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62)

 

모든 아픔을 고쳐 주신 주님

 

예수께서 온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며,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백성 가운데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다. 예수의 소문이 온 시리아에 퍼졌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과 고통으로 앓는 모든 환자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과 간질병 환자들과 중풍병 환자들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그리하여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으로부터,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라왔다.(마태복음 4:23-25)

 

“세상 모든 근심을 우리가 다 감당할 순 없지만 병들어 서러운 마음만은 없게 하리라.” 기독교 정신으로 운영되는 어느 병원의 모토이다. 병자는 누구나 다 서럽다. 가벼운 질병이야 며칠 불편하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서러움은 두려움을 동반한다. 큰 병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과 치료비 부담, 경력 단절과 사회적 소외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병자 치유이다. 나환자, 보지 못하는 사람, 듣지 못하는 사람, 중풍병 환자, 열병에 시달리는 사람, 한 편 손 마른 사람들이 예수님과 만나 회복되는 기적을 경험했다. 많은 이들이 그런 치병 사건이 사실인가에 집중한다. 그것의 사실성 여부가 곧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입증하는 관건이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관점을 조금 달리해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 당시에는 왜 그리도 많은 환자들이 있었을까? 변변한 의료 기관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1세기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다수는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로마 제국과 제국에 부역하는 무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가난했다. 기근과 가뭄, 그리고 가혹한 세금 정책으로 인해 그들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고,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걸린 이들이 많았다. 달걀 1개에 1데나리온을 호가했다니 단백질 섭취는 언감생심이었을 것이다. 영양실조는 면역력 약화로 이어지고, 면역력 약화는 질병으로 이어졌다. 질병은 또한 사회적 소외를 낳았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병이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 생각해지만 예수님은 달랐다. 구조적인 모순이 빚은 고통을 꿰뚫어보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병에 시달리는 이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당신의 아픔으로 수용했다. 기적은 바로 그런 깊은 공감에서 움터 나왔다. 정신의 통전성을 유지하지 못할 만큼 영혼에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들, 맑은 영이 아니라 더러운 영의 지배를 받는 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님은 귀신을 꾸짖어 내쫓으심으로 사람들이 주체적 삶을 살도록 도우셨다.

 

그러나 회복되어야 하는 것은 육신만이 아니었다. 세상에 대한 원망 혹은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창조적인 삶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주님은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자기 삶이 얼마나 소중한 선물인지를 일깨우고, 하나님의 통치에 동참하도록 사람들을 부르셨다. 사람들은 밥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먹고 산다. 하늘나라에 대한 선포만으로 주님을 좇는다 말할 수 없다. 기적적인 치유의 능력을 발휘하진 못한다 해도 타자에 대한 공감적 배려를 익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병든 세상을 치유하려는 주님의 일에 동참할 수 있다.

 

*기도*

 

하나님, 건강할 땐 몰랐습니다. 지금 병들어 신음하는 이들의 두려움과 서러움을 말입니다. 위로의 말을 건네면서도 건성일 때가 많았습니다. 건강을 잃고 두려움에 휩싸일 때 비로소 세상의 아픔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사야는 고난 받는 종의 노래에서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고 노래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고백인지요? 주님은 세상의 모든 아픔을 앓고 계십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일으켜 세웁니다. 이제 우리도 주님의 손이 되어 서러운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겠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무정한 마음을 도려내시고, 섬세한 사랑의 마음을 심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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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21)

 

지뢰 대신 사람이 
   

 

의미 있는 시간에는 자연스레 사람들의 마음이 모이는가 보다. ‘4·27 판문점 선언’ 1주년을 많은 이들이 기억했다. 그것은 나라와 국경 종교를 초월하는 일이었다. 평화를 갈구하는 마음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공동선(共同善)임을 확인하게 된다.

 

여러 가지 뜻 깊은 행사들이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DMZ 평화인간띠잇기였다. 한반도의 서쪽 강화에서 동쪽 고성에 이르는 500km의 DMZ 마을길에 서로가 서로의 손을 잡고 서서 평화를 기원하는 행사였다. 

