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52)

 

와서 아침을 먹어라

 

그들이 땅에 올라와서 보니, 숯불을 피워 놓았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오너라.”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땅으로 끌어내렸다. 그물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렇게 많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제자들 가운데서 아무도 감히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주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이와 같이 생선도 주셨다.(요한복음 21:9-13)

 

밤새도록 물고기 한 마리 건져 올리지 못한 어부들의 마음은 쓸쓸했을 것이다. 건져 올릴 때마다 텅 빈 그물은 마치 그들의 마음인양 쓸쓸했다. 그때 해변 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못 잡았습니다.” 그때 목소리의 주인공이 그물을 배의 오른편에 던져보라 일렀다. 거역할 수 없는 명령처럼 들렸던 것일까? 그들은 그대로 했다. 그러자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고기가 잡혔다. 그때 예민한 영혼의 소유자인 요한은 자기들에게 말을 건네신 분이 주님임을 알아차렸다. 베드로는 벗어놓았던 겉옷을 걸치고 물에 뛰어들어 주님께 다가갔다. 어쩌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어떤 힘이 그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다른 제자들은 고기가 든 그물을 끌면서 해안으로 나왔다. 죽는 한이 있어도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했으나 시련의 채찍질 소리에 속절없이 무너진 그들이었다. 유구무언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해안에는 숯불이 피워져 있었고 생선과 떡이 그 위에 올려 져 있었다. 주님은 그들을 위해 식탁을 차리고 계셨던 것이다.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오너라.” “와서 아침을 먹어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주님이 차리신 식탁은 마치 너희는 나를 버렸지만 나는 너희를 버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듯했다. 예수님의 지상 생활의 특색 가운데 하나가 식탁 공동체였다. 예수님은 사회적 기휘의 대상인 사람들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으셨다.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상대방을 가족으로 혹은 이웃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 아닌가? 가족이라는 말은 혈연에 근거한 친족관계를 이르지만, 식구는 말 그대로 밥을 같이 먹는 사람을 의미한다. 한솥밥을 먹는 사람이 바로 식구이다.

 

꾸지람 한 마디 없이 예수님은 제자들을 식구로 맞아들이신다. 옳고 그름에 대한 냉철한 판단과 비판이 필요할 때도 있다.  하지만 마음이 무너진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를 일으켜 세울 수 있도록 해주는 타인의 지지와 사랑이다. 받아들여짐의 경험을 통해 사람들은 자기 안의 상처를 보석으로 가꿀 힘을 얻는다. 돌에 맞고 가지가 꺾이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먹감나무는 상처를 아름다운 무늬로 바꾼다. 주님은 받아들임을 통해 그들을 가두고 있던 어두운 기억과 상처에서 벗어나도록 도우신다. 상처가 없었다면 그들은 인간의 연약함에 공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신앙이란 일종의 연금술이다. 보잘 것 없는 재료를 가지고 가장 귀한 것을 빚어내는 과정이라는 말이다. 화학적 변화를 위해서는 촉매가 필수적이다. 무너진 영혼의 재탄생을 위해 필요한 촉매제는 따뜻한 ‘받아들임’이다. 믿음의 사람이란 냉혹한 세상에서 영혼의 촉매가 되려는 이들이 아닐까. 

 

*기도*

 

하나님, 주님을 따라 살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우리는 종종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곤 합니다. 세상의 화려한 불빛이 우리 눈을 가려 주님을 시야에서 놓칠 때가 많습니다. 세상에 맛들인 영혼은 좁은 길이 아니라 넓은 길에 이끌립니다. 주님, 우리를 포기하지 마시고 찾아와 주십시오. 제자들에게 주셨던 그 빵과 생선을 우리에게도 주십시오. 그 귀한 사랑을 먹고 힘을 얻어 상처의 기억을 빛나는 보석으로 바꾸고 싶습니다. 우리 삶이 하나님께는 영광이고 이웃에게는 덕이 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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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11)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걸어서 가거나 헤엄쳐 갈 수 있는 곳이 아닌, 다른 별의 고요를 다 데리고 와도 시끄러울 뿐인, 그대가 그대로 있는 것만이 사랑인, 꽃의 말과 새의 말과 사람의 말이 구분되지 않는, 사람도 사랑도 새도 나비도 죽음도 꽃이나 별떼도 하나로 흐르는, 좋다와 싫다가 동의어인, 문자가 없어 마음을 옮겨 적을 수가 없는, 수국의 꽃잎 하나 달기 위해 천년이 흐르는, 밝아서 당신이 보이는,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을 내비게이션으로 치면 찾아갈 수 있는 고유명사이자 시인의 마음에서 새롭게 빚어진 보통명사가 된 북천, 어쩌면 시인 자신일지도 모를 북천에서 온 사람을 두고 시인 이대흠은 이렇게 노래를 한다.

