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목자 예수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12)

 

BWV 244 Matthäus-Passion/마태 수난곡

No. 12 사랑의 목자 예수

 

유월절 성찬을 마친 예수와 제자들은 감람산으로 나아갔습니다. 성경에는 감람산으로 나아갔다로 쓰여 있지만 마태 수난곡은 이 구절에 공간감과 움직임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에반겔리스트가 ‘gingen sie hinaus/그들은 나와서 갔다라고 노래하기 직전을 들어 보면 오르간과 콘티누오(통주저음)의 반주가 갑자기 스타카토로 한 음씩 옥타브 위까지 빠르게 상행하는 것을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냥 갔다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수난곡에서 이 부분을 들을 때 청중들은 그들이 서두르듯 산을 올라갔음을 상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날의 영화처럼, 살아 움직이는 성경이야기를 들려줌으로 청중으로 하여금 예수의 수난에 참여토록 독려하는 것이 수난곡의 목적입니.

 

 

 

악보 에반겔리스트가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라고 노래하는 부분. 윗줄 맨 아래의 오르간&콘티누오 파트 마지막 마디에 산을 오르는 듯한 스타카토 옥타브 도약이 있다.

 

 

실제로 감람산은 예수살렘 성 동쪽에 있는 800미터 정도 높이의 산입니다. 하지만 예수살렘 성이 해발 700미터의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보기에는 100미터 남짓의 언덕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공간을 좋아하셔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면 거의 매일 밤 오르셨습니다. 철야 산기도를 하러 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쉬러 가셨습니다. 예수께는 쉼이 기도였고 기도가 쉼이었습니다. 낮에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열심히 일하셨지만 밤에는 꼭 하나님과의 조용한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누가복음 21:37

   

사랑의 목자 예수

 

감람산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배신할 제자들을 원망하고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을 양으로 바라보셨다는 것 자체가 예수 스스로 목자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수준에서 예수를 바라보지만 우리를 향한 예수의 사랑은 우리의 생각 보다 훨씬 더 깊습니다.

 

 

마태수난곡 120~21

마태복음 26:30~32

음악듣기 : https://youtu.be/BRaQm4M6r7g

내러티브

14(20)

에반겔리스트

30. Und da sie den Lobgesang gesprochen hatten, gingen sie hinaus an den Ölberg. 31. Da sprach Jesus zu ihnen:

30.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31.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대사

예수

In dieser Nacht werdet ihr euch alle ärgern an mir, denn es stehet geschrieben: Ich werde den Hirten schlagen, und die Schafe der Herde werden sich zerstreuen. 32. Wann ich aber auferstehe, will ich vor euch hingehen in Galiläam.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코멘트

15(21)

코랄

Erkenne mich, mein Hüter,

Mein Hirte, nimm mich an!

Von dir, Quell aller Güter,

ist mir viel Gut's getan.

Dein Mund hat mich gelabet

Mit Milch und süßer Kost,

Dein Geist hat mich begabet

Mit mancher Himmelslust.

나를 잘 아시고, 나를 지키시는 주님,

나의 목자여 나를 받아주소서

모든 좋은 것은 당신으로부터 왔사오니

온갖 좋은 일을 내게 베푸셨습니다

당신의 말씀은 젖과 맛난 꼴이 되어

나를 위로하셨으며

당신의 영은 나를

천상의 만족으로 채우셨나이다.

 

 

제자들로부터 배신당하고 버림받고 부인당하여 끌려가 죽임을 당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예수는 지금 제자들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마가복음 6:34)’라는 마가복음의 표현처럼 우리를 양이라고 부르신다는 것은 그 자체로 깊은 사랑과 연민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예수의 마음을 뜻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계신 그가, 그 양떼로부터 배신당할 것을 아셨던 그가, 목자 없는 양떼가 되어 유리하게 될 제자들을 걱정하여 불쌍히 여기고 계십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라고 부활하시어 갈릴리로 먼저 가시겠노라고 약속해 주신 것이지요. 놀라운 것은 바흐 시대의 신앙도 이 사랑을 깨닫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흐와 대본을 쓴 피칸더는 예수의 말씀 뒤에 다음과 같은 코랄을 연결시켰습니다.

