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소영의 다시 김교신을 생각한다(22)
김교신이 우치무라에게서 배운 것
-「우치무라 간조론에 답하여」 1930년 -
흔히들 김교신의 스승이 ‘우치무라’라고 한다. 그 호명에 김교신도 깜짝 놀랐다. 물론 그가 우치무라의 성서연구 모임에 참석한 사실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평양신학교 기관지인 『신학지남』에 실린 우치무라 간조에 대한 글에서 ‘조선인 제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한 김교신은 기회를 빌어 자신이 우치무라를 어찌 생각하는지, 그로부터는 무엇을 배웠는지를 밝힌다.
김교신이 처음 기독교 복음을 접한 것은 1920년 4월 16일 동경 시 거리를 지나던 저녁 무렵이었다. 당시 동양선교회 성서학원에 재학 중이던 한 청년의 설교에 깊은 울림을 느꼈다. 하여 이틀 뒤 주일에 근처 교회를 스스로 찾아갔고 홀로 신약성서를 읽으며 예수의 가르침에 매료되어 갔다. 그가 세례를 받기로 결정한 것은 6월 27일, 불과 두 달 만에 ‘유교적 성실성으로 도에 이르려했던’ 젊은 지식인이 스스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하니, 말씀의 힘도 놀랍거니와 김교신의 집중력과 열정이 남달랐음은 틀림없다. 이후 복음을 더 깊이 있게 깨닫기 위해 이런 저런 책과 저널을 찾아 읽고 구독하는 가운데 우치무라의 저서와 강연을 접하게 된다. 같은 해 11월에는 우치무라를 직접 만나보기도 하였으나 그 무렵에는 오히려 ‘실망과 불만’을 가져다준 대면이었다고 회고한다.
김교신은 성실한 성결교회 회원이었다. 주일 오전 오후 예배는 물론 목요일 기도회에 열심히 출석했고, 그 때마다 깨닫게 되던 ‘약진하는 신앙의 기쁨’을 일지형식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던 그가 소위 ‘무교회’ 혹은 제도교회 바깥에서 ‘스스로’의 신앙을 추구하게 된 계기는 교회 내의 권력싸움을 보고난 뒤였다. 분쟁의 결과 온유하고 곧은 학자였던 목회자가 면직을 당하고 오히려 권모술책에 능한 이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사건을 보면서 소위 ‘제도’라는 교회에 회의를 느꼈다. 하여 한동안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하숙방에 홀로 앉아 성경을 읽고 예배를 드리고 감동을 일지에 기록하며 보냈다. 그러다가 1921년 우치무라의 로마서 강의를 듣게 되었던 거다. 강의듣기에 있어서도 김교신은 성실했다. 우치무라의 열성팬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성정이 그러했기 때문이지 싶다. 오히려 김교신은 ‘성서’의 열성팬이었다. 더 똑똑히 듣기 위해 반시간 전부터 강연장을 찾아 목소리가 가장 잘 들리는 위치에서 우치무라의 강의를 들었다. 단 하루의 결석도 없었던 김교신의 성실함은 16세기 영국의 청교도들조차 ‘형님~’ 할 일이었다.
매 강연이 진행될 때마다 김교신은 ‘자신의 마음속에 남은 것은 예수의 말씀이지 우치무라의 말씀이 아니었다’고 회고한다. 그럼에도 「우치무라 간조론에 답하여」라는 이 글의 한 중간에 김교신은 “우치무라 간조 선생은 나에게 ‘유일의 선생’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글의 시작부터 그의 논조를 따라 읽은 독자라면 다소 당황스러울 전개이다. 이렇게 밝힐 거면 ‘우치무라의 조선인 제자’라는 호명에 놀라며, 스스로 추구했던 신앙 여정이나 교회 신앙경력을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있었을까?