 

                                             사진/한남숙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이마에서 북천의 맑은 물이 출렁거린다
그 무엇도 미워하는 법을 모르기에
당신은 사랑만 하고
아파하지 않는다

당신의 말은 향기로 시작되어
아주 작은 씨앗으로 사라진다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사랑을 할 줄만 알아서
무엇이든 다 주고
자신마저 남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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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10)

 

하늘 그물

 

새벽기도회를 마쳤을 때 권사님 한 분이 목양실로 찾아왔다. 새벽에 나눴던 말씀 중에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본문이 있었던 것이다. 스가랴 11장이 본문이었는데, 본문 속에 나오는 토기장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잠시 서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시간이 괜찮으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권했다. 권사님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처음이었다. 권사님은 당신의 지나온 시간을 이야기했다. 잠깐 사이에 듣는 이야기 속에도 기가 막히도록 어려운 일들이 많았다.

 

이야기 끝 권사님은 당신은 기도할 때마다 드리는 기도가 있다고 했다.


“하나님, 제게 왜 이러십니까? 언제까지 이러실 겁니까?”


권사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권사님께 하늘 그물 이야기를 해드렸다. ‘天網恢恢 疎而不失’(천망회회 소이불실), <노자>에 나오는 말로 ‘하늘 그물은 넓고 성기어서 허술한 것 같지만, 빠뜨리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사진/한남숙

              
하늘 그물이 있나 싶게, 저렇게 코가 넓어 무엇을 담을 수 있나 싶게 하늘 그물은 엉성하기 그지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 그물은 빠뜨리는 것이 없다니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려보자고 했다. 그리고 드리는 나직한 기도, 기도를 하는 사람도 함께 기도하는 사람도 함께 메는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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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51)

 

뜨거움을 나누는 사람들

 

그 두 길손은 자기들이 가려고 하는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더 멀리 가는 척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를 만류하여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고, 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우리 집에 묵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려고 앉으셨을 때에, 예수께서 빵을 들어서 축복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다. 그제서야 그들의 눈이 열려서, 예수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한순간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누가복음 24:28-32)

 

새로운 세상이 열릴 거라는 기대에 부풀었던 사람들에게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절망의 문이었다. 외세의 지배가 끝나고, 시온이 세상의 모든 산들 위에 우뚝 서리라는 꿈은 남가일몽처럼 스러지고 말았다. 애써 다독여보아도 마음속으로 스멀스멀 스며드는 허무의식을 떨쳐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미련 없이 예루살렘을 등졌다. 그러나 아쉬움조차 없던 것은 아니어서, 그 동안의 경험을 나누며 걷고 있었다. 재를 뒤적여 꺼져가는 불씨라도 발견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때 낯선 사람이 다가와 함께 걷다가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가 대체 무슨 이야기냐고 물었다. 두 사람은 침통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예루살렘을 들끓게 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많은 이들이 말과 행동에 힘이 있었던 예언자 나사렛 예수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고 믿었지만 그는 허망하게 죽임을 당했고, 며칠 후 여인들이 천사들의 환상을 보았다면서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제자는 낙향하고 있었다. 

 

 

                      렘브란트/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그 나그네는 메시아가 고난을 받아야 하는 것을 왜 깨닫지 못하느냐고 그들을 책망하면서 모세와 예언자들을 비롯해 성경 전체에서 메시아에 대해 증언한 내용을 풀어 설명해준다. 메시아적 신비에 대해 온전히 깨닫지는 못했지만 희미한 빛이 그들 속에 스며들었던 것일까? 두 사람은 나그네를 자기들의 집에 초대한다. 식탁이 차려졌을 때 나그네는 빵을 들어 축사를 한 후에 떼어 나누어주었다. 그들의 영혼에 새벽이 다가왔다. 그들은 그 나그네가 주님임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깨달음과 동시에 예수님은 사라졌다.

