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은 ‘왕질’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18)

 

‘갑질’은 ‘왕질’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나는 지속적으로 우리 사회의 에토스가 여전히 왕조적이라고 지적해 왔다. 그리고 그런 이유 중 하나로 공화정의 도입이 시민들의 주체적이고 자발적 행위와 자각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외부에 의해 순식간에 이식되었음을 지적하였다. 서구 사회가 프랑스 혁명(1789~1794)이라는 시민의 힘으로 왕정을 종식시킨 역사적 경험을 소유한 것에 반해, 우리는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강대국이 주도한 세계 체제 재편 과정의 하나로 타력에 의해 공화제가 시작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여전히 우리 사회 대부분의 마인드와 에토스는 임금을 모시던 때의 역사적 경험과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대의 등장이 어느 누구도 간섭하거나 훼방할 수 없는 ‘주체적 자아의 발견’에 기초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한국 사회는 집단적이고, 신분적이며 왕조적이다. 그래서 계급과 신분의 차이에 매우 민감하고, 그에 기초한 차별적 의식과 행위가 너무 극명하게 드러난다. 얼마 전 우리 사회를 달궜던 땅콩 회황 사건이나 최근 이슈가 되었던 모 대학 이사장의 서슬 퍼런 언사도 이런 왕조적 에토스의 한 발로라고 볼 수 있다. 대학 구조조정에 힘을 쏟고 있는 재벌 출신 박 모 이사장은 자신의 방침에 반대하는 비상대책위 소속 교수들에게 다음과 같은 끔찍한 언어로 가득 채워진 메일을 보냈다.

 

“그들이 제 목을 쳐달라고 목을 길게 뺐는데 안 쳐주면 예의가 아니다. 가장 피가 많이 나고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내가 쳐줄 것이다.”

 

자신이 생각했던 기내 서비스 절차와 달랐다고 정상적 항의 수준을 벗어나 인격 살인에 가까운 충동적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모 항공사의 부사장이나 위 대학 이사장이나 과연 주체적 개아를 존중하는 현대적 에토스를 갖춘 교양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더 놀랍고 끔찍한 사실은 저런 유의 갑질이 이 공화국에서는 거의 일상에 가깝다는 것이다. 상대가 달라지고, 환경만 교체될 뿐이지 온통 사회는 갑질을 희구하고, 소망하고, 또 욕망한다. 어떤 식으로든 갑의 위치를 점하여 을에게 명하는 이가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한 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 풍경이다.

 

이런 에토스가 넘쳐나는 사회다 보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보다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 물론 남보다 더 좋은 자리가 무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좀처럼 선행되지 않는다. 그저 사회적 통념상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높은 연봉, 높은 지위면 족하다. 그래야 그 아래에 사람들을 부릴 수 있고, 그래야 갑질을 제대로 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을이 되면 안 되기에 갑이 되기 위한 과정과 장치에 목숨을 내어 댈 지경이다. 나름 사회적으로 성공한 기업가도 더 높은 갑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벌어놓은 돈을 풀어 정치를 해야 하고, 아니면 적어도 유력 인사의 지근거리를 유지해야만 한다.

 

세상이 이렇고, 그 세상의 에토스가 이러하니 한국 사회에서 주체적 개아를 찾아내기란 하늘의 별 따기이다. 아니 혹 그것을 강조하는 이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들은 모난 돌이 되어 정을 먼저 맞고, 침묵은 금이라는 격언으로 압제 당하기 일쑤이다. 의견을 말해선 안 되고, 더욱이 갑에게 저항하거나 반대해서는 안 된다. 을은 그저 갑의 명령에 복종만 하면 될 뿐, 거기에 토를 달 거나 의견을 말해서도 안 된다. 회의는 갑이 하고픈 말은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현장이지 을들의 견해를 듣거나 묻는 자비의 마당이 될 수는 없다. 그렇게 우리 사회는 곳곳에 갑질의 향연만 반복된다.

