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19)
선한 싸움
-『대립항쟁의 대상』, 1936년 11월 -
요즘 우리나라 대통령의 화법을 놓고 말들이 많다. ‘주어’가 없어서 누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건지, 누가 그리하겠다는 건지 도통 모르겠는 무책임한 화법이라는 비판은 예전부터 회자되었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일련의 중요한 사건들과 정책을 놓고 대한민국 최고 의사결정자가 했다는 말들을 듣거나 읽어보면 나도 당황스럽다. 무슨 말인가? 마치 주관식 문제를 받고 답안은 써야겠는데 아는 건 별로 없고 문제가 이해조차 안 되어 급한 마음에 수업 시간에 들은 단어들을 의미 없이 쭉 나열한 학생의 중간고사 답안지를 읽고 있는 느낌이다.
“우리의 핵심 목표는, 올해 달성해야 될 것은 이것이다 하고 정신을 차리고 나아가면 우리의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걸 해낼 수 있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5월 12일 국무회의에서 했다는 말인데, 이번에는 주어도 있고 결연한 각오도 느껴지나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가 이해불가다. 이 말을 인터넷 공간에 퍼 나르며 의견을 나누는 네티즌들은 ‘공황정치’라는 평가를 한다. 국민들이 무슨 말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열심히 분석도 하며 이해해보려고 애쓰다가 결국은 ‘공황’상태에 이르게 만드는 ‘의도된’ 화법이라는 거다. 요즘 아이들 말로 ‘웃프’다. 어이없어서 웃기는 하는데, 재미있고 신나서가 아니라 서글퍼서 나오는 웃음이다.
이것이 의도된 화법이라면 그야말로 주도면밀하고 치밀한 정치다. 도대체 누굴 상대로, 무엇을 두고 반대하거나 싸워야할 지를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물론 우리가 싸우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존재는 아니지만, 적어도 서울의 노동인구 10명 중에 7명이 비정규직이라 하고, 전체 노동자의 반이 주중에 빠짐없이 출근하여 하루 종일 일을 해도 월 200만 원 이하의 봉급을 받으며, 서울 거주 청년들은 세 명중 한 명꼴로 실업 상태라는 노동 환경을 만든 장본인들과는 ‘싸워야’할 것이 아닌가? 정부는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어떤 ‘핵심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일까?
사진 김승범
결혼을 하고도 출산·육아가 어려워 초저출산 국가가 되었다는데, 산업화 시대 가족과 국가를 위해 뼈 빠지게 일했던 지금의 노년층도 복지사각지대에 있는 분들이 많다는데, 무엇보다 고용 유연성이라는 이름으로 기업만 배불리는 신자유주의적인 구조 속에서 한 가정의 중산층 가장들이 일자리를 잃고 가족동반자살로부터 훈련받은 직업과 관련 없는 저임금 노동까지 자존감 제로의 상태인데, 더구나 지난 한 해 동안 인재(人災)에 해당하는 사건사고가 너무 많아 규명할 일도 해결할 일도 산더미인데, 도대체 정부의 올해 핵심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구체적으로 묻고 듣고 토론하고 필요하다면 시민 저항을 할 것이 아닌가?
싸움이 즐겁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싫어도 싸워야 한다. 지금 우리 삶의 한 가운데 반(反)생명의 실제적 힘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아라, 살려라 지상명령을 하셨는데, 그걸 믿는 기독교인으로서 ‘일상’이 되어버린 죽음과 죽임의 시대를 살면서 어찌 싸움을 포기하겠는가 말이다. 김교신 선생의 말마따나 싸움은 기독교인에게 언제나 사명이다. 다만 시대에 따라 싸움의 대상이 달라질 뿐이다.
“기독교는 … 언제든지 사명적인 싸움을 짊어지고 있다”함은 가하다. “역사적 기독교가 다 전투의 종교이었다” 함도 사실 그렇다. 그러나 이는 ‘기독교’란 것이 본래 그렇단 말이요, 모든 기독교가 다 그래야 할 것이다. 하필 무교회주의에 한한 것이 아니다. … 우리가 알기로 무교회주의자란 것은 종교 전문학자 또는 직업적 종교가가 아니요, 보통 ‘사람’이요, ‘소인(素人)’이요 ‘문외한’이다. 저들은 통상 인간이요 신학자가 아닌 까닭에 악의가 없다. 밤낮 “무교회주의면 교회와의 대립 항쟁에만 그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다”라는 승려 냄새 분분한, 법의 입혀 놓은 정의 같은 문구를 기억하지 못한다. 싸울 때는 뿔이 부러지게 싸우다가도 협력할 때는 무교회주의자인 자기의 입장을 망각한 듯이 협조도 하며 찬동도 한다.