 

나를 잘 아시고, 나를 지키시는 주님,

나의 목자여 나를 받아주소서

모든 좋은 것은 당신으로부터 왔사오니

온갖 좋은 일을 내게 베푸셨습니다.

 

함께 부르는 마태 수난곡

 

이번 시간부터 새로운 시도를 해 볼까 합니다. 마태 수난곡의 코랄을 우리말로 부르면 어떨까요? 두 번째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마태 수난곡에서 코랄은 주로 코멘트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코멘트는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접한 신자가 마음속으로 품었을 법한 내적 정서적, 신앙적 반응이라고 설명 드렸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청중으로서 수난의 이야기에 참여하는 우리들도 코멘트에 동참하며 코랄을 함께 부르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727411일 성금요일,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에서 마태 수난곡이 처음 연주 될 때에도 청중들은 코랄을 함께 따라 불렀을 것입니다.

 

마태 수난곡을 독일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번역하여 부른다는 것은 썩 권장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작품일수록 언어와 음악이 하나로 움직이며 바흐 또한 가사에 음악을 입혀 그림을 그려내듯 섬세하게 작곡했기 때문입니다. 그 좋은 예가 오늘 예수의 대사에 있습니다.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Ich werde den Hirten schlagen, und die Schafe der Herde werden sich zerstreuen”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사는 치다라는 의미의 슐라겐(schlagen)’흩어지다라는 의미의 체어슈트로이엔(zerstreuen)’입니다.

 

우선, 음악적인 악센트가 이 두 개의 동사에 맞아 떨어지면서 이 동사들의 표현은 극대화합니다. 또한 이 두 동사를 시작과 끝으로 하여 음악이 갑자기 비바체(vivace)로 빨라지고 현악기들은 목자에게 채찍질을 하고 양떼를 흐트러트리듯이 스타카토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만일 이 부분을 우리말로 옮겨 부른다면 독일어와 우리말의 어순 차이 때문에 바흐가 독일어 동사의 자리에 섬세하게 준비한 음악적 악센트의 자리에 우리말의 동사를 위치시키긴 힘들 것입니다.

 

바흐는 이렇게 가사에 음악을 그려 입히는 방식(Word painting)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 수난곡을 깊이 있게 듣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독일어와 단어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이며 그래서 매 시간마다 독일어 가사를 함께 올려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코랄만큼은 우리말로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코랄 자체에 그러한 DNA가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정을 계속해서 함께 하고 계신다면, 마태 수난곡에서 몇 개의 코랄 멜로디가 반복되어 쓰이고 있음을 눈치 챈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마태 수난곡에 쓰인 코랄 멜로디들의 작곡자는 바흐가 아닙니다. 오늘 날의 시각으로 보면 표절에 돌려막기로 보일 수 있겠지만 루터교 전통에서 이것은 매우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바흐 당시에는 음악을 누군가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을 통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했기에 음악에 있어서 표절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코랄과 콘트라팍툼

 

루터교 전통에서 코랄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종교개혁의 성공에는 코랄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코랄은 루터교의 성립과 함께 등장한 새로운 교회음악으로 루터교 음악의 핵심이었습니다. 어린이 성가대원 출신의 미성 테너였고 류트와 플롯도 능숙하게 연주했었던 루터는 음악을 신학에 견줄 하나님의 선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에서 일반 신도들은 성가대가 부르는 라틴어 다성 음악이나 사제들이 부르는 라틴어 성가를 수동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루터는 본인의 음악성과 새로운 시대의 요청을 코랄이라는 새로운 교회음악을 통해 결합시켰습니다. 일반 신도들이 익숙한 멜로디에 신학적 신앙적 핵심 내용을 담아 독일어로 함께 부르는 코랄이 탄생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코랄을 직접 부름으로써 예배에 보다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신학적, 신앙적 핵심을 마음에 새길 수 있었습니다.

