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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

생명의 법칙

by 한종호 2015. 5. 31.

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21)

 

생명의 법칙

- 「농사잡기」, 1934년 9월 -

 

 

무슨 대단한 일을 한다고 하루하루 바삐 뛰며 지내다보니 먹거리로 받은 고구마 한 무더기를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다. 구석에서 존재감 없이 있다가 버려지려고 열매로 영근 생명이 아닐 텐데, 어느 날 문득 대청소 중에 발견하고 살펴보니 꼴이 말이 아니다. 건조한 날씨에 빼빼 물기 마른 모습으로, 도려내어 먹기에는 고구마 싹들이 군데군데 너무나 많이 나와 있었다. 빠르게 내 머리를 스치고 간 생각, 그냥 버려? 자칫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향할 뻔한 고구마 열 덩이를 바라보고 있자니 미안한 생각이 들어, 얼른 베란다 한 귀퉁이 큰 바구니에 담고 물을 부어 놓았다. 그러고는 또 하루씩 살아내느라 그 일조차 잊고 지내기를 열흘 쯤 되었나보다.

 

어허~ 저게 무엔가? 바구니 가득히 푸릇푸릇 올라와 있는 잎사귀들이 풍성하다. 하도 신통하여 바구니 속을 들여다보니 어느덧 물이 말라 있다. 그래서 또 한 바가지 물을 부어주고 다시 일주일, 공부책상 앞 베란다에 놓아둔지라 눈길이 자주 간다. 날씨가 더워진 요 며칠 사이는 아침 다르고 저녁이 또 다르다. 비록 한 끼 식사로 배부른 먹거리의 역할을 다하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땅에 심기지 못한 까닭에 저 푸른 잎들의 결실이 넉넉한 구황작물로 귀결되지는 않겠지만, 자칫 음식물 찌꺼기들과 함께 섞여있다 분쇄기로 향했을지도 모를 저 생명들이 하루 다르게 생명을 무럭무럭 피워내는 모습을 보니 마음 한가득 기쁨이 샘솟았다. 이래서 자연의 법칙은 ‘스스로 그러함’이구나. 하나님께서 빚어놓으신 생명의 법칙은 이렇게 후하고 경이롭구나!

 

 

 

 

기껏 고구마 열 덩이에게 물 한바가지 부어주고 감탄을 하고 있다 보니, 문득 김교신이 1934년에 썼던 글 <농사잡기>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4월 상순에 감자 10여 평과 호박 수평을 심었더니, 너무 밀파하였다 하여 콩나물이니 무엇이니 하면서 보는 사람은 조롱하였다. 마는 불과 4삭(朔)여일에 감자 두어 포대와 호박 24-25개를 수확하였다. 감자가 우리의 식탁에 오를 때와 항아리 같은 호박을 어깨에 메었을 때에 우리의 찬송은 컸었다. 지을 줄 모르는 농사도 풍성하게 결실하게 하여 주시는 기적을 찬송함이었다.

 

나만큼 무심한 손길은 아니었으나, 김교신도 농사경험 없이 그저 작은 밭에 손길 가는대로 감자와 호박을 심었었나 보다. 그걸 보고 농사 경험이 있는 지인들이 이런 저런 참견을 한 듯하다. 간격이 너무 촘촘하여 작물이 제대로 자랄 여유 공간이 없지 않느냐, 심지어 ‘콩나물 키우느냐’는 조롱까지 받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저 땅에 묻기만 해놓은 생명들이 기가 막힌 결실로 감동을 주었다. 두 포대나 거둔 햇감자는 김이 모락모락 가족의 식탁에 올랐고, 항아리같이 매끄럽게 자란 호박을 거두면서는 찬송이 다 흘러나왔다. 참 신기하기도 하지. 참깨 역시 비슷한 시기에 파종하였는데, 한 달여는 지난 뒤에 심었어야 했다고 이 역시 경험 많은 농사꾼들로부터 한 소리 들었던 터였다. 그러나 서툰 솜씨에도 풍성하게 깨를 얻었다. 우연의 일치였겠지만 산출하여 묶어낸 깨단이 구신약 성서의 권수와도 같은 66뭇이라 그 기쁨이 더했다고 한다. 자연이 생명을 통해 주는 넉넉한 사랑에 취하여 김교신은 절로 찬송을 불렀다.