 

매우 뜻 깊은 행사라 여겼지만 참여를 못했다. 교우들께도 참여를 권하지 못했다. 교우 가정에 결혼식이 있었다. 참여하진 못했지만 마음으로 위안을 삼은 것이 있었다. 2년 전 여름, 고성에서 임진각까지의 DMZ 길을 혼자 걸은 적이 있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폭우 속과 화살처럼 쏟아져 내리는 뙤약볕 아래를 열하루 동안 한 마리 벌레처럼 걸어갔다. 분단의 땅에 살면서 아픔과 상처로 갈라진 내 나라를 위해 몸으로 기도하고 싶었다.

 


DMZ를 걸으며 씨앗처럼 마음에 두었던 말이 있었다. ‘호다’라는 말이었다. 예수님의 속옷은 ‘호지’ 않은 옷, 뜻밖에도 ‘호다’라는 말을 나는 성경에서 만났다. 요한복음 19장 23절이었다. ‘호다’는 헝겊을 여러 겹 겹쳐 대고 땀을 곱걸지 않은 채 성기게 꿰매는 것을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수님의 호지 않은 속옷을 예수님의 마음이 담긴 교회는 어떤 경우에도 나누어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이해를 했다.

 

DMZ 인근 마을을 따라 걸음을 옮기며 갈라진 이 땅이 하나 되기를 기도했다. 아픔과 상처의 자리에 평화 임하기를, 내가 걸어간 걸음이 이 땅을 호는 한 땀이 되기를 원했다.  

 

 

 

 

그때 그 길을 걸을 때 가장 흔하게 눈에 띄었던 것이 ‘지뢰’ 경고판이었다. 붉은색 바탕의 역삼각형 표지판에 지뢰라 쓰인 경고문이 철조망을 따라 내내 이어져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뢰라 쓰인 경고판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손을 잡았다. 맞다, 진정한 평화는 좁쌀처럼 깔린 지뢰를 통해서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손을 마주잡을 때 찾아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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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61)

 

생명 중심적 사고

 

마침 바로의 딸이 목욕을 하려고 강으로 내려왔다. 시녀들이 강가를 거닐고 있을 때에, 공주가 갈대 숲 속에 있는 상자를 보고, 시녀 한 명을 보내서 그것을 가져 오게 하였다. 열어 보니, 거기에 남자 아이가 울고 있었다. 공주가 그 아이를 불쌍히 여기면서 말하였다. “이 아이는 틀림없이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구나.” 그 때에 그 아이의 누이가 나서서 바로의 딸에게 말하였다. “제가 가서, 히브리 여인 가운데서 아기에게 젖을 먹일 유모를 데려다 드릴까요?” 바로의 딸이 대답하였다. “그래, 어서 데려오너라.” 그 소녀가 가서, 그 아이의 어머니를 불러 왔다. 바로의 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아이를 데리고 가서, 나를 대신하여 젖을 먹여 다오. 그렇게 하면, 내가 너에게 삯을 주겠다.” 그래서 그 여인은 그 아이를 데리고 가서 젖을 먹였다. 그 아이가 다 자란 다음에, 그 여인이 그 아이를 바로의 딸에게 데려다 주니, 공주는 이 아이를 양자로 삼았다. 공주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졌다” 하면서, 그의 이름을 모세라고 지었다.(출애굽기 2:5-10)

 

“1947년 봄/심야(深夜)/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의 바다/이남(以南)과 이북(以北)의 경계선(境界線) 용당포(浦)//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 가고 있었다./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스무 몇 해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水深)을 모른다.” 김종삼 시인의 ‘민간인’이다. 숨죽인 채 물살을 가르는 순간 터진 아기의 울음소리, 사람들은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힌다. 발견되는 순간 그들 모두 수장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피눈물을 삼키며 아기를 물에 묻는다. 세월이 지나도 용당포 가까운 그곳의 수심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한이 서린 그곳의 깊이를 누가 알 수 있을까?