 

코랄의 멜로디는 새롭게 작곡되기도 했지만, 이미 있던 선율에 새로운 가사를 붙이는 콘트라팍툼(contrafactum) 형태로 많이 만들이 졌습니다. 코랄의 선율은 그레고리오 성가, 비전례적 종교 노래, 세속 선율 또는 민요들로부터 다양하게 차용했습니다. 예를 들면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동해물과 백두산이’, ‘천부여 의지 없어서’, ‘오랫동안 사귀었던등의 가사로 불러진 것처럼 말이지요. 오늘의 코랄 선율 역시 원래는 세속적 사랑노래였습니다.

 

한스 레오 하슬러가 1600년 경 작곡하여 유명해진 내 마음 떨려오네/Mein G'müt ist mir verwirret’의 선율에 루터교 목사요 신학자인 파울 게르하르트가 오 피투성이 상하신 그 머리/O Haupt voll Blut und Wunden’라는 가사를 붙였고 1680년에는 바흐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던 디트리히 북스데후데가 우리 주님의 몸/Membra Jesu Nostri’이라는 작품에서 주님의 상하신 머리를 표현하는데 이 멜로디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바흐는 이 멜로디를 마태 수난곡에서만 총 여섯 번 사용합니다. 마태 수난곡의 메인 멜로디라고도 할 수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바흐의 작곡으로 알고 있었지만 나중에 이러한 역사가 밝혀지게 되었고 그래서 찬송가 145장 오른편에는 이례적으로 작곡자 이름에 하슬러와 바흐의 이름이 함께 오르게 되었습니다.

 

, 그럼 오늘 소개해 드린 부분을 처음부터 들으시다가 이 코랄이 울려 퍼질 때 우리말로 함께 불러 보면 어떨까요? 코랄 멜로디에 맞춰 부를 수 있도록 가사를 다듬어 보았습니다. 참고로, 음악은 윗부분에 있는 가사 해석표의 음악듣기링크를 통해 리히터 58년 녹음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합창단의 노래처럼 가사 하나하나가 마음에 사무치도록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내 목자이신 주님 날 지켜 주-소서

날 먹여 주시시고- 날 채워 주-셨네

생명의 말씀으로 날 먹여주시고

하늘-의 기쁨으로 날 채워주셨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또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예수의 잡히심이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위한 교리적 필연이었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편협한 생각으로 우리의 신앙과 삶을 매우 협소하게 합니다.

 

예수는 눈앞에 놓인 사랑하는 양들의 위험을 두고 달아 날 수 없으셨습니다. 눈앞의 놓인 양들의 위험과 양을 향한 즉흥적 사랑을 위해 그는 죽음을 향하여 뛰어드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은 영원하고 변함없기에 그 즉흥적 사랑이 십자가의 사랑이 되었으며 영원하고 필연적인 사랑이 된 것이지요. 이 마음이 바로 우리를 향한 예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사랑의 목자’, ‘선한 목자라고 부릅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하늘결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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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

하루 한 생각(59)


허물


몇 달째 공사가 길 건너편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제법 소음에도 익숙해졌다. 안식관을 새로 짓고 있는 것이다. 감리교에서 목회를 하다 은퇴한 여교역자들을 위한 공간, 낡은 건물을 헐어내고 새로 짓기 시작했다.





공사를 시작하기 전, 건물 뒤편 언덕에 있던 나무들을 거반 없애고 말았다. 톱으로 자르기도 했고, 포클레인으로 쓰러뜨리기도 했다. 제법 큰 나무들로 어울렸던 언덕이 휑한 경사로 남았는데, 비가 오면 무너질까 싶었던지 널따란 청색 포장으로 덮어 이래저래 흉물스럽다.


그래도 경계의 끝, 언덕 꼭대기 부분의 몇 나무는 남겨두었다. 종종 까치며 직박구리와 같은 새들이 가지 끝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본다. 사람의 안식처를 만드느라 새들의 안식처를 베어버린, 부지중에 무지함으로 저지르는 인간의 허물이 서너 그루의 나무로 서 있다.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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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와 전쟁

하루 한 생각(57)


전투와 전쟁


논쟁을 일삼는 수도자들을 꾸짖으며 수도원장은 말한다.