 

 

 

 

갑질…. 결국 그건 왕질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여전히 사회적 에토스가 왕조적 마인드에 묶여 있다 보니 갑의 언사는 임금의 그것이 되어 어명처럼 서민의 심부를 파고든다. 그러니 사회적 의견을 통합하는 소통의 광장은 제대로 열려지지 않는다. 집단지성이나 자유로운 소통은 온라인 상 한 귀퉁이에서나 통할 법한 전설 같은 이야기일 뿐이고 직장, 기관, 학교, 동네에서 만나는 생활 경험은 왕조 사회의 갑질 문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우리 사회는 여전히 계몽의 강을 넘어서지 못한 왕조의 그림자에 갇혀있다고 할 수 있다. 서구가 루터의 종교개혁을 통해 신 앞에 서는 단독자를 발견한 후, 지속적으로 집단과 전체에 저항하는 개별적 주체를 강조하며 현대의 중심을 차지했던 것에 반해, 여전히 우리는 왕과 갑에 속한 이들이 지배하는 중세의 그늘에 머물러 있다. 서구가 니체, 키르케고르와 다수의 실존사상가들의 도움으로 저 멀리 관념과 존재의 이름으로 지금 여기 단독적 실존자를 억압하고 명령하는 구도의 허상을 깨뜨린 것에 반해, 여전히 우리 사회는 계몽적 군주의 메시아적 통치를 희구하는 주술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갑의 눈에는 을의 집단행동이 불편하다. 그들의 반응은 수긍과 순종이면 충분할 텐데, 을들이 사고하고 성찰하기 시작하면 매우 곤란해진다. 그래서 국가란 결국 주체성을 획득한 개인의 집합체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구성된 계약적 추상체임에도 오히려 을의 의사를 억압하는 기재로 작동하게 된다. 왜냐하면 여전히 우리 사회는 왕조적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을 역시도 집단의 부분으로 스스로를 인지할 뿐 주체적 자아로서 자신을 인식하지 못한다. 아니 홀로서기 자체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한다. 을들은 그렇게 교육받았고, 그렇게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주체자로서 스스로의 정치적 행위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보다는 갑의 명령에 순응하는 것이 더 편하다는 주술에 오래도록 노출된 탓이다.

 

그 사이 우리 사회는 더욱 더 꼬여가고 틀어져간다. 곳곳에 갑질의 횡포가 넘쳐나는데도 좀처럼 현대 사회의 시민들은 분노할 줄을 모른다. 그저 왕조 사회의 신민으로 살아남기에도 버겁기 때문인가? 이미 우리 사회의 교육수준은 세계 최고를 향해 치닫고 있어도 사회적 에토스는 여전히 중세의 어두움에 묶여 있다. 그러니 갑들의 전횡은 그칠 줄을 모른다. 인격 살인적 행위와 언사에도 더 도도하게 으름장을 놓고, 속에서나 삭힐 폭언을 드러내놓기에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세월호 참사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스스로 갑이라 생각하는 이들은 이 역사적 사건을 단순 교통사고로 폄하하면서, 간단히 돈으로 해결하려고만 한다. 갑의 온정으로 두둑이 챙겨 줄 테니 이쯤에서 목소리를 낮추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투의 훈계이다. 세월호 참사 1주년을 앞에 두고 갑들이 흘린 1인당 보상금 몇 억씩이라는, 그리고 그 정도면 다른 사건, 사고에 비하면 두둑하게 챙겨주는 것이고, 사고가 난지 1년이 지났으니 이제 이 정도에서 접고 가자는 그들의 언사는 앞서 언급한 갑의 이념에서나 나올 법한 매우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폭력에 가깝다. 어찌 자식을 잃은 부모 앞에 돈의 액수를 운운할 수 있겠는가. 이는 왕조적 갑의 정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횡포이다.

 

동일한 논리가 지난 MB정권 시절 광우병 반대 운동에서도 튀어 나왔었다. 사람의 생명을 경우의 수로, 몇 %로 수량화하면서 을의 항의를 묵살하기 일쑤였다. 허나 생명은 경우의 수가 아니다. 백만분의 1이라도 그것이 나라면, 내 가족이라면 곧 100%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생명과 안전에 관한 한 가급적 우려와 불안의 요소를 제로에 가깝게 해야 하는 것이다. 허나 갑의 눈에는 그렇게 제 몸 아끼는 을이 불편해 보인다. 감히 갑의 온정 하에 목숨붙이고 사는 것들이 제 목숨의 값을 논한다는 것이 말이나 될 성인가. 그러니 그들의 비아냥거림과 으름장, 그리고 훈수 두기는 끝 간 데를 모른다.

 

어찌해야 이 질곡이 끝날까? 그런 점에서 세월호는 그 한 가운데에서 우리 사회의 새로운 이정표를 요구하고 있다. 민주냐 왕정이냐! 물론 이는 사회제도를 놓고 하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는 이미 절차적 민주제를 정착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지향하고 있는 것은 절차적 민주사회에 살고 있는 시민의 에토스이다. 민주사회 속 왕조적 마인드라는 보기 흉한 불균형은 이제 지워버려야 하지 않겠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길용/종교학, 서울신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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