 

두 사람은 그 놀랍고 신비한 경험을 되새긴다.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이하여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이 [우리 속에서 ] 뜨거워지지 않았습니까?’”(누가복음 24:32) 그 길 위에서  절망으로 식어버린 영혼에 온기가 찾아왔던 것이다. 생명은 온기 속에서 탄생하는 법, 그들은 그 뜨거움의 기억을 간직한 채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제자들이 머물고 있던 곳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제자들을 통해 주님이 확실히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접한다. 두 사람도 자기들이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일어난 일을 증언한다. 경험의 나눔을 통해 그들은 더 큰 확신에 이를 수 있었다.

 

교회는 그런 뜨거움을 나누는 이들의 모임이다. 나그네처럼 다가와 어둡던 우리 인생을 밝혀주셨던 주님에 대한 다채로운 증언이 합류하여 거대한 흐름이 될 때, 욕망의 탁류 속에 떠내려가던 삶을 거스를 수 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서 걷고 계신다.

 

*기도*

  

하나님, 기대하고 소망했던 일이 무너질 때 절망의 어둠이 우리를 확고히 사로잡습니다. 애써 몸과 마음을 추슬러 보지만, 한번 상처 입은 마음은 쉽게 치유되지 않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삶의 의욕이 사라집니다. 지금 절망의 내림 길을 걷고 있는 이들을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그들 곁에 다가가시어 식어버린 마음에 뜨거운 불꽃을 다시 지펴주십시오. 외로움 속에 유폐되지 않게 해주시고, 삶의 기쁨과 슬픔을 나눌 동료들을 만나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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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50)

 

십자가에서 탄생한 빛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면서, 예수를 모욕하며 말하였다. “아하!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자기나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려무나!” 대제사장들도 율법학자들과 함께 그렇게 조롱하면서 말하였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보고 믿게 하여라!”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도 그를 욕하였다.(마가복음 15:29-32)

 

맹자는 인간에게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있다고 가르쳤다. 우물을 향해 걸어가는 아이를 보면 선인이든 악인이든 달려가 아이를 위험에서 구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인간 속에는 인애의 감정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마음이 늘 지속되지는 않는다. 어떤 순간에는 발현되지만 또 다른 순간에는 발현되지 않는다. 두려움에 익숙한 사람들은 강자와 자기를 합일화 함으로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이 있다. 두려움이 많은 사람 가운데는 자기보다 약한 이들을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게 대하는 이들도 있다. 자기들 속에 있는 연약함을 숨기려고 더욱 악마적으로 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보며 사람들이 보인 태도는 조롱과 멸시였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심문을 받으신 후에 군인들에게 당하신 조롱도 아프지만, 골고다 언덕에서 보인 사람들의 야멸찬 태도가 더욱 아프게 느껴진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머리를 흔들면서 말한다. “아하! 성전을 허물고 사흘 만에 짓겠다던 사람아, 자기나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려무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도 그 조롱에 가담한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는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봐라.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보고 믿게 하여라!”(마가복음 15:29-32) 그들은 서로 바라보며 공모의 미소를 지었을까? 인간에 대한 예의도 연민도 없는 불모의 시간이었다.

 

 

 

 

박두진은 <갈보리의 노래2>에서 예수님이 겪으셨던 그 어둠의 시간을 폭포와 같은 문장으로 드러낸 바 있다.

 

“마지막 내려 덮은 바위 같은 어둠을 어떻게 당신은 버틸 수가 있었는가? 뜨물 같은 치욕을, 불붙는 분노를, 에어내는 비애를, 물새 같은 고독을, 어떻게 당신은 견딜 수가 있었는가? 꽝꽝 쳐 못을 박고, 창끝으로 겨누고 채찍질해 때리고, 입 맞추어 배반하고, 매어달아 죽이려는, 어떻게 그 원수들을 사랑할 수 있었는가?”

 

그 비애의 시간에 예수님 홀로 고요했다. 하나님의 완강한 침묵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처형자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청했다. 하나님께 당신의 영혼을 온전히 맡겼다. 이해를 넘어서는 믿음이란 이런 것이다.