 

천연(天然)의 법칙은 인후(仁厚)하다. 기술의 저역함도, 시기의 대차함도 과대한 문제는 아닌 듯하다. 사소한 과실로써 유위(有爲)한 청년이라도 일거에 매장하여버리려는 인간사회보다, 일분의 지각이라도 유예를 불허하는 문명인들의 교통기관보다도 자연은 관대하고 인후함이 절대한 모양이다. 천연계에 친근하며, 농사에 참여하고자 하는 소원(小願)이라도 그것을 멸시하지 않고, 저에게 실망과 부끄러움을 돌리지 않기 위하여 일부러 자연계의 법칙의 일부분을 완화하면서, 서투른 농부에게 은총을 베풂으로써 희망에는 희망으로 전진시키려는 듯하다. 이같이 하여 우리의 농사는 소규모이나 찬송은 대규모의 것이다.

 

자연이 모든 생명을 향해 베푸는 넉넉하고 품는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의 창조질서구나! 그리 감격하며 기뻐 찬송하다보니, 실로 귀하게 쓰일만한 젊은 생명조차 작은 실수 하나에 매장해버리는 인간 사회와 비교가 되었나 보다. 조금 늦었다고 버리고 떠나버리는 인간 문명의 야박함도 더욱 불편해졌다. 어디 사소한 실수뿐이랴. 어린 생명들을 양육하는 일을 천직으로 삼았던 김교신이 오늘의 21세기 ‘고용유연성’의 신자유주의적 문명사회를 보았다면 필시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을 일이다. 실수는커녕 불성실함조차 찾아볼 길 없는 젊은 생명들이 미처 사회에 ‘심겨질’ 기회도 없이 버려지는 세상이니 말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를 ‘쓰레기가 되는 삶들’이라고 명명했다. 마치 일회용 종이컵이나 플라스틱 병처럼 한 번 쓰고 버려지는 삶, 아니 아예 쓰일 기회조차 없이 ‘잉여’로 남아 있다가 영영 외면당하는 일이 오늘날 이 땅을 살아가는 다수의 젊은 생명들에게는 일상이다. 친구들과의 낭만적인 교제는커녕 혼자 먹는 점심시간조차 반납하고 시리얼 봉다리나 컵밥을 손에 들고 뛰어다니는 저 근면 성실한 생명들이 제대로 심겨질 삶의 자리가 없다. 땅에 심어주고 물 한 번 부어주고 기다리기만 해도 무럭무럭 자랄 튼튼하고 신통한 생명들인데 말이다.

 

고작 3개월 ‘쓰이고 버려질’ 인턴사원이 되기 위해 제출해야하는 서류가 어마어마하고 거쳐야하는 인터뷰와 여타 관문들이 줄을 잇는다. 그러나 정작 들어가서 하는 일은 자신이 배우고 싶은 전문 분야에 대한 경험 많은 선배들의 노하우가 아니란다. 복사하고 서류준비하고 뒷정리하고, 전문분야의 스펙을 입증한 뒤 엄청난 경쟁을 뚫고 들어와 아무나 해도 될 일을 쉼 없이 반복하다가 3개월 만에 떠나야 한단다.

 

그럼 시작부터 멋들어지고 우아한 전문직 수행을 원했냐고? 소림사에 가서 무술을 배우더라도 시작은 ‘마당쓸기’부터인 법인데, 그런 허드렛일부터 하면서 천천히 배우는 거지! 이렇게 일침을 놓는 이라면 그야말로 시절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소림사 시절이야 ‘마당쓸기’부터 시작해서 무림고수가 되기까지 스승은 자신의 전문 경험을 차근차근 하나씩 전수해주기 마련이다. 마침내는 제자가 자신을 뛰어넘는 것을 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을 때까지, 제자의 성장을 바라봐주고 기다려주고 어른이 마땅히 해야 할 필요한 역할을 ‘끝까지’ 해주는 법이다. 그러나 오늘날 인턴 사원은 3개월로 끝이다. 쓰고 버릴 소모품이다. 결코 <미생>의 오 차장이 장그래를 바라보며 따듯하게 응시했던 ‘우리 애’가 아니다. 물론 그만큼의 ‘소모품’도 못 되어보고 곧바로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생명도 부지기수다.

 

눈만 맞춰주고 물만 부어주어도 파릇파릇 새싹을 내고 초록잎을 무성하게 드리우는 것이 생명인데…. 믿어주고 기회만 주어도 스스로 피어나는 것이 생명의 법칙인데, 우리 어른들이 만든 이 세상은 어쩌려고 저 생명들에게 피어날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는가! 김교신은 뜻밖의 수확 앞에서 찬송을 불렀다지만, 나는 저 무성한 고구마 잎을 바라보다 울컥 비탄의 탄식을 쏟아놓아 버렸다.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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