 

레위 가문의 한 여인이 아들을 낳았다. 잘 생긴 그 아들을 차마 죽일 수 없어서 여인은 석 달 동안 남몰래 아기를 길렀다. 그러나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여인은 갈대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아기를 거기 담아 강가의 갈대 사이에 놓아두었다. 그 아이의 누이는 멀찍이 서서 아이가 어떻게 되는지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침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강가로 나왔다가 갈대 숲 속에 있는 상자를 보고는 시녀를 시켜 가져오게 하였다. 울고 있는 아기를 본 공주는 그 아이가 히브리 사람의 아이임을 알아보았지만 그를 못 본 체 할 수 없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맹자가 말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그를 사로잡았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야말로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마음이다.  그 아이가 비록 바로가 제거하려는 히브리인의 아이라 해도 아이를 죽음의 자리에 방치하는 것은 차마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애틋하고 안타까워서 감히 어찌’라는 뜻의 부사 ‘차마’는 늘 부정어와 결합하여 의미를 강화한다. 차마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차마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공주가 늘 인종이나 신분을 뛰어넘는 보편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무력하기 이를 데 없는 아이가 공주의 가슴 속에서 따뜻한 인간애를 이끌어내고 있다. 강함보다 약함이 힘이 셀 때가 있는 법이다. 그때 동생의 운명을 지켜보다 아이의 누이가 나서서 바로의 딸에게 말한다. “제가 가서, 히브리 여인 가운데서 아기에게 젖을 먹일 유모를 데려다 드릴까요?”(출2:7) 공주가 그렇게 하라고 하자 아이의 누이는 그 아이의 엄마를 불러 왔다. 숨어서 아기에게 젖을 물리던 여인은 이제 떳떳하게 젖을 물릴 수 있게 되었다.

 

제도와 권력이 만들어놓은 철벽을 여인들이 가볍게 무너뜨리고 있다. 다른 것 없다. ‘차마’ 생명을 포기할 수 없었던 마음이 이루어낸 기적이다. 무한 경쟁의 전장에 내몰리는 이들일수록 생명에 대해 무감각해진다. 이 사건에 연루된 여인들은 생명 중심적 사고야말로 하나님의 통치의 핵심임을 삶으로 증언하고 있다. 

 

*기도*

 

하나님, 열매를 많이 따려거든 전지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늘 처리해야 할 많은 일들에 에워싸인 채 살아가느라 허둥댑니다. 복잡하게 얽힌 삶이 무겁기만 합니다. 마음은 점점 굳어지고, 어지간한 자극에도 반응할 줄을 모르고 삽니다. 세상에 만연한 아픔을 보고는 잠시 혀를 차기도 하지만, 곧 잊어버리고 맙니다. 생명이 속절없이 파괴되는 현실을 보면서도 모른 체 외면하곤 했습니다. 주님, 우리 속에 참 사람다운 따뜻함을 일깨워주십시오. 생명을 지키고 풍성하게 하는 일에 기꺼이 동참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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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20)

 

 진면목(眞面目) 
   

 

본디 그대로의 참된 모습이나 내용을 진면목(眞面目)이라 한다.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누군가의 진면목을 보게 되는 순간은 많지 않다. 본다고 본 것이,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누군가의 겉모습이나 일부일 때가 많다.


다른 사람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때가 있다고 한다. 함께 여행을 할 때, 밥을 먹을 때, 도박판에 앉았을 때, 위급한 일을 만났을 때라는 것이다. 그렇겠다 싶다. 그런 일을 만나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비로소 알 수 있을 것 같다.


탈무드엔 사람을 평가하는 세 가지 기준이 있다. 키소, 코소, 카소가 그것이다. ‘키소’는 돈주머니를 말한다.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그 사람의 가치를 일러준다는 것이다. ‘코소’는 술잔이다. 무엇을 어떻게 즐기는지를 보아 그를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카소’는 분노다.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다스리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충분히 일리 있는 기준이다 싶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는 것은 의외로 단순한 것인지도 모른다. 눈물과 웃음일 수 있다. 언제 어디서 울고 웃는지를 보면 그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함께 울 줄도 웃을 줄도 모르는, 어떻게 웃어야 하고 울어야 할지를 모르는 이들이 있다. 그런 이들은 웃어도 어색하고 울어도 어색하다. 울어야 할 때 웃고, 웃어야 할 때 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당황스럽다. 
 