“논쟁에서 이기는 것은, 전투에서는 이기고 전쟁에서는 지는 것과 같다.”


논쟁에서 이기는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다.
이겨도 지는 것이다.
더 소중한 것을 잃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끝까지 전투에서 이기려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전쟁의 승패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눈앞의 전투를 이기는 데만 급급하다.


원수가 같은 배에 탔다고 배에 구멍을 낼 수는 없다.
그랬다간 모두가 죽는다.


그런데도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서 배에 구멍을 내는 이들이 있으니 딱하다.

전투에서는 이기고 전쟁에서는 지는, 기가 막힌 패배!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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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씨앗

하루 한 생각(55)

 

꿈꾸는 씨앗

 

1985년이었으니 얼추 35년 전의 일이다. 정릉에서 멀지 않은 미아중앙교회에서 1년간 교육전도사로 지낸 적이 있다. 토요모임에 모이는 학생들에게 매주 한 편씩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콘크리트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라는 망치를 들기로 했다. 워낙 벽이 두꺼워 아무 일도 없을지, 소리만 낼지, 그러다가 금이 갈지, 무너질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일이다 싶었다. 아마도 동화를 그 중 많이 썼던 시기는 그 때일 것이다. 내 목소리가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을 땐 동화를 썼으니까.

 

 

 

 

정릉교회 목양실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면 사방이 아파트다. 병풍도 저런 병풍이 없다.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만 해도 북한산이 눈앞에 선명했고, 봄이 되면 붉은 진달래로 눈이 부셨다는데, 산과 꽃을 아파트 숲이 가로막고 있다.

 

주보를 다시 만들기로 했다. <꿈꾸는 씨앗>이라 이름을 정했다. 주보 속에 이야기를 담자, 이야기가 샘물처럼 솟아, 냇물처럼 흘러, 마침내 유장한 강물로 흘러 세상을 적시도록 하자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갈수록 견고해지는 콘크리트 세상, 그럴수록 이야기를 씨앗처럼 심으며 가만히 꿈꾸는 씨앗을 꿈꾸기로 한다.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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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과 사랑

하루 한 생각(53)

 

상상력과 사랑

 

우리가 보는 달은 달의 한쪽 얼굴뿐이라 한다. 달의 자전시간과 공전시간이 지구와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세상에, 지금까지 인간이 본 달이 달의 한쪽 얼굴뿐이었다니!

 

중국 우주선 창어4호가 달의 뒷면에 내렸다.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 한다. 달의 이면이 미답의 땅으로 남았던 것은 통신 문제 때문이었다. 그곳에서는 지구와의 통신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런 난제를 극복한 중국의 과학 발전이 놀랍게 여겨진다. 통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췌치아오라는 위성을 발사했고, 그 위성이 지상 관제소와 창어4호 사이의 통신을 중계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한다.

 

달의 이면에 발을 디딘 것이 어디 과학의 발전뿐이었을까? 그런 성과를 얻은 데에는 과학 못지않게 중요한 부분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다름 아닌 상상력이다.

 


‘창어’(嫦娥)라는 이름은 중국 설화에 나오는 달의 여신에서 따온 것이며, ‘췌치아오’는 ‘오작교’(鵲橋)를 의미한다. 국제천문학단체인 국제천문연맹(IAU)은 창어4호가 착륙한 곳의 지명을 ‘스타치오 톈허’로 공식 승인했다. ‘스타치오’(Statio)는 라틴어로 ‘장소’라는 의미이고, ‘톈허’(Tianhe)는 ‘은하수’를 나타내는 중국어 ‘천하’(天河)에서 온 것이었다. 중국으로서는 인류 최초로 첫 발을 내딛은 곳에 자기 말로 된 이름을 붙였으니, 그것이야말로 꿈의 결실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 우리가 보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은 그의 한 면에 불과한 건 아닐까? 한쪽 면을 보면서 그것을 그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아직도 모르고 있는 숨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건 아닐까?

 

몰랐던 마음에 닿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 있을 것이다. 상상력과 사랑이다.


