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새로봄(146)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애태움

 

어떤 여자에게 드라크마 열 닢이 있는데, 그가 그 가운데서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겠느냐? 그래서 찾으면,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모으고 말하기를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누가복음 15:8-10)

 

드라크마 열 개를 가진 여인이 있었다. 드라크마는 로마 세계에서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은화인데, 그 가치는 대략 노동자의 일일 품삯에 해당했다고 한다. 열 드라크마는 여인이 어려운 때를 대비해 준비해둔 비상금이었는지, 전 재산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느 쪽이 되었든 이 여인은 가난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중 하나를 잃어버렸다. 부자들은 ‘그까짓 것’ 할지 모르겠지만 이 여인은 그럴 수 없었다. ‘어디에 떨어뜨렸을까?’ 여인은 이리저리 생각을 궁굴려보고, 이곳저곳 둘러보았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여인은 창문조차 없어 대낮에도 어두컴컴한 집에 불을 밝힌 후에 종려나무 가지를 엮어 만든 빗자루를 들고 온 집을 쓸었다. 온 집이라야 방 한 칸에 불과했겠지만, 여인은 귀를 나팔처럼 펼쳐 금속이 바닥에 쓸리는 소리가 들리나 집중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애태움. 모든 것이 넉넉한 이 시대에는 만나보기 어려운 마음이다. 하지만 우리는 매우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줄 모르고 사는 것은 아닐까? 무관심과 냉정함으로 사람을 잃은 적은 부지기수이고, 내면의 신성한 불꽃도 이제는 가물거리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까닭조차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소명(vocation)을 뜻하는 라틴어의 또 다른 의미는 ‘목소리’(voice)이다. 소명이란 내가 추구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들어야 할 내면의 목소리이다. 우리는 세상의 소음에 반응하느라, 하늘의 소리를 놓치곤 한다. 진정한 자기로부터의 소외는 이렇게 발생한다. 분주함 속에서도 마음이 공허하고 스산한 것은 소명을 잃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잃어버리고도 잃은 줄 모른다는 것이다. 잃어버린 줄 모르니 찾지도 않는다.

 

애태우며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던 여인은 마침내 소망을 이뤘다. 여인은 기뻤다. 그래서 벗과 이웃 사람을 불러 모아 이렇게 말한다.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누가복음 15:9) 여인은 다른 사람들을 자기의 기쁨에 초대한다.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 사심 없이 기쁨을 나누는 사람들은 어떤 연대의 끈이 자기들 속에 생겨난 것을 느끼게 된다.

 

예수님은 드라크마의 비유를 마무리하면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을 두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누가복음 15:10). 애태움이 없다면 기쁨도 없다. 욕망의 벌판에서 바장이는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보여주며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 이처럼 장쾌한 일이 또 있을까?

 

*기도*

 

하나님,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게 나아갑니다.”(윤동주) 시인의 고백이 참 적실하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줄 모르고 삽니다. 다른 것에 온통 마음이 팔렸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일까요? 우리 발걸음은 대지에서 유리된 것처럼 허청거리기 일쑤입니다.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시인의 고백대로 우리도 잃은 것을 찾는 자가 되겠습니다. 우리 발걸음을 인도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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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06)

 

같은 질문, 다른 대답

 

새벽예배 시간에 읽고 있는 마가복음 10장에는 두 개의 같은 질문이 나온다.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이다. 첫 번째 질문은 두 제자에게 한 것(36절)이고, 두 번째 질문은 바디매오에게 한 것(51절)이다.

 

질문은 같았지만 대답은 달랐다. 제자들은 자리를 구했다.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37절)고 구했다. 높은 자리, 좋은 자리,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자리를 구했다.

 

 

 


 

 

바디매오는 달랐다. “보기를 원합니다.”(51절) 바디매오는 맹인이었고, 거지였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어 연명하던 사람이었다.

 

명색이 제자인 이들은 ‘높은 자리’를 구하고, 세상에서 가장 보잘 없는 바디매오는 ‘눈을 뜨는 것’을 구한다. 제자들은 ‘세속적인 것’을 구하고, 맹인 거지는 ‘영적’인 것을 구한다. 제자들은 세상에서 구할 것을 예수님께 구하고, 바디매오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예수님께 구한다. 제자들은 제자이기 때문에 자신들에겐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고, 바디매오는 맹인이자 거지이기 때문에 자기에겐 어떤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다.