 

십자가는 인간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도구였다. 그런데 예수의 십자가에서 새로운 것이 탄생했다.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빛, 절망을 빚어 만드는 희망, 죽음을 이기는 궁극적 생명 말이다. 그 빛을 보았던 것일까? 십자가 아래 서 있던 백부장은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마가복음 15:39)

 

*기도*

 

하나님,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조롱하는 무리들을 떠올릴 때마다 분노와 아울러 슬픔이 느껴집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도처에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는 말도 있습니다만, 쾌락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사납고 무정한 사람들은 고통 받는 이들을 보면서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픔을 주십시오. 주님의 피를 주십시오. 주님의 눈물을 주십시오. 십자가에서 탄생한 그 영원한 빛을 바라보게 해주십시오. 주님만이 우리의 구원이요 길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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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09)

 

목이 가라앉을 때면

 

부활주일을 앞두고 두 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시간을 갖고 있다. 어떤 모임 앞에 ‘특별’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조심스럽다. 졸지에 다른 시간을 특별하지 않은 시간으로 만드는 우를 범하기 때문이다. 적절한 말로 대체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겨진다.


평소에도 갖는 새벽기도회지만 마음가짐이 달라서일까, 평소보다 많은 교우들이 참여를 한다. 평소와는 달리 대표기도, 성경봉독, 특별찬송 등의 순서도 있다. 그런 순서 자체가 마음을 구별하게 만들지 싶다.

 

기도회를 시작하고 며칠이 지났을 때 목이 칼칼해지기 시작하더니 푹 가라앉고 말았다. 새벽에는 증세가 더 심해져서 말하는 것이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다. 대표기도를 하는 교우가 목사의 성대를 위해서도 기도를 하니 마음에 더 걸린다.

 

 

 

이렇게 목이 가라앉을 때면 떠오르는 시간이 있다. 오래 전이었다. 강원도 화천에서 연합성회가 열릴 때였다. 화천에 있는 교회가 교단을 떠나 한 자리에 모여 말씀을 나누는 자리였다. 강사로 초대를 받았는데, 떠나기 전부터 칼칼하던 목이 대번 티를 내기 시작했다. 목이 찢어지듯이 아팠고, 말이 잘 나오지를 않았다. 색색거리는 쇳소리뿐 정말로 말이 안 나와 예배 후엔 식사기도를 못할 정도였다. 나을 수만 있다면 똥물이라도 마실 심정이었다. 마이크를 손에 붙잡고 어렵게 시간을 이어갔다. 오히려 교우들은 강사를 걱정하며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마침내 마지막 말씀을 나누는 시간이 되었다. 말씀을 나누기 전 그동안 강사를 위해 기도해준 교우들께 고맙다는 인사부터 했다. 인사 후 기도로 말씀을 시작했는데 나도 모르게 이런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이 제게 주신 삶에서 며칠을 감하시든, 몇 달을 감하시든, 몇 년을 감하시든 괜찮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시간만큼은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칼칼하던 목이 다시 멨고, 두 눈이 젖었다. 다행히 말씀을 모두 마칠 때까지 목소리가 나왔다. 기도를 들으신 주님의 은혜였다. 목이 가라앉을 때면 화천, 그 때의 기도가 떠오른다.

 

내 삶에 얼마큼의 시간을 허락하시든 얼마를 감하셨는지 셈을 하지 않기로 한다. 여쭙지 않기로 한다. 어차피 시간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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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08)

 

치명적인 오류

 

<기독교사상> 담당자가 보낸 메일을 받고는 당황스러웠다. 매달 ‘내가 친 밑줄’이라는 글을 연재하는데, 지난 3월호에 실었던 내용 중 잘못된 부분이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글 중에 인용한 니체의 말이 실은 니체의 말이 아니라 니체에 대해서 글을 쓴 저자의 말이라는 지적이었다. 설마 그런 중요한 실수를 했을까 싶어 서둘러 <니체의 문체>라는 책을 찾아보았다. 이런! 그 지적은 맞았다.


‘드러난 것은 드러나지 않은 것보다 적다.’


‘목소리는 개별자의 것이지만 단어들은 모든 사람들의 것이다. 저자의 문체는 그가 사용하는 단어들을 통해서 그런 것처럼, 그가 피하는 단어들을 통해서도 형태를 갖춘다.’


니체의 말이라고 인용한 두 문장은 모두 니체의 말이 아니었다. <니체의 문체>를 쓴 책의 저자 하인츠 슐라퍼의 말이었다.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아찔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알 수 있는 지극히 단순한 일, 왜 그걸 실수했을까? 설교든 글이든 누군가의 글을 인용할 때면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찌 그런 우를 범했을까, 몹시 당황스러웠고 부끄러웠다.