지금까지 내가 본 것을 전부라 여기지 않고 사랑에서 비롯된 상상력으로 다가갈 때,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사랑으로 다가갈 때, 마침내 우리는 지금까지 몰랐던 미답의 마음에 닿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달의 이면에 닿아 자기 말로 그 땅을 명명한 창어4호처럼.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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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하기

하루 한 생각(54)


무시하기


죽어가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기 위해 가시던 예수님의 발걸음은 멈춰 서고 만다. 혈루증 앓던 여인이 옷자락을 붙잡았고, 순간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몸으로 안 예수님이 옷에 손을 댄 여인을 찾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는 동안 전해진 소식이 있었으니,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딸이 죽었으니 더 이상 수고할 필요가 없어지고 만 것이었다. 더 이상 수고할 필요가 없다는, 오실 필요가 없다는 말을 곁에서 들은 예수님은 그런 말을 듣고 절망에 빠졌을 회당장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곁에서 듣다’는 말 속엔 염두에 두어야 할 뜻이 담겨 있다.
‘들어 넘기다, 무시하다, 묵살하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했다.
딸이 죽었으니 더 이상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을 무시한다.
전해진 말을 듣고 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전해진 말 때문에, 알려진 상황 때문에 낙심하고 절망할 때가 있다.


때로 믿음은 무시할 것을 무시하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무시할 것을 무시할 때 절망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들은 말을 무시하지 않았으면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 그 말을 무시한 예수님을 통해 일어났다고 야이로의 딸은 증언을 한다.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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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생각(52)

 

어떠면 어떠냐고

 

날이 흐리거나 마음이 흐리면 촛불을 켠다.
촛불은 어둑함과 눅눅함을 아울러 지운다.


겨울이 다 가도록 드물던 눈이 새벽부터 내리던 날,
책상 위에 촛불을 밝혔다.



 

사방 나무들이 울창하게 선,
촛불을 켜면 숲을 비추는 달빛처럼 빛이 은은한 불빛이
얼마간 타다가 꺼지고 말았다.

초가 다 탄 것이었다.


초를 바꾸기 위해 다 탄 초를 꺼내보니 형체가 기이하다.
이리저리 뒤틀려 처음 모양과는 거리가 멀다.




 

다 탄 초가 넌지시 말한다.
끝까지 빛이었으면 됐지
남은 모양이 어떠면 어떠냐고.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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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생각(51)

 

기투와 비상

 

쏟아진다.
막힘없이 쏟아져 내린다.
급전직하(急轉直下),
아찔한 곤두박질이다.

 

목양실 책상에 앉아 일을 하다보면 뭔가가 창밖으로 쏟아질 때가 있다.
따로 눈길을 주지 않아도 그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잠깐의 흐름이 창문을 통해 전해지기 때문이다.


빛인지 그림자인지 분간하기는 힘들지만,

폭포수가 떨어지듯 뭔가 빗금을 긋고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빗금을 따라가면 어김없이 그 끝에 참새들이 있다.

 

 

 

 

비단 떨어질 때만이 아니다.
솟아오를 때도 마찬가지다.
빛인지 그림자인지가 수직상승을 한다.


그것은 위로 긋는 빗금이어서 잠깐 사이에 창문에서 사라진다.

참새들이다.


목양실은 2층에 있어 바로 위가 옥상이고, 아래층엔 긴 담벼락과 소나무가 있다.
옥상에 있던 참새들이 한순간 몸을 던지는 것이다.
그것은 날기보다는 뛰어내림에 가깝다.
날개가 있는 것들은 얼마든지 허공에 자신을 내던진다.

 

참새들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는 참새들만 안다.
이따금씩 공터나 소나무, 혹은 소나무 그늘 아래에 모습을 보일 뿐이다.
자신들의 시간에 누군가 끼어들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듯,
종종 활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옥상 위로 솟아오른다.

 

그런 참새들을 눈부시게 바라본다.
두렴 없이 나를 내던지는,
저만한 기투(企投)가 어디 있을까 싶어서.
시공간을 단번에 꿰뚫는,
저만한 비상(飛上)이 어디 흔할까 싶어서.  

 

-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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