 

어제는 정릉교회 교사 야유회가 있었다. 그럴듯한 이름 대신 그냥 ‘야유회’(野遊會)라 명한 것이 담백했다. ‘들놀이를 벌이는 모임’, 거룩한 이들은 교사들의 모임을 두고 야유회가 뭐냐고 야유를 할지 몰라도, 오히려 시원하게 다가왔다.


허름한 건물 옥상 위에서 모임이 열렸다. 내게는 루프탑 모임이라는 이름이 낯설었는데, 그야말로 공간의 재발견이었다. 옥상은 주변에 폐를 끼칠 만한 것이 없다면 얼마든지 소용가치가 있는 공간이었다. 하늘은 물론 사방이 탁 트인 개방감은 다른 곳에서는 누리기 힘든 자유로움으로 다가왔다.

 

잘 안다고 생각했던 이들의 새로운 모습들을 보았다. 아니 저 사람이 저런 사람이었어, 깜짝 놀라게 되는 순간들이었다. 마침 그 자리는 5년 여 함께 했던 사람, 막 목사 안수를 받고 새로운 임지로 떠나는 목사 내외를 보내는 환송회를 겸한 자리였다. 따뜻한 웃음과 애써 참는 눈물들, 어쩌면 저런 모습이 저 사람의 진면목 아닐까 싶었다.


눈물이나 웃음으로 누군가의 진면목을 만나는 것은 소중하고 고마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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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19)

 

 설교와 썰교
   

목사로 살다보니 늘 설교를 해야 하고, 이따금씩은 다른 이의 설교를 듣게 된다. 목사에게 설교는 평생 이어가야 할 마음의 씨름일 것이다. 설교자로 살며 누군가의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이다. 마른 땅에 비 내리듯, 사막에 이슬 내리듯 듣는 말씀이 마음을 적실 때가 있다. 따뜻한 위로와 선한 격려로 다가와 마음을 추스르게 할 때면 말씀이 가진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몰랐거나 무감했지만 내가 잘못 살았구나, 화들짝 놀람으로 깨닫게 만들 때면 말씀이 가진 힘을 새삼 확인하기도 한다.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말씀이 공허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말씀에서 길어 올린 것이 아닌 수박 겉핥기식의 가벼움, 뻔한 공식과 같은 적용, 이야기를 할 때마다 ‘的’ ‘的’ 하지만 ‘쩝, 쩝’으로 다가오는 자기 과시, 본문과 상관없는 개인적인 단상 등 말씀을 말씀되게 하는 것보다는 공허하게 하는 이유가 더 많지 싶다.


빠뜨릴 수 없는 이유가 또 한 가지 있다. 말씀과 말씀을 전하는 사람과의 거리감이다. 구구절절 말씀은 옳다. 틀린 게 없다. 교과서에 실어도 좋을 만한 훌륭한 내용이다. 하지만 그것이 말씀을 전하는 이의 삶과 상관이 없다 여겨질 때, 아뜩한 거리가 느껴질 때, 말씀은 한없이 공허하게 다가온다.

 

신학을 배우던 시절, 과목 중에는 설교학이 있었다. 첫 번째 강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나원용 목사님으로 기억하는데, 목사님은 우리에게 설교가 무엇인지를 물으셨다. 몇 몇 대답들이 이어졌는데, 지금도 남아 있는 대답이 있다.


“설교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설교’이고 다른 하나는 ‘썰교’입니다.”


우린 모두 큰 소리로 웃었다. 하지만 뼈 있는 대답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설교’와 사람의 말을 전하는 것은 ‘썰교’를 동일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묻는 마음이 가볍지 않다. 나는 지금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일까, ‘썰교’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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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60)

 

시민 불복종 운동

 

한편 이집트 왕은 십브라와 부아라고 하는 히브리 산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너희는 히브리 여인이 아이 낳는 것을 도와줄 때에, 잘 살펴서, 낳은 아기가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 두어라.” 그러나 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으므로, 이집트 왕이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하지 않고, 남자 아이들을 살려 두었다. 이집트 왕이 산파들을 불러들여, 그들을 꾸짖었다. “어찌하여 일을 이렇게 하였느냐? 어찌하여 남자 아이들을 살려 두었느냐?” 산파들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운이 좋아서,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불어났고, 매우 강해졌다. 하나님은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보시고, 그들의 집안을 번성하게 하셨다.(출애굽기 1:15-21)