잘못된 선입견 아니었을까 싶었다. 인상 깊게 남은 그 말을 어느 순간부터 니체의 말로 기억을 하고, 글을 쓰면서도 당연히 니체의 말로 생각하여 잘못 인용을 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은 내 안에 잘못된 선입견이 얼마나 많은 것일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목회의 길을 걸으며 때마다 나누는 말씀,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생각이 마구 뒤엉겨 있는 것은 아닐까, 마음이 무겁고 불편했다.

 

지적이 맞다고, 그 단순한 사실을 혼동한 자신이 몹시 부끄럽다고, 지적을 해 준 분의 밝은 눈에 감사를 드린다고 서둘러 답장을 보냈다.


생각하니 답장 하나로 끝낼 일은 아닌 듯하다. 원고를 쓰기 시작한지가 벌써 2년, 어느새 내가 무뎌진 것인지도 모른다. 물러서는 시간을 앞당겨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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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49)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러므로 그는 모든 점에서 형제자매들과 같아지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비롭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심으로써, 백성의 죄를 대신 갚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히브리서 2:17-18)

 

1년 여를 법정에 서야 했던 사람이 웃으며 말했다. “법정에 서보니까 최후의 심판이 관념이 아닌 현실임을 알겠더군요.” 사람은 자기의 경험만큼만 세상을 이해한다. 물론 간접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책을 읽거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우리는 낯선 세계에 대한 심화된 지식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진정한 이해는 아니다.

 

소행성 B612에 살던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는 자기 별을 떠나 우주를 탐험한다. 여섯 번째 별에서 그는 지리학자를 만난다. 세상의 모든 것을 기록하는 그는 어린왕자의 별에 대해 말해달라고 한다. 어린왕자는 자기 별에 있는 장미꽃 이야기를 꺼낸다. 그러자 지리학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나는 꽃 따위는 기록하지 않는다.” 이유를 묻는 어린왕자에게 그는 꽃은 덧없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기는 변하지 않는 것만 기록할 뿐 소멸할 위험이 있는 것은 기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는 과연 세계를 이해한 것일까?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관찰보다는 애정이,/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

 

쇠귀 신영복 선생의 이 문장은 이해 혹은 관계의 최고 형태가 무엇인지를 입체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서 있는 자리가 다르면 세상은 달리 보이는 법이다.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한다지 않던가(스콧 니어링).

 

 

 

 

실패나 가난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가난한 이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다이어트를 위한 단식이 아니라 없어서 못 먹는 사람의 서러움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아파본 사람이라야 아픈 사람의 마음을 알고, 절망의 심연 앞에서 현기증을 느껴본 사람이라야 벼랑 끝에 선 이의 심정을 이해한다.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은 성현들의 고담준론이 아니라 같은 처지에 있는 이가 보여주는 연대의 몸짓에 더 큰 위로를 받는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성육신의 가르침은 얼마나 놀라운가? 무한이 자기를 비워 유한 속으로 들어왔다는 진술은 지혜를 구하는 이들에게 어리석은 말로 여겨질 것이다. 예수는 짐짓 인간이 된 체 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분이었다. “그는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히브리서 2:18) 십자가에 이르는 삶을 남김없이 살아내셨기에 주님은 세상의 모든 질고를 대신 지실 수 있었다. 그 사랑의 신비 앞에 무릎을 꿇을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

 

*기도*

 

하나님, 삶이 곤고할 때마다 우리는 그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름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 보아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을 때, 그래서 우리의 가능성이 다 소진되었다고 느낄 때 우리는 비로소 주님을 찾습니다. 절망의 심연에 갇혀 희망의 빛 한 점 보이지 않을 때 주님은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 주십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다 맛보셨기에 주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고맙습니다. 주님, 이제부터 주님을 외롭게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우리를 주님의 손과 발로 삼아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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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48)

 

시름하는 동조자

 

그 뒤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거두게 하여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의 제자인데, 유대 사람이 무서워서, 그것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니, 그는 가서 예수의 시신을 내렸다. 또 전에 예수를 밤중에 찾아갔던 니고데모도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왔다. 그들은 예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대 사람의 장례 풍속대로 향료와 함께 삼베로 감았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신 곳에, 동산이 있었는데, 그 동산에는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하나 있었다. 그 날은 유대 사람이 안식일을 준비하는 날이고, 또 무덤이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수를 거기에 모셨다.(요한복음 19:38-42)

