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20)
비진리가 진리를 대하는 태도
- 「공포의 심리」 1940년 8월 -
일제치하 어느 순간인들 어렵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겠는가. 허나, 1940년이 접어든 시점은 김교신 스스로도 ‘이 곤란한 시대’라고 명명할 만큼 반(反)생명적 식민주의의 힘이 폭력적이고 조직적으로 전개되던 당시였다. 약 12년을 몸담고 있었던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사직한 것이 1940년 봄(3월 22일)이었고, 같은 해 9월에 경기중학교에서 다시 교편을 잡았으나 ‘불온한 인물’로 주목받다가 6개월 만에 추방되었다. 1941년 10월에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에 부임할 때까지 또다시 수개월 교사생활을 쉬었고, 결국 ‘성서조선사건’으로 투옥된 것이 1942년 3월이니, 나라도 나라이거니와 ‘교직을 천직’으로 여기고 섬겼던 김교신 개인으로서도 참으로 힘겨운 때였으리라.
이쯤에 쓴 글이 「공포의 심리」이다. 발표된 시기는 1940년 8월, 양정을 그만두고 아직 경기중학교에 부임하기 전이다. 이 시절 김교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성서 강연의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올봄부터 직(職)도 그만두고 집회와 잡지에 전념할 수도 있게 되었기 때문에 시내의 적당한 장소-사택이 아닌 공적인 장소-를 빌어서 한번 본격적으로 해볼 생각이 들어 오래 전부터 그 장소를 찾아 다녔다. 일찍이 어떤 사람은 “내게 지점(支點)을 달라. 지구를 움직이게 하리라”고 외쳤다. 지금 나의 가슴에는 “내게 적당한 강의소를 달라. 내게 페어플레이를 시켜 보라”라는 외침이 솟아 넘치는 지경이기 때문이다.
‘놀게 된’ 마당에 무교회를 한 번 크게 키워보자는 심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욕망이 있는 인물이었다면 아예 시작부터 무교회에 매력을 느끼지도 않았을 일이다. 다만 거짓을 일삼는 사람들이 득세하고 반생명적 사건들이 일상이 된 사태가 더욱 가시화되자, 그 어느 때보다도 보다 많은 개개인들이 진리이신 말씀으로 무장되어야겠다, 마음이 급해진 듯한 초조함이 행간에서 읽힌다.
이리 저리 백방으로 수소문하다가 시내에 위치한 기독교연합회관에 공간을 사용할 뜻을 밝혔다. 험한 시절이니만큼 이제 교회냐 무교회냐 보다 더 큰 싸움이 있음을 알기에 교회 비판도 그친 마당이었다. “이 곤란한 시대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박물 교사가 그 직을 버리고 오로지 복음 선전에 종사하려고 하는 것이니” 오직 성서를 전하겠다는 그 열정을 높이 사주겠지 믿었다 한다.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기쁨으로 여길 기독교 연합기관이니 누구보다도 앞서 격려하고 조력하여 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대화의 여지도 없이 ‘단순히 무교회인이란 이유로 멋지게 거절당하고’ 말았단다.
무교회이기 때문에 교회의 연합기관과는 손을 잡을 수 없다는 것으로 그 말 속에 일종의 공포심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나는 이 공포심은 비진리가 진리를 대하는 태도임을 의심할 수가 없었습니다.