 

오늘 이 땅의 교회와 교인들이 예수님과 가깝다는 이유로 온갖 세속적인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구할 수 있는 권리나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믿음의 맹인 비렁뱅이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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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45)

 

연약한 자가 세상을 구한다

 

어둠 속에서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 “하나님, 주님께서 그들에게 큰 기쁨을 주셨고, 그들을 행복하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곡식을 거둘 때 기뻐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군인들이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이, 그들이 주님 앞에서 즐거워합니다. 주님께서 미디안을 치시던 날처럼, 그들을 내리누르던 멍에를 부수시고,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던 통나무와 압제자의 몽둥이를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침략자의 군화와 피묻은 군복이 모두 땔감이 되어서, 불에 타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우리가 한 아들을 모셨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가 다윗의 보좌와 왕국 위에 앉아서,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심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이사야 9:2-7)

 

이사야는 어둠 속을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고 말한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사건이지만, 이사야는 이미 그 일이 실현된 것처럼 말한다.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를 드러내는 표현이다. 지금은 비록 어둠이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주권이 드러나는 날, 기쁨의 날이 도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할 때 어둠의 시간을 견딜 힘이 생긴다. 미국의 상원의원이었던 로버트 F. 케네디는 암살당한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에게 바치는 헌사에서 정치의 목적은 “인간의 야만성을 길들이고 이 세계의 삶을 온화하게 만드는데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정치의 목적일 뿐 아니라, 신앙인들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믿음의 사람은 기존 질서에 길들여지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변화되어 역사의 변혁을 꿈꾸는 사람이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not conformed),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but transformed)”(로마서 12:2)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살라고 권했다. 성도는 자비롭고 정의로운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 함께 일하자는 하나님의 초대에 응답한 사람이다. 많은 성도들이 그 꿈을 망각하고 산다. 사적인 욕망에 붙들려 살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남들과 다르게 살 용기(courage to be different)를 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메마른 용기가 아니라 스스로 연약해질 수 있는 마음이다.

 

 

 

 

 

 

성경은 ‘가장 연약한 자가 세상을 구한다’고 고백한다. 성경의 가장 큰 역설이 여기에 있다. 이사야는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고 말한다. 그는 백성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를 부르는 이름은 여러 가지이다.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 그의 또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 그렇기에 그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경험하게 하는 분이다.

 

십자가 아래 있던 백부장은 예수님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이분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라고 고백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내뱉은 말이 아니다. 그는 고난당하는 예수님 안에서 타오르고 있던 신령한 빛을 보았던 것이다. 그 빛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모든 이들의 내면에서 항상 타올라야 하는 빛이다. 그 빛은 경외심과 연민과 사랑이라는 연료를 통해서만 타오른다. 메마른 강인함이 아니라 연약함의 신비가 우리를 이끌 때 평화의 나무는 더욱 무성하게 자라고, 공평과 정의 위에 세워진 나라는 더욱 굳게 설 것이다. “만군의 주님의 열심이 이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이사야 9:7c). 이 놀라운 확언이 우리를 절망의 심연에서 끌어올린다.

 

*기도*

 

하나님, 우리는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강해지려 노력합니다. 상처 받지 않으려고 자아의 굳은 벽을 세우고 살아갑니다. 행여 우리 속에 있는 연약한 것이 드러날까 봐 전전긍긍합니다. 옛사람은 굳은 것은 죽음에 가깝고 부드러운 것은 생명에 가깝다고 말했습니다. 연약한 자가 세상을 구원한다는 말씀이 참 놀랍습니다. 사랑과 이해와 연민의 마음이 아니고는 평화 세상을 이룰 수 없음을 한시라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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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05)

 

 불가능한 일

 

세상에는 불가능한 일들이 있다.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 하늘의 별 따기, 바닷물 퍼내기 등이 그렇다. 개구쟁이 오빠와 여동생 앞에서 이불 홑청 갈기,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아닌 척하기, 말로 마음 가리기, 빛 앞에서 그림자와 헤어지기 등도 있다. 시절 탓이겠지만 불가능한 것들의 항목에 보태지는 것들도 있다. 장가 간 아들 내 편 만들기, 정년퇴직한 남편 존중하기 등이다.