 

요셉이 세상을 떠난 후 야곱 일가족의 삶은 매우 불안정하게 변했다. 그들의 수가 늘어나자 바로는 그들이 사회 불안을 야기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러한 불안 자체가 권력의 폭력성을 반증하는 것이다. 바로는 그들을 면밀히 감시하는 한편 그들을 억압하는 정책을 시행한다. 곡식을 저장할 목적으로 비돔과 라암셋을 세울 때 그들을 동원했다.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지만 그들은 오히려 수가 더욱 불어나고 자손이 번성하였다.

 

바로는 히브리 산파인 십브라와 부아를 불러 히브리 여인이 애 낳는 것을 도와주되 낳은 아기가 아들이면 죽이고 딸이면 살려두라고 명한다. 일종의 인종 말살 정책을 시행하고자 했던 것이다. 바로가 기대고 있던 명분은 ‘제국의 안위를 위하여’였을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에게 생명은 존엄하지도 신비하지도 않다. 언제든 필요에 따라 제거할 수도 있는 대상일 뿐이다.

 

 

 

 

바로는 히브리 산파들이 자기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권력은 명령과 실행의 틈 없는 일치를 지향한다. 하지만 산파들은 ‘죽음-기계’가 되라는 왕의 지엄한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이것은 일종의 시민 불복종 운동으로 체제의 입장에서는 매우 엄중한 도발행위이다. 왕은 두 여인을 불러 명령대로 수행하지 않은 것을 꾸짖는다. 그 때 산파들은 “히브리 여인들은 이집트 여인들과 같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운이 좋아서,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도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립니다.”(출애굽기 1:19)라고 대답한다. 해학이다. 바로는 웃음거리가 되었다. 

 

성경은 여인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생명의 잉태와 출산이 지속적인 창조의 과정임을 여인들은 잘 알고 있었기에 차마 태어난 아기들을 죽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인간성에 반하는 행위를 거절하였다는 의미에서 십브라와 브아는 성서판 ‘안티고네’라 할 수 있다.

 

비극작가 소포클레스의 주인공인 안티고네는 반역자들의 시체를 수습하는 자는 처형하겠다는 크레온 왕의 포고령을 무시하고 내전 중에 사망한 오빠들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왕의 법에는 어긋나지만 하나님의 법에 합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안티고네는 우리에게 어느 법을 따를 것이냐고 묻고 있다. 안티고네는 하나님의 법을 따랐고 그 결과 안티고네는 결국 죽고 만다.

 

반면 히브리 산파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집안이 번성하는 복을 누린다. 하나님은 죽은 자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들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생명 중심적 사고를 하는 이들 편에 서 계신다. 생명을 소모품처럼 취급하는 권력은 내세우는 명분이 어떠하든 악이다. 연약한 자들이 가장 강력한 자의 권력의 토대를 뒤흔들 수도 있음을 두 산파는 보여주고 있다.

 

*기도*

 

하나님, 십브라와 브아는 어떻게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었나요? 왕의 명령을 거절하면서도 두 여인은 비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바람처럼 가볍고, 햇살처럼 맑은 영혼으로 권력의 억압에서 벗어났습니다. 생명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 노골적으로 누군가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이들은 없지만 사람들을 죽음의 벼랑으로 내모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부디 우리가 그 죽음의 하수인이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생명 중심의 사고를 하는 참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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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18)

 

 소임(所任)에 대하여

 

지금 나는 담임목사다. 교회의 규모에 따라 함께 일하는 이들이 있다. 부목사도 있고, 수련목회자도 있고, 심방 전도사도 있고, 운전 관리 사무 등을 맡은 몇 명의 직원들도 있다. 담임목사는 행정 책임자이기도 해서,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계획하고 확인하고 지시하고 조율하는 일도 해야 한다.