무엇보다 조선과 일본의 관계가 평등하지 않았던 김교신의 시절이라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신학지남』 지면을 통해 자신과 무교회 동인들에게 비판적 입장을 보였던 김인서도 물었던 질문이다. “언제 영의 말씀도 일인(日人)을 통하여 들으라 하시더냐!”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 온통 일본제국의 야만적 식민주의 아래 종속되어 있는 마당인데, 어쩌자고 영의 말씀까지 일본인을 스승삼아 가르침을 받아야 하느냐는 일침이었다. 이에 대하여 “언제 영의 말씀은 일인(日人)을 통하여서는 듣지 말라고 하시더냐!” 외치려니, 무엇보다 그 외침이 영적 종속을 의미함으로 오해받지 않도록 설명해야 했을 일이다. 서론이 그리 길었던 것은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렇게나 길고 긴 ‘해명’ 끝에 김교신은 자신이 우치무라에게서 배운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말미에 밝힌다.
우치무라식 무교회주의란 무엇인가. 내가 배운 대로는 ‘교회 밖에 구원이 있다’는 것이 우치무라식 무교회주의의 전부이다. 이 이하의 것도 아니요, 이 이상의 것도 아니다. 로마 천주교회가 ‘교회 밖에 구원이 없다’고 할 때에, ‘교회 밖에 구원이 있다’고 프로테스트한 것이 루터의 종교개혁이었고 모든 신교 교회가 구교로 퇴화할 때에 다시 한 번 ‘교회 밖에 구원이 있다’고 주창한 것이 즉 우치무라식 무교회주이란 것이다.
대전도를 하려도 시(試)하지 말고, 대기적을 행하려 말고, 오직 신명을 중히 하고, 그 말씀이면 다만 좇고, 신을 믿는 것이 곧 사업인 줄로 믿고 무위(無爲)에 유사한 생애를 보내는 것이다. … 신과 함께 걷는 생애다. 이 세상의 교회에는 칭찬받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 칭찬받는 생애다. 하나님이 깊은 것처럼 깊은 생애다. 저가 잠잠한 것처럼 잠잠한 생애다. 하나님에 거하여 자기에 충족한 생애다. 아무런 사업을 이룸이 없을지라도 감히 불만을 느끼지 않는 생애다. 또 신께서 무엇을 받지 않을지라도 저 자신을 주셨으므로 그 외 다른 것을 불요하는 생애다.
조선인, 일본인의 민족주의적 폐쇄성을 뛰어넘어 자유혼으로 교통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영일진대, 누구로부터 듣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말씀을 들었느냐 하는 것 아니겠냐는 호소다. 이 글을 쓴 것이 1930년이라는 것을 주목한다면 김교신의 이 호소는 훨씬 더 값지다. 『성서조선』 동인들이 사랑해마지않는 조국 조선에서, 그만큼 똑같이 사랑하는 성서의 복음을 깊게 심으려 했던 성서모임과 잡지출판활동을 시작한지 불과 몇 해 되지 않았던 시점이기 때문이다. 성서조선 동인들이 누구에게서 고무되었는지 따위의 편협하고 배타적인 우려는 접어두고 앞으로 우리의 생애가 어찌 전개되는지를 보라는, 김교신의 이 당당한 선포는 그와 성조 동인지 신앙인들의 일생을 이미 알고 있는 우리 ‘후배’ 신앙인들로서는 벅찬 장면이기 때문이다. 김교신과 성조지 동인들은 ‘일본식 무교회의 조선 지점’을 연 것이 아니었음을 잘 알고 있지 않나! 제도교회들이 일제의 무력 앞에 모두 무너져갈 때 의연히 복음이 준 자유혼으로 제 목소리를 내고 애국과 애족의 실천에 두려움이 없었던 이들의 행보를 우리는 기억한다. 이 글을 마치며 김교신이 사도행전을 인용하며 했던 말을 다시 곱씹어 본다. 어쩌면 사람을 온통 대립적인 두 범주로 나누고 정죄하기를 쉽게 하는 오늘날의 우리 역시 새기고 또 새겨야하는 말씀이지 싶다.
“이 사람을 상관 말고 내버려 두라. 그 뜻과 일이 사람들에게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능히 무너뜨리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할까 하노라”(사도행전 5:33).
백소영/이화여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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