 

 

 

 

불가능해 보였던 것들이 혹 가능해진다 해도 여전히 불가능한 것이 있다. ‘불영과불행’(不盈科不行)이라는 말이 <맹자>에 있다.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흐르는 물이 웅덩이를 만나면 웅덩이를 채운 뒤에 앞으로 간다. 갈 길이 바쁘다고 웅덩이를 건너뛰는 법이 없다.

 

도무지 불가능한 일을 두고 ‘불영과불행’이라는 말을 떠올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왜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할까? 넘치기를 갈망하여 부르짖는 은혜가 어찌 세상으로 흘러가지 못할까? ‘불영과불행’일지 모른다. 부르짖을 뿐 실제로는 우리 안에 은혜가 가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득하긴, 어쩌면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은혜의 강물은 언제쯤이나 세상을 향해 흘러갈 수 있을까? 에스겔의 꿈(겔47장)은 언제나 이루어질 수 있을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성전에서 솟은 물이 세상을 살리는 강물로 흐르는 에스겔의 꿈이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쉼 없이 끊임없이 샘이 솟든지, 아니라면 높이 쌓아둔 둑을 허물든지.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너무나 높은 둑을 세상 앞에서 쌓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허영의 강물 출렁이는 둑을 허문다면 혹 불가능한 그 일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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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44)

 

나그네로 산다는 것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고, 장차 자기 몫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떠난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는, 약속하신 땅에서 타국에 몸 붙여 사는 나그네처럼 거류하였으며, 같은 약속을 함께 물려받을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를 바랐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라는, 나이가 지나서 수태할 수 없는 몸이었는데도, 임신할 능력을 얻었습니다. 그가 약속하신 분을 신실하신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한 사람에게서, 하늘의 별과 같이 많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셀 수 없는, 많은 자손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 신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네가 고향을 찾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일 떠나온 곳을 생각하고 있었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더 좋은 곳을 동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늘의 고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도시를 마련해 두셨습니다.(히브리서 11:8-16)

 

길 위에서 산다는 것은 참 고단한 일이다. 하지만 가끔은 나그네가 되어 세상을 떠돌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도 있다. 삶이 지지부진하다고 느낄 때이다. 장 그르니에의 <섬>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가슴 설레던 때가 있었다.  “혼자서,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공상을 나는 몇 번씩이나 해보았다. 그리하여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아 보았으면 싶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나의 ‘비밀’을 고이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고이 간직할 비밀 같은 것은 내게 없지만, 그래도 나를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어딘가에 간다면 세상이 내게 입혀준 허울들을 훌훌 벗고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남루한 삶에 대한 로망, 사람 속에는 그런 것도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 자체가 나그네 신세이다. 잠시 여기 머물다가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가 나그네임을 자각하고 사는 사람은 돌아갈 고향을 가슴에 품은 사람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길손처럼, 나그네처럼’ 사는 까닭은 ‘하늘 본향’을 찾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나그네는 소속이 없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나그네는 현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이해관계에도 얽히지 않기 때문이다. 이해가 얽혀 있는 한 우리는 절대로 공정하게 상황을 판단할 수 없다. 나그네의 시선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한 공동체 살면서도 여전히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은 소속이 없기에 현실의 부조리와 위선과 부족함을 누구보다 자유롭게 바라본다. 그렇기에 공동체 혹은 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 작가인 갓산 카나파니(Ghassan Kanafani, 1936-1972)는 떠도는 사람들에게 고향은 국경에 둘러싸인 영역이나 ‘혈통’과 ‘문화’의 연속성이라는 관념으로 굳어버린 공동체가 아니라, 식민지배와 인종차별이 강요하는 모든 부조리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곳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그네는 한 공동체 속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사람이다. 그는 인습과 전통에 매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는 사람이다. 

 

나그네의 삶에 충실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실 것이다. 문득 이 대목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아프게 다가온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시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 은혜, 구원,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살지만 제 욕심에 몰두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 마련한 마음의 공간은 채 반 평도 안 되는 것은 아닐까? 다시금 나그네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할 때이다.