설교나 기도 못지않게 행정이 어렵게 느껴질 때가 있다. 교회 일도 사람이 모여서 하는 것, 제각기 성향이 다른 이들이 모이기 때문이다. 그 중 어려운 것이 각자가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성향을 조율하는 일이지 싶다.

 

젊은 시절 몇 몇 교회에서 전도사 생활을 하며 누가 시켜서 일하기보다는 자발적으로 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담임 목사가 되어서도 다른 누군가에게 일을 시키는 것을 가능하면 삼가려 한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이해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시켜서 하고, 혼나서 일하는 것은 뻔한 한계가 있는 법, 무모한 꿈을 꾸며 창조적으로 일하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실은 그것이 쉽지가 않다. 편하게 대하면 쉽게 대하려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엄한 사람에게도 저랬을까 싶은, 가벼운 처신을 볼 때면 마음이 아프다. 함께 지내며 내 성품을 알게 된 장로님들이 조심스럽게 조언을 할 때도 있다. 직원들을 엄하게 대하면 좋겠다고, 일을 빡세게(!) 시키면 좋겠다고, 그럴 때면 빙긋 웃고 만다.

 

어제는 우연히 이웃교회 이야기를 들었다. 부교역자가 얼마 버티지를 못하고 교회를 떠난다는 것이었다. 밤 12시 전에 퇴근을 하면 다행, 잠깐 눈을 붙이고는 또 다시 새벽기도회에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그렇게 많담 싶기도 하고, 그렇게 많은 일을 시키는 것도 능력인가 싶으면서, 그것은 일종의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함께 일하던 수련목회자가 목사안수를 받았다. 안수를 받자마자 다른 교회 부목사로 임지를 옮긴다. 함께 했던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래도 둥지 속의 새를 세상으로 내보내는 심정이었다. 그런 마음이 들어 안수를 받던 날 아침, 짧은 글을 통해 두 가지를 당부했다. 성실과 겸손이었다.


성실은 열심과는 다르다. 오히려 정성에 가깝다. 겸손은 목회자가 가져야 할 바탕 중의 바탕, 권위는 내가 만들어 내거나 지키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겸손에 대한 교우들의 존경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겸손은 무엇보다도 삼가는 것이다. 삼갈 것을 삼가는 것은 여간 깨어있지 않으면 어렵다. 성실과 겸손이 앞으로 목사로서 끌어야 할 수레의 두 개의 바퀴가 되기를 부탁했다.  

  

훈수 두듯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무엇 어렵겠는가, 후배에게 들려준 말 앞에서 나를 돌아보며 ‘소임’(所任)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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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59)

 

전리품보다는 자유를

 

교만에는 멸망이 따르고, 거만에는 파멸이 따른다. 겸손한 사람과 어울려 마음을 낮추는 것이, 거만한 사람과 어울려 전리품을 나누는 것보다 낫다.(잠언 16:18-19)

 

평시에는 말이 공손하고 정중하지만 자기에 대한 다른 이들의 존경과 감사의 표현이 기대에 못 미칠 때 거칠게 자아를 드러내는 이들이 있다. 기분 내킬 때는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갈등 상황이 노정될 때면 늘 자기 권위를 내세우는 이들이 있다. 겸손이란 짐짓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분수를 알고 그것을 지킬 줄 아는 분별력과 연결된다. 거짓 겸손은 역겹다. 차라리 노골적인 오만이 견디기 쉽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등장하는 페르시아 왕 크세르크세스는 폭풍 때문에 그리스 공략이 지체되자 포스포루스 해협을 채찍으로 치게 하고, 그 속에 차꼬를 던져 넣으라고 지시한다. 자연까지도 자기 아래 있다는 오만함의 표현이다. 히브리의 지혜자는 “교만에는 멸망이 따르고, 거만에는 파멸이 따른다”(잠언 16:18)고 말한다.

 

교만은 ‘잘못된 높임에 대한 욕구’이며, 자기 분수를 지키려 하지 않는 영혼의 질병이다. 교만한 이들은 자기의 탁월함에 도취되어 다른 이들을 아래에 두려고 한다. 그런 교만은 결국 멸망으로 귀결되고 만다.

