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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

이 돌들로도…

by 한종호 2015. 5. 4.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18)

 

이 돌들로도

-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오라> 1935. 12 -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그런 거지 싶다. 수년 째 교회 공동체 밖으로까지 불거져 나와 망신살이 이만저만이 아닌 목회자들의 비윤리적, 탐욕적 행태들 말이다.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 계시다고, 무소부재 안 계신 곳이 없고 안 보시는 시간과 장소가 없다고, 정말 그렇게 믿는다면 불가능한 일들이다. 어찌 목사사무실 문 닫아 걸고 여신도들을 농락하며, 어찌 이말 저말 말을 바꾸어가며 거짓과 허세로 강단을 채우며, 어찌 고아와 과부의 헌금을 가져다가 제 식구들 배불리는 데에 쓸 수 있을까?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어쩌면 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다. 물론 사랑이 하나님의 속성인 것이야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만, 이들의 신앙고백에는 중심의 확신이 가득하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이 믿는하나님은 귀중한 주의 제자로 나를 이미 지명하고 선택하셨으니 무조건 나를 축복하실 하나님” “어차피 인간은 죄로 가득한 존재이니 이런 탐욕을 불쌍히 여기시고 내가 용서를 빌면 무한히 봐주실 하나님이다. 한마디로 를 위한 든든한 뒷배와 같은 하나님 신앙을 가졌기에, 그리 뻔뻔하고 그리 오만하며 그리 자신만만한 것이 아니겠나.

 

독사의 종류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래의 노하심을 피하라 하더냐. 그런고로 회개함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맘속에 생각하기를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것은 광야의 선지자 세례 요한이 그 세례를 받으려 나온 바리새 교인과 사두개 교인을 보고 발한 책망이다. 왜 그는 이런 격분한 말을 했던가. 사람의 양심위에 주의 길을 예배하며 그 첩경을 곧게하자는 그의 눈에는 외모의 믿음은 간교한 독사의 일같이 가증하게 보이었던 것이다. 이제 이 같은 부르짖음을 우리는 그리스도 신자를 향하여 보낼 필요가 있는 때가 왔다.

 

세례 요한과 함께, 김교신과 함께, 실은 아프고 속상하지만 우리 시절 역시 날카로운 비수의 칼날을 안쪽으로 향해야할 때이지 싶다. 수천 년 전에 고대 근동의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고대 도시들을 전전하며 살았던 아브라함을 지명하여 부른 하나님, 하여 그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를 내가 축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를 내가 저주하겠다고 약속 하셨던 하나님은 결코 아브라함을 향한 편애를 약속하신 것이 아니었다. 낳아놓은 만물이 모두 풍성하게 그 삶을 누리는 것을 보시는 것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마음이셨을 텐데, 잘난 놈 영악한 놈 탐욕스런 놈들 사이에서 제 몫 못 챙기고 빌빌대는 약한 생명이 어찌 걸리지 않으셨겠나! 하여 하비루’(‘히브리의 어원)들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결심하시고 일종의 출사표를 던지신 것 아니었겠나!

 

그 어느 왕도 내 백성이라고 살뜰하게 챙긴 적 없이 그저 잠시 쓰고 버릴 노동력으로만 바라보았던 하비루’(히브리) 아브라함에게 걱정마라, 내가 너를 돌보마. 내가 너의 하나님이 되마.’ 약속하신 것 아니겠나. 임시계약직 장그래’(드라마 <미생>의 주인공이다.)도 오차장님의 우리 애호칭에 눈물이 그렁그렁 감격했는데, 그 심정은 당해본 사람만 아는 거다. 아무도 나를 우리집단에 포함시키지 않는 경험, 멸시와 배제를 한 두 해도 아니고 삶 전체를 통해 겪었던 아브라함에게, 인간 왕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내 백성이라고 불러주시는데, 그 감격과 기쁨을 어찌 유한한 언어로 표현할까?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이스라엘의 출발은 그랬던 거였다. 그들의 강함이나 잘남이 아니라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특별한 애정을 받게 된 사람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선으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사랑으로 감싸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어여삐 보시고 그 삶을 함께 축복하시겠다는 말씀이셨다.