‘무교회주의의 본령(本令)이 무조건 싸우는데 있다’고 비판했던 최태용 목사의 글에 김교신이 공개적으로 반박하며 한 말이다. 최태용 목사는 김교신과 성조지 동인들보다도 먼저 우치무라의 무교회에 매료되었던 신앙인이다. 그는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뿐 아니라 그 음성, 태도까지도 본받아서” 보는 이들이 ‘제2의 우치무라’라고 불렀다는 인물이다. 최 목사는 무교회가 일부 종교 천재들의 예외적 공동체이고, 무엇보다 사사건건 교회 비판을 하는 파괴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때문에 자신은 무교회를 떠났노라고 말이다. 그의 무교회 비판이나 신앙적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최 목사가 싸울 대상을 분명히 하고 무엇이 문제라고 명백히 지적했다는 점에서는, 전 국민을 ‘공황상태’에 빠뜨린 오늘날의 위정자들 보다는 낫지 싶다.
사실 싸움은, 혹은 논쟁은 이래야 전개할 수 있는 거다. 최태용 목사의 무교회 이해는 ‘오해’라는 것이 김교신의 입장인데, 이렇듯 정확하게 대상이 있고 내용이 있어야 오해다, 아니다 말이라도 붙여볼 것 아니겠나. 최 목사에게 응답하며 김교신은 분명히 해명한다. 기독교는 본래가 선한 싸움을 싸워야하는 종교라고. 그러나 이는 교회든 무교회든 배타적인 ‘우리’ 집단을 견고히 하고 경쟁 상대와 무조건적 싸움을 하는 그런 싸움은 아니라고 말이다. 생명가치를 세상에 전하고 생명 나눔을 실천하는 사명을 실천함에 있어 이에 반(反)하는 사상과 제도, 실천에 맞서 싸우는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이 기독교라고 말이다. 때문에 교회든 무교회든 항구적인 ‘적’을 가지지도, 가질 수도 없다고, 김교신은 해명했다.
무교회주의의 본령은 소극적으로 대립 항쟁함에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진리를 천명하며 복음에 생활하는 데 있다. 때로 항쟁이 없지 못하나 이는 진리가 현현하며 생명이 성장하는 길에 장애물을 봉착한 때의 일시적 불가피의 현상이다. ‘무교회’라고 해서 기독‘교회’만이 그 항쟁의 대상이 아니다. 무교회자는 개념에 사는 학자가 아니요, 현실 세계에 생활하는 산 사람인 고로 그 시대 그 사회의 현실에 착안하여 싸운다. 오늘날 조선 교회를 공격함에는 용자(勇者)가 필요치 않다. 각자 교파의 내분에 빈사(瀕死)의 상처를 입은 조선 교회들을 추궁함이 통상 인간 심정으로는 쾌사(快事)가 아니다. 무교회는 ‘교회’와만 싸울 것으로 아는 데에는 승려적 편협이 있다. 교회 이외의 것과도 싸우는 데에 무교회의 정신이 있다. 과연 누가 선한 싸움을 싸울 것인가는 주 예수의 은총을 기다려 볼 것이다.
선한 싸움을 제대로 싸우려면 ‘시대에 착안하여 싸움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1920년대와 30년대 초반, 교회의 화석화된 신앙과 교파주의에 대항하여 싸웠던 김교신과 성조지 동인들은, 3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더욱 무력화되어가는 식민 상황이 되자 그 싸움의 대상을 제국주의적 일본으로 바꾸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궁극에는 그에게로 돌아가야 마땅한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같은 생명을 나눈 인간끼리 항구적인 적이 어디 있으랴? 허나 교파주의보다 더 시급하고 무서운 ‘죽임’의 힘을 행사하는 ‘일제’의 무력정치를 마주하고서야 기독교 내부의 문제들만 붙잡을 수 없는 노릇이었을 거다.
오늘날에도 역시, 시대를 읽고 상황을 분석하며 싸워야할 대상이 누구인지를 면밀하게 살펴야하는 것은 기독인의 사명이다. 신자유주의적 경제 구조가 사람을 사람이 아닌 ‘기계’나 ‘노동력’으로 보고 ‘쓰고 버리는’ 악을 행하는 것은 알겠는데, 하여 오늘날 생명가치를 선포하는 기독교의 주요한 싸움 대상인 것도 알겠는데, 그 작동방식이 너무나 교묘하여 누가 갑이고 을인지도 모르겠는 실정이다. ‘여우’ 같은 신자유주의적 고용 구조는 갑을병정으로 얽히고설킨 간접고용 형태라 임금인상이나 노동환경 개선을 놓고 도대체 누구랑 대화를 해야 하는 지도 불분명하게 되어 있다. 어디 고용구조만 그러하랴. 내용이 뭔지도 모르는 세상 아닌가.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공황상태가 되지 않도록 정신 똑바로 차릴 일이다. 아무래도 오늘날 우리가 싸워야할 대상은 거대할 뿐만 아니라 잘 보이지도 않는 유령 같은 존재인 듯하니….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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