일은 어디까지나 부업이 된다며 스스로 되뇌입니다.
그때 제가 딸아이에게 한 마디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나?", 밥을 먹던 딸아이는 우물우물 얘기하더군요. "그 애 표정을 봤는데, 저러다가 자살할까봐... 겁났어." 그리고 저는 더 이상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딸아이 입에서 툭툭 새어나오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제 가슴속에서는 환한 꽃잎이 한 겹 한 겹 피어나는 듯 눈물 같은 웃음 같은 그 무엇이 차오를 뿐이었습니다.
중학생이던 딸아이에게 큰 기대를 품던 적도 있었습니다. 과학고나 학군이 좋은 고등학교 진학을 내심 품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매사에 선택은 항상 딸아이에게 맡겨왔습니다. 빨간 색종이를 할지 파란 색종이를 할지 딸아이가 기어다니던 유아 때부터 늘 선택은 딸아이의 몫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선택할 때도 딸아이는 스스로 고민하는 눈치였습니다. 내심 엄마로서 아쉬움은 있었지만, 중학교의 친한 친구들이 함께 진학할 수 있는 우리 동네에 있는 일반고를 선택한 것도 딸아이의 선택이었습니다.
올해는 딸아이가 대학도 스스로 선택할 것입니다. 하지만 굳이 대학을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입장을 엄마는 이미 오래 전부터 전해오고 있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좋은 친구들이랑 함께 공부할 수 있는 대학이 있다면 대학교 진학도 나쁘지 않다고 얘기해줍니다. 그전부터 딸아이에게 전달한 저의 본심이기도 합니다. 서울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에서 4년 재학하는 것보다 매일 아침 도시락을 싸서 강변을 따라서 자전거를 타고 동네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 3년 출석하며 고전을 아우르는 좋은 책을 읽는 것이 휠씬 더 좋은 인생을 살 수 있는 비결이라고.
좋은 책을 읽고 스스로 생각하며, 자신의 마음을 지키고 마음을 소중히 하는 바로 그것이 이 아름다운 대한민국 이 땅을 지켜온 푸른 소나무의 삶이라고. 그리고 현재 이 나라 곳곳에는 좋은 공부공동체들이 푸른숨을 쉬고 있다고. 배우고자 하는 자에게는 이 세상 모든 곳이 학교가 되고 교실이 되고 선지식이 된다고 얘기해줍니다.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 자기자신을 등불 삼고 진리를 등불 삼아라.' 교실에서도 친한 친구가 있으면 함께 놀면 되지만, 없으면 혼자서 놀아도 괜찮다는 얘기를 아마도 우리 딸아이는 엄마로부터 귀가 닳도록 들었을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친절하되 '친구와 책을 함부러 사귀지 말아라.' 친구와 책은 마음과 영혼을 나누는 존재이니까. 그리고 길가에 구르는 돌멩이도 함부러 대하지 말아라는 권정생 선생님의 얘기가 늘 제 귓전을 맴돕니다.
초등학교 1학년 입학하던 날부터 딸아이에게 전했던 문답이 있습니다. "너는 어떤 친구를 사귈래?"입니다. 한 친구는 공부를 아주 잘 하는데 마음이 좋지 않아. 또 한 친구는 공부는 좀 못해도 마음이 좋아. 그리고 이것은 나날이 성장해가는 딸아이와 가끔씩 이어가던 문답이기도 합니다.
생일이 빨라서 또래들 사이에서도 올되던 딸아이는 교만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흔히 아이들 교실에선 공부를 잘하면 그냥 용서가 되는 지점이 있다는 사실을 이미 학창시절을 겪어온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딸아이에겐 늘 '마음'을 최우선에 두는 교육관으로 일관해 오고 있습니다. 아마도 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는 스스로에게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와 함께 나란히 걷는 마음이란, 자유로 향하는 양날개가 됨을 저는 모르지 않습니다.
제 가슴 한복판을 겨울바람처럼 스치며 선들하게도 만들고 때론 봄햇살처럼 따스하게도 비추는 한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장 23절), 그리고 해인사 고려 팔만대장경 불법의 말씀을 단 한 글자로 줄이면 마음 심(心)자 한 글자가 되는 이치처럼요. 해인사 원당암에 주석하시던 혜암 스님의 법문처럼 "팔만대장경은 똥닦개 코닦개요. 자기 마음을 지키고 마음을 소중히 하시오." 산과 이 땅을 지키는 푸른 소나무의 마음처럼, 황사와 미세먼지 너머에도 여여한 푸른 하늘 같은 마음처럼요. 예수와 부처의 손가락은 늘 그 한 곳 오로지 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햇살이 좋은 날 푸른 나무 그늘 아래에 둘러앉아 책을 읽으며 지혜와 마음을 나누는 열린 교실이 그립습니다. 우리의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 그런 열린 교실입니다. 객관식 사지선답형 시험문제로 사고를 경직시키고, 마음의 흐름과 전혀 상관없는 성적으로 줄세우지도 않는 그런 살아 숨쉬는 열린 교실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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