교섭을 담당했던 이의 보고에 적힌 글귀를 그대로 옮기며 김교신은 이 공포심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를 골똘히 생각했다. 공포심!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전국구로 모아도 한 트럭도 안 될’ 무교회인들에게 공포심을 갖게 된 걸까? 50만 기독교인이 대부분 교회신자인데, 숫자에서 오는 공포심은 필시 아닐 터이다. 장소를 빌려주는 대상들을 보니 상업을 목적으로 한 곳이나, 오락, 심지어 반기독교적인 모임에도 쉽게 장소대여가 가능했던 사례들이 많았음을 확인하며, 김교신은 소위 기독교연합기관이라는 곳에서 ‘무교회인’에게만 보이는 배타성의 의미를 곱씹는다. 그리고 그는 기관이 표시한 거절의사가 ‘하나님의 말씀이 제대로 전해지는 것’에 대한 공포심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김교신이 오직 자신의 성서연구만이 ‘진리’라는 오만과 독선에 빠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배우고 또 배우는’ 유학자의 성실성과 겸손에서 기독인이 배워야할 자세를 익혔던 그였다.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은 하나님의 성(誠)에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려 노력할 뿐(至誠), 그 어떤 인간도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진리’라고 외칠 수 없음을 알고, 또 인정하는 김교신이었다. 필시 YMCA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그 기관을 ‘비진리’로 치부하겠다는 의도도 아니라 생각한다. 다만 1940년이라는 시점이 해석의 실마리를 준다. 당시 ‘기관’을 유지하고자 하는 단체들은 소위 ‘바른 소리’를 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서의 핵심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알았기에, 무교회인 김교신이 어떤 성서강좌를 할지는 불을 보는 뻔히 알았기에, 결국 사업을 하고 기관을 유지하기 위해 그의 요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비교적 마지막까지 버텼던 장로교파도 신사참배를 공식적으로 허용한 것이 1938년 9월이었다. 교회마다 일장기를 걸어야했고, 기관과 조직을 유지하고자 했던 많은 기독교인들이 본인들의 내적 신앙이 어떠했는지와는 별도로 ‘일본을 사랑하는 것이 조선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내선일체사상을 공적으로 설교해야했다. 심지어 조선의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징병제를 찬양하고 고무하는 글과 연설도 피할 수 없었다. 친일 연설과 친일 행각을 했던 기독교 지도자들이 정말 마음 속 깊이 그리 믿었다고는, 나는 믿고 싶지 않다. ‘조선과 일본이 어찌 하나’이며 ‘일본제국을 사랑하는 것이 어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겠는가! 그럼에도 소위 ‘영적 진리’를 천명한다는 기독교가, 그 도를 전하는 인사들이, 공적인 자리에서 ‘비진리’의 편을 들었던 이유는 조직과 기관을 지키고자 함이었을 거다.
물론 그것이 정당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담담하게 학교를 접고 교회문을 닫은 신앙의 선택을 난 존경한다. 그러나 시절이 이런 상황이었고 다수의 기독교 기관들이 몸을 사리고 있던 때였음을 감안한다면 그 기독교연합기관 입장에서 김교신의 성서 모임이 불편했을 이유는 너무나 자명하다. 그것이 김교신과 무교회 신앙인들이 표현한바 ‘비진리가 진리를 대하는 태도’였을 것이다.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진리 아닌 것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세상에서 죽더라도 진리를 말하겠다는 사람만큼 공포스런 대상이 어디 또 있겠는가? 그러니 피할 밖에, 같이 하지 않을 밖에, 거절할 밖에….
그런데 서글픈 것은, 지금도 다수의 한국 교회가 ‘영원한 진리인 말씀’인 성서에 쓰인 대로 선포하겠다는 사람들을 불편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세적 권력과 재력을 가진 ‘비진리’의 실체들에 붙어 ‘너희가 외치지 않으면 저 돌들이라도 외칠’ 것이라 하셨던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은 끝끝내 외면한다. 침묵한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그때처럼 ‘진리’의 편에 서서 목소리를 내겠다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기는커녕 따돌리고 배제하고 비난하고 있다. 더 나아가 비진리 편에서 결코 하나님 나라 비전과는 함께 갈 수 없는 망발을 일삼기도 한다. 우리의 시절도 이 모양이라, 75년 전 ‘비진리 편에 붙은 기독 신자들’을 향해 던진 김교신의 서슬 시퍼런 경고는 오늘도 가하다.
“굳게 잡아라 공포심이여, 모든 어둠에 붙는 자의 심장을, 그래서 쫓는 자도 없는데 그들로 하여금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게 하라.”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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