 

 

 

런데 그 사랑을 오래토록 받다보니, 유대인들이 착각을 한 거다. 우리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선택된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해도 하나님만 부르짖으면 다 용서하시고 무한히 사랑하시며 늘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이다. 이런 유대인들을 향하여 세례 요한이 꽂은 비수가 바로 그 말씀이었다. 요즘 말로 풀자면 이 소리다. 너희들의 유전자가 너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동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다. 너희들에게 존재론적 특권은 없다. 하나님은 하시고자만 하시면 저기 굴러다니는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는 분이다. 그러니 삶으로 보여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예수가 이어받아 전한 복음의 메시지에도 귀를 막고 마음을 닫은 유대인들의 배타적 선민의식 때문에 결국은 유대교로부터 떨어져 나왔을, 실은 유대교적 메시지나 기독교적 메시지의 핵심이 되는 정신은 같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율법을 폐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성취하려 오셨다는 예수의 말씀은 옳다. 종교적·사회적 기득권자들을 위해, 그들에 의해 더해지고 형식적으로 굳어진 율법조항들 대신에, 하나님께서 창조로부터 뜻하셨고 시나이산에서 히브리 공동체에게 주셨다는 삶의 자세로서의 율법 정신을 제대로 성취하려 하셨던 것이 예수의 사역이셨다.

 

너희는 서로 사랑해라, 서로 용서해라, 그것이 하늘 아버지의 뜻이다. 그러고 산다면 행여 인간의 유한성으로 아차 잘못 선택한 것, 실수한 것을 뉘우쳐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도 역시 용서해주실 것이다. 속죄제의 화려하게 드린다고 용서받는 것 아니다. 외식하는율법학자들, 제사장들, 장로들의 말은 들을 필요 없다. ‘하나님중심으로 살아라. 너의 산 영혼으로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 믿어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사랑 많으심을 믿어라. 그거면 된다.

 

예수의 핵심 메시지를 안다면, 그걸 부정하는 이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안다면, 어찌 똑같은 잘못을 반복할 수 있을까? 김교신의 애통함이 오늘 우리의 마음이다. 비단 목회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오늘날의 신자들 다수가 문화가 되고 형식이 되어버린 예배만 드리고 마음 편히 죄된 생활을 하는 지경이지 않은가.

 

오늘날의 신자를 향하여 그대는 믿는 자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니 그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 교회 명부에 이름이 있는 것이요, 주일과 기도회에 열심으로 출석하는 것이요, 날마다 성경 보고, 목소리를 높여 찬미하고, 장강유수의 기도를 드리는 것이요, 연보를 하고 구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밖에 없다. 오늘날의 신자를 향하여 그대가 예수를 믿는 목적은 무엇이냐고 물으면 곧 대답하기를 죄속함을 입어 영생에 들어가기 위하여서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이 그런가. 그보다도 생활이 더 나아지기 위하여, 남의 신용을 얻기 위하여, 인격 수양을 위하여, 사회사업을 하기 위하여 믿는 자가 더 많지 않을까. 그 증거로는 그들 중에 자기 죄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가 없다. 불신자가 누리는 세상 영화에서 털끝만한 것도 빼지 않고 다 누린 후, 천당에 가서 불신자는 못 가지는 복락을 또 한 가지 더 얻자는 것이니 욕심의 변태가 아니고 무엇이며, 몸은 비록 죽으나 우리의 사업과 정신이 후에 깉는(남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텅 빈 말만 아니고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느냐고?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께서 선포하고 살고 행하다 죽으시기까지 그치지 않으셨던 하나님 나라의 통치 질서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이다. 십자가 자체에는 마술적 힘이 없다. 그저 십자가만 우러르며 무슨 안티바이러스 소독약처럼 일상이 되어버린 자기 죄를 손쉽게 씻을 생각을 말라. 십자가는 이 땅에서 내 욕심 다 채우고 저 천국 가게 하는 로또가 아니다. 십자가를 그리 마술적인 숭배 대상으로 여긴다면, 히스기야가 찍어버린 구리뱀처럼 기독교도들이 붙잡은 십자가도 버려야할 일이다.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의 신자는 그 거짓 신앙에서 뛰어나와야 한다. 표준의 태도들 버리고 그 문화주의 살림을 폐해야 한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에게 돌리는 하나님 중심의 믿음에 돌아와야 한다. 불신자에게 회개를 권하기 전에 저 자신이 먼저 회개할 필요가 있다. 아아, 무서운 일이여! 저희는 속히 이 무서운 자리를 떠나야 한다. 회개하고 성령을 고쳐 받고, 성경을 고쳐 읽어!

 

회개하고 성령을 고쳐 받고, 성경을 고쳐 읽어! 더 이상의 긴급한 명령은 없다. 하룻강아지마냥 도끼날이 나무뿌리에 놓인 줄도 모르고 세상을 다 얻은 듯 살 일이 아니다. 먼저 를 돌아보자. 저 돌들보다 못한 처지에 놓이기 전에.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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