 

*기도*

 

하나님,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걸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마음에 당도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길을 잃었습니다. 어리둥절한 채 어둠 속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삶에 지칠 때마다 우리가 본향 찾는 나그네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세상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에 굴복하곤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 넣으라 이르시건만 우리는 욕망을 추구하느라 종종걸음 치고 있습니다. 이제는 잃어버린 소명을 되찾고 싶습니다. 힘겹더라도 나그네의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우리를 꼭 붙들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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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04)

 

너희는 그러면 안 된다

 

높은 자리를 구하는 야고보와 요한을 보면서 나머지 열 제자가 화를 냈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도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마음은 얼마든지 드러나는 법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까이 불러’라는 말 속에서 예수님이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하신다는 느낌을 받는다. 덩달아 귀를 기울이게 된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하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정곡을 찌른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고 하고, 권세를 부려 지배하려고 한다. 하지만 너희는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이다.

“너희는 그러면 안 된다”, 새벽기도회 시간 마가복음을 읽어나가던 중 만나게 된 말씀을 두고 두 가지 성숙함에 대해 교우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하나는 섬김의 길을 가는 성숙함이다. 세상은 어떻게 해서든지 나를 드러내고, 높이고, 군림하는 일에 관심을 갖지만, 너희는 그러면 안 된다, 그러니 묵묵히 섬김의 길을 가라.


또 하나 덧붙인 것이 있었다. 겸손하게 섬김의 길을 가는 이를 존중하라는 것이었다. 군림하는 이에게는 순종하면서, 섬김의 길을 가는 이를 가볍게 여겨 무시하는 일은 성숙하지 못한 태도다.

 

“‘너희는 그러면 안 된다’는 주님의 말씀이 굳어질 대로 굳어진 우리의 마음을 천둥처럼 울리기를 구합니다.”


마치는 기도를 드릴 때 마음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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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43)

 

영이 맑은 사람

 

그들은 가버나움으로 들어갔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곧바로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그 때에 회당에 악한 귀신 들린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큰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 예수께서 그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 그러자 악한 귀신은 그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서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갔다.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이게 어찌된 일이냐?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그가 악한 귀신들에게 명하시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면서 서로 물었다. 그리하여 예수의 소문이 곧 갈릴리 주위의 온 지역에 두루 퍼졌다.(마가복음 1:21-28)

 

안식일에 주님은 회당에 들어가서 가르치셨다. 마가는 그 가르침의 내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만 들려줄 뿐이다.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22) 여기서 ‘놀랐다’(ekkepresento)라고 번역된 단어 속에는 ‘때리다’는 뜻의 ‘플렛소’가 들어 있다. 이 단어는 ‘수동태’로 표기되어 있으니 단순히 놀랐다기보다는 ‘충격을 받았다’고 번역하는 게 옳을 것이다. 대체 무엇이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 것일까? 마가는 그 까닭을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이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마가는 그 권위에 대한 설명을 생략한 채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회당 안에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었다. ‘더러운 귀신’이라 하지만 사실은 더러운 영(프뉴마)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더러운 영’이라 말할 때 마가가 떠올리는 것은 무엇일까? 마가복음 7장 20-23절에서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속에 있다면서,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악한 시선, 모독, 교만, 어리석음 등이 더러운 영이라 말씀하셨다. 이렇게 보면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은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세속에 복무하며 사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주님의 가르침을 들은 사람들은 다 충격을 받았다. 이제까지 쓰고 있던 위선의 가면이 송두리째 벗겨지는 것 같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더러운 영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은 큰 소리로 외쳤다. “나사렛 사람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려 하십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압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입니다.”(마가복음 1:24) 영은 영을 알아보는 법, 더러운 영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간파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그를 향해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라” 명령하셨다. 그의 속에 들어 앉아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더러운 영의 지배는 끝났다는 선언인 셈이다. 오직 거룩하고 맑은 영만이 더러운 영을 쫓아낼 수 있다.  