 

교만(驕慢)이라는 한자는 말을 탄 모양을 연상시키는 ‘교’ 자와 마음이 길다는 뜻의 ‘만’ 자가 결합되어 있다. 거만(倨慢)에서 ‘거(倨)’는 다리를 꼬고 앉은 모양을 나타내는 ‘거(踞)’ 자와 동일한 의미이다. 말을 타고 바라보면 모두가 낮아 보인다. 다리를 꼬고 앉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의 태도는 아니다.

 

 

                                     류연복 판화

 

플로베르의 희곡 소설 『성 앙투안느의 유혹』은 사막에서 수행하는 수도자를 유혹하기 위해 찾아온 ‘일곱 가지 죄’의 이야기를 다룬다.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를 교회 전통은 ‘일곱 가지 죄의 뿌리’라 하여 ‘칠죄종(seven deadly sins)’이라 하는 데, 플로베르에 의하면 교만이 그 죄들의 대장 노릇을 한다. 교만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대죄이다.

 

유약한 사람들은 교만한 사람 혹은 거만한 사람의 시선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한다. 눈 밖에 나는 순간 감당해야 할 불이익이 싫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혜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겸손한 사람과 어울려 마음을 낮추는 것이, 거만한 사람과 어울려 전리품을 나누는 것보다 낫다.”(잠언 16:19)

 

겸손한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아는 사람이다. 그는 다른 이들과의 비교를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낮은 자리에 처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남이 자기를 대접해주지 않는다 하여 화를 내지도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이다. 그 눈앞에서 살기에 그는 자유롭다. 전리품을 차지하기 위해 자유를 포기하는 어리석은 이들이 있다.

 

*기도*

 

하나님, 다른 이들의 기대에 맞추어 사는 일은 늘 고단합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구할 때 우리 영혼은 누추해집니다.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영혼은 작은 바람에도 휘청거리곤 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을 숨기려고 우리는 교만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기도 합니다. 주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기의 부족함을 진심으로 인정하는 이들 곁에 머물면서, 하늘로부터 오는 자유를 누리며 살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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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58)

 

본보기가 된 사람

 

사랑하는 이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십시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뵙지 못한 사람입니다. 데메드리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받았고, 또 바로 그 진실한 삶으로 그러한 평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또한 그렇게 평합니다. 그대는 우리의 증언이 옳다는 것을 압니다.(요한삼서 1:11-12)

 

너새니얼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은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그의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넌지시 드러낸다. 높은 산이 둘러싸고 있는 분지 마을 앞에는 숭고하고 웅장하고 온화한 얼굴 모양의 바위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언젠가 큰 바위를 닮은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로부터 그 말을 들은 어니스트는 꼭 그 얼굴을 가진 사람을 만나리라는 기대를 품고 산다. 성공을 거둔 채 마을을 찾아온 부자, 장군, 정치가의 모습에 기대를 걸었지만 그들은 숭고하지도 않고 온화하지도 않고 욕망에 찌들린 모습이었다. 멋진 시를 쓰는 시인이 큰 바위 얼굴에 가장 가까웠지만 그는 시와 생활이 일치하지 않는다며 자기는 큰 바위 얼굴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문득 시인은 어니스트의 얼굴이 큰 바위 얼굴을 닮았음을 발견한다.

 

 

 

 

사람은 바라보는 것을 닮는다. 물을 오래 바라보면 물을 닮고 산을 오래 바라보면 산을 닮게 마련이다. 바라본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말이고, 사랑한다는 말은 그리워한다는 말이다. 삶은 본받음이다. 파괴할 수 없는 것을 지속적으로 바라볼 때 그것이 우리 인격이 된다. 물론 주체적으로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하고 늘 다른 이들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은 영적 나태요 타락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격 형성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사는 이들은 반드시 본이 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들이 곧 스승이다.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인 것과 같이,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고린도전서 11:1)라고 말했다. 철저하게 자기를 부정한 사람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말이다.