 

갈릴리의 어부들은 ‘나를 따라 오너라’라는 부름을 들었을 때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다. 즉각적이고 전폭적인 응답이었다. 헤롯 안티파스가 다스리던 1세기 갈릴리의 상황은 참담했다. 그는 황제의 이름을 딴 도시 티베리아스를 건설했다. 그 건설비용을 감당해야 했던 것은 무고한 백성들이었다. 그는 또한 자기의 임명권자인 로마에 잘 보이기 위해 막대한 세금을 징수했다. 조상 대대로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으며 살던 어부들도 배와 그물의 크기에 따라 세금을 내야 했고, 기껏 잡아 올린 물고기도 헤롯이 만든 염장 처리 공장에 헐값으로 넘겨야 했다. 삶은 피폐해졌고, 혁명의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예수의 첫 번째 제자들이 어부라는 사실이 암시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복음의 말씀을 듣는다고 하여 모두가 주님을 따라나서는 것은 아니다. 예수를 따라다닌 사람들은 대개 가난한 이들이었지만 유력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또 깊이 공감했지만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분을 따를 근기가 없었다. 자기가 예수의 가르침에 공감한다는 사실을 공적으로 드러내지도 못했다. 그것은 주류사회의 질서를 해치는 일처럼 보였고, 그때 자기들에게 집중되는 비난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해야 할까? 따름의 철저성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그들은 비겁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규정은 여린 싹을 짓밟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여백이 없는 믿음의 강요는 허위의식을 낳기 쉽다.

 

 

복음에 동조하면서도 여전히 생활에 매여 있는 이들이 있다. 헨리 나웬은 그런 이들을 가리켜 ‘시름하는 동조자들’이라 명명했다. 그들을 비웃거나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후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나 숨은 제자였던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를 찾아가 주님의 시신을 요구했다. 유대인들이 두려워 자기의 신앙적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던 그가 ‘겁 많은 자의 용기’를 낸 것이다. 차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내적 끌림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자기에게 닥칠지도 모르는 위험과 사회적 평판을 계산하지 않았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 백 근을 가져와 예수님의 시신을 닦고 새 무덤에 모셨다. 빛나는 신앙적 도약의 순간이다.

 

경직된 믿음은 자칫 잘못하면 율법주의로 흐를 수 있다.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려야 한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면서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신앙도 그렇게 배워가는 과정이다. 넘어지면 일어서면 된다. 지향만 바르면 된다. 지향이 바르면 잠시 푯대가 보이지 않아도 낙심할 것 없다. 저 언덕을 넘으면 푯대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다.   

 

*기도*

 

하나님, 믿음은 결단이고 모험이라는데 안일에 길들여진 우리는 도무지 길을 떠나지 못합니다. 우리 옷자락을 붙드는 옛 생활의 습성을 떨쳐버릴 힘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결단해야 할 때를 놓치곤 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우리 영혼은 누추해졌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는 어떻게 두려움을 떨치고 위험 앞에 설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주님, 그들을 일으켜 세웠던 그 뜨거움을 우리에게도 주십시오. 자아의 한계를 넘어 자유롭게 주님의 뒤를 따를 수 있는 검질긴 믿음을 우리 속에 심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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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07)

 

4월 16일

 

4월 16일은 마치 정지된 시간처럼 다가온다. 다른 것은 다 흘러갔지만 흐르지 않던, 흐를 수가 없었던 시간이 힘겹게 한 걸음을 내딛는 것처럼 찾아온다. 흐를 수가 없었던 시간이기에 언제나 변하지 않은 아픔의 민낯으로 다가온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이젠 그만 하자고. 그만 하자는 말은 꽤나 점잖은 말, 실은 사납고 섬뜩한 말들이 난무한다. 그것은 마구잡이로 쏘아대는 화살과 같아서 피눈물을 흘리는 이의 가슴에 거듭해서 박히고는 한다. 화살이 박히고 박혀 이미 너덜너덜해진 기가 막힌 가슴들 위로.

 

 

 

 


왜 사람들은 흘러간 시간의 길이만을 말하는 것일까? 그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왜 외면하는 것일까?

 

이제는 그만하자고 말하는 이들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따지듯이 가 아니라 정말로, 진심으로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그날 수장된 304명 중에 당신의 아들이나 딸, 혹은 손자나 손녀가 있었어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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