 

움브리아의 작은 마을 구비오(Gubbio)에는 사람들과 가축들을 해치는 사나운 늑대 한 마리가 있었다. 사람들은 무서워서 바깥출입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야기를 들은 프란체스코는 사람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늑대가 있는 숲을 찾아갔다. 늑대가 사나운 이를 드러내며 다가오자 프란체스코는 늑대를 조용히 꾸짖으며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을 해치지 말라고 말했다. 그때부터 늑대는 사람들과 가축들을 해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 기특한 늑대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주었다. 늑대가 죽었을 때 마을 사람들은 매우 슬퍼했다. 그 늑대는 성인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표징이었기 때문이다. 악한 귀신을 복종시키고, 폭력을 잠재우는 맑은 영의 사람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선구이다.

 

*기도*

 

하나님, 더러운 영이 준동하는 시대입니다. 폭력과 혐오가 마치 미세 먼지처럼 우리 일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착한 이들이 조롱받이가 되고, 순진한 사람들은 영악한 이들의 밥이 되었습니다. 악한 영을 향해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명하셨던 주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악한 영들을 물리쳐 주시고 주님의 맑은 영을 우리 속에 채워 주십시오. 마음 따뜻한 사람들, 생명을 아끼는 사람들이 귀히 여김을 받는 새로운 사회를 열어가도록 우리에게 힘과 능력을 더하여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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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03)

 

 열 번의 심방

 

심방 중에 요양원에 계신 권사님을 찾아뵙고 돌아와서 편지를 썼던 것은, 문득 떠오르는 장로님과 권사님 때문이었다. 요양원의 권사님이 지난 기억을 모두 잊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포대기에 아기 인형을 안고 있는 모습을 보는 순간, 장로님과 권사님이 떠올랐다. 오래 전부터 교분을 갖고 있는 두 분은 한 평생 살아오며 그러했듯이 지금 가장 지고지순한 시간을 보내고 계시다. 장로님은 자식들의 걱정과 만류에도 불구하고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권사님을 끝까지 집에서 돌보신다. 사랑 아니면 도무지 불가능한 시간을 보내시는 것이다.

 

 

 

 

마침 상반기 심방을 모두 마친 어제 저녁, 장로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보내드린 편지를 받고는 전화를 하신 것이었다. 받은 편지를 권사님께 전하며 사연을 이야기했더니 평소와는 달리 권사님이 많은 말을 하시더라는 것이었다. 어떤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 표현이지만 마음이 많이 들뜬 듯 많은 이야기를 하셨다고 했는데, 통화를 하는 중에도 권사님의 목소리는 수화기를 통해 전해져 왔다.

 

자주 찾아 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죄송하다고 하자 장로님이 대뜸 말을 막으신다. 목사님은 목회 일에 전념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고. 그러면서 마음을 담아 인사를 건네셨다.

 

“오늘 받은 편지는 목사님 심방을 열 번 받은 것과 다름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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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42)

 

하나님의 숨을 기다리며

 

이 모든 피조물이 주님만 바라보며, 때를 따라서 먹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먹이를 주시면, 그들은 받아 먹고, 주님께서 손을 펴 먹을 것을 주시면 그들은 만족해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얼굴을 숨기시면 그들은 떨면서 두려워하고, 주님께서 호흡을 거두어들이시면 그들은 죽어서 본래의 흙으로 돌아갑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영을 불어넣으시면, 그들이 다시 창조됩니다. 주님께서는 땅의 모습을 다시 새롭게 하십니다.(시편 104:27-30)

 

생명이란 호흡지간의 일이다. 하나님이 호흡을 불어넣으시면 세상 만물은 살고, 호흡을 거두어 가시면 다 흙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잠시 허락받은 시간 동안 이 땅에 머물다 가는 존재이다. 우리가 떠나간 이후에도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 땅을 아름답게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후손들에게 물려줄 가장 귀중한 유산이다. 미세 먼지가 온 산하를 뒤덮을 때면 숨 쉬기도 어렵고, 우울함이 안개처럼 우리 마음을 감싼다. 숨쉬기 어려운 세상은 하나님께서 호흡을 거두시는 세상인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의 숨이 우리 속에 머물지 않을 때 마음은 각박해지고 남을 위한 여백을 마련하지 못한다. 몸보다 마음이 더 바쁜 세상이다. 산과 들, 꽃과 바람, 구름과 시냇물에 마음을 빼앗긴 사람은 한가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13세기 아프가니스탄의 시인 루미는 나쁜 물을 고치려면 그 물을 강으로 돌려보내야 하고, 나쁜 버릇을 고치려면 ‘나’를 하나님께 돌려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각박해지고, 거칠어진 우리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엎드려야 한다. 그 시간은 정화의 시간이고, 우리 속에 필요한 고요함을 채우는 시간이다. 때로는 자연의 품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의 창조의 리듬 속에 머물 때 거친 호흡이 가지런해지니 말이다. 중국 명나라의 한 시인은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정신적 유익을 이렇게 말했다.