 

“사랑하는 이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십시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뵙지 못한 사람입니다.”(요한삼서 1:11) 간결하지만 강력한 메시지이다. 죄는 악에 이끌리는 경향성이다. 악은 자아를 세상의 중심에 놓는 것이지만, 선은 타자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누군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어떤 이끌림에 의해 선을 본받을 때 영혼에는 그늘이 생기지 않는다. 여건이 좋든 나쁘든 선을 지향하는 이들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요한은 데메드리오를 선한 사람의 모본으로 제시한다. “데메드리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받았고, 또 바로 그 진실한 삶으로 그러한 평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또한 그렇게 평합니다.”(요한삼서 1:12) 데메드리오의 어떤 면이 사람들의 호감을 산 것일까. 그와 대조되는 인물인 디오드레베는 으뜸 되기를 좋아하기에 남을 헐뜯고 공동체의 분열을 획책하곤 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데메드리오는 반대로 낮은 자리에서 섬기고, 어떤 상황에서든 화해자로서의 직무를 감당했던 것 같다. 데메드리오는 선한 일의 본보기로 기억되고 있다.

 

*기도*

 

하나님, 우리는 자기 꿈을 이룬 사람들을 부러움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들은 매사에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칩니다. 그러나 부러움이 질투로 바뀔 때도 있고, 그들과 같지 못한 자기 처지를 비관하기도 합니다. 우리 생이 무거운 것은 자기 삶을 살지 못하고 늘 남과의 비교를 통해 행복을 느끼려는 못난 버릇 때문입니다. 주님, 이제는 푯대이신 주님을 바라보며 살게 해주시고, 어떤 여건 속에서도 선을 지향하는 끈질긴 용기를 허락해주십시오. 우리 삶이 누군가의 본보기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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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17)

 

마음에 남는 찬양
   

마음에 남은 찬양이 있다.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우연히 듣게 된 찬양이었다. 찬양을 들을 때만 해도 그 찬양이 오래 남을 줄은 몰랐다.

 

지난해 집회 인도차 미국을 방문할 때였다. 신대원 강의를 통해서 만난 오치용 목사가 담임하고 있는, 시카고 인근 샴페인에 있는 예수사랑교회에서 말씀을 나누는 시간이었다. 교인의 대부분이 학생들이었고, 예배 전 찬양 또한 젊은이들이 인도를 했다. 피아노, 키보드, 드럼, 기타 등의 악기와 마이크를 잡은 여러 명의 학생들, 찬양은 조용하면서도 진지했다.

 

왜 그 때의 찬양이 마음에 남은 것일까? 몇 번 생각한 적이 있는데, 이제는 그 이유를 알겠다. 그 때와 다른 찬양의 모습을 흔하게 보기 때문이다. 박수를 치게 하거나, 두 손을 들게 하거나, 손을 가슴에 얹게 하거나, 아멘이나 할렐루야를 외치게 하는 것은 찬양의 자리에서 흔하게 보는 모습이다.

 

찬양 인도자가 감정을 고조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강요받는 감정은 어색하다. 하지만 은혜의 찬양으로 남은 그 자리에는 어떤 요구도 없었다. 기교가 사라지니 마음이 남았다. 시키지 않아도 찬양 중에 은혜가 되는 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그때의 찬양 중 인상적인 모습이 있었다. 악기를 다루는 이든, 노래를 하는 이든 어느 누구도 자기의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스스로를 낮춰 서로에게 귀를 기울였다. 행여 자신이 소리를 높여 다른 이들을 어색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조심하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것은 찬양의 가장 기본적인 것을 생각하게 했다. 찬양은 공연과 다르다. 내 목소리를, 나를 드러내는 시간이 아니다.

 

그렇지 않을 때가 있다. 경쟁하듯 소리를 내지르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된다. 악기는 악기대로 소리를 지르고, 마이크를 잡은 이들은 목청껏 노래를 한다. 그런 모습은 마치 누구의 영역이 더 넓은지를 겨루는 것처럼 보인다. 만들어내는 음량의 총합을 은혜의 총합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시간 뒤에 남는 허전함이 저들에겐 없는 것일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찬양은 또 하나의 기도, 두고두고 마음에 남을 찬양을 드리고 싶고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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