 

“폭포 소리를 들으면 속된 기운을 씻을 수 있고, 솔바람 소리를 들으면 번다한 마음을 시원하게 할 수 있다. 처마 끝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면 이런저런 수고스런 번뇌를 멈출 수 있고, 새 울음소리를 들으면 분별하여 이익을 추구하던 생각을 그치게 할 수 있다. 거문고 소리를 들으면 조급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고, 새벽 종소리를 들으면 어지럽던 마음을 깨어나게 할 수 있다.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면 고삐 풀린 생각을 정돈할 수 있고, 독경 소리를 들으면 티끌세상을 향한 마음을 맑게 할 수 있다.”(정민, <<마음을 비우는 지혜>>, 明淸淸言, 73쪽) 

 

이익을 추구하느라 닳고 닳은 마음, 속된 마음, 조급한 마음, 어지러운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가끔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나무와 꽃 앞에 멈추어 서라. 산에 갈 수 없다면 공원에라도 나가 나무를 꼭 껴안아 보라. 마음이 평화로워질 것이다. 마음에 평화가 없는 사람은 세상을 평화롭게 할 수 없다.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없는 사람은 생명 세상을 이룰 수 없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들의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 삶은 달라질 것이다. 참다운 발전이란 GDP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명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커가는 것이고, 배려하는 마음이 커가는 것이다. 주님은 지금 이 땅을 새롭게 하기 위해 땀 흘리고 계시다. 주님은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요한복음 5:17) 하셨다. 하나님의 숨을 모셔야 이 아름다운 일에 동참할 수 있다.

 

*기도*

 

하나님,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변화는 주님의 숨을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호흡을 불어넣으시면 만물은 깨어나고, 호흡을 거두어 가시면 다 흙으로 돌아갑니다. 인류의 첫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신 주님은 지금도 우리 속에 숨을 불어넣고 계십니다. 살아 있음이 곧 은총입니다. 하지만 우울한 세상에 사느라 우리는 지쳤습니다. 이제 주님의 숨을 깊이 들이 마시고 싶습니다. 하늘을 자유롭게 날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새들처럼 절망과 좌절의 나락에서 솟구쳐 올라 희망의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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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02)

 

잘못된 구함

 

신앙인들이 갖는 대부분의 관심은 ‘구함’에 있다. 무엇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 어떻게 구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일천번제’를 비롯한 프로그램도 많아지고, 설교에서 다루는 중요한 주제가 되고, 책방 기독교 코너에는 그런 내용을 담은 책들도 많다.

 

하지만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관심 중에는 ‘잘못된 구함’도 있다. 내가 구하는 것이 얼마든지 잘못된 구함일 수 있다는 것을 돌아보아야 한다. 자기 성찰이 없는 구함이야말로 잘못된 구함이기 때문이다.

 

 

 

 

높은 자리, 좋은 자리, 다른 이들의 부러움을 살만한 자리를 구하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주님은 말씀하신다.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마가복음 10:38)

 

우리는 우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구할 수 있는 존재들이다. 신앙인이 되었다고 당연한 듯이 그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것을 달라 떼를 쓰고, 하나님의 약해보이는 곳을 다양하게 찌르기도 하고, 때로는 그럴 듯이 타협안을 내기도 한다.

 

‘구함’을 담은 책의 높이와 ‘잘못된 구함’을 담은 책의 높이가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고 해도, 그 둘을 신앙의 천칭에 올린다면 무게가 같아야 한다. 한쪽으로 일방적으로 기우는 믿음을 나는 신뢰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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