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향이 달라지면

김기석의 새로봄(184)

 

지향이 달라지면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지금 다시 일어난 것을 보고,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사실, 여러분은 나를 항상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나타낼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립보서 4:10-13)

 

세계적인 성악가 호세 카레라스는 경력의 절정기인 40대 초반에 백혈병에 걸렸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그는 살려주시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는 기도를 올렸다. 힘겨운 화학치료를 견뎌야 했지만 그는 결국 회복되었다. 그는 자기 재산을 다 정리해서 백혈병 재단을 만들고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돕기 시작했다. 고통과 시련을 통해 그는 재물과 명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고,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지향이 달라지면 삶의 빛깔도 달라진다.

 

 

 

 

 

립보 교인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 바울은 행여라도 사람들이 오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말한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빌립보서 4:11-12) 바울은 어떤 처지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의지적인 노력의 결과물이 아니다.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자꾸만 뭘 먹어도 헛헛증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 위胃가 비었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에 안정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닻을 내렸기에 바울은 이런저런 시련의 바람에 나부끼지 않는다.

 

바울이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본래적인 것과 비본래적인 것을 분별하는 능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편리함에 길들여진 몸과 마음은 외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널뛰기를 하게 마련이다. 더우면 덥다고, 추우면 춥다고 법석을 떤다. 어지간한 거리는 차를 타고 가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긴다. 조금만 불편해도 불평을 토해낸다. 편리함과 안락함에 중독된 이들은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이미 길들여진 사람들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사람들을 가리켜 ‘길손과 나그네’라고 말했다(히브리서 11:13). 그들은 하늘의 고향을 찾는 이들이다.

 

하늘 고향을 찾는 이들은 자기 욕망 위에 집을 짓지 않는다. 자기 삶을 누군가를 위한 선물로 기꺼이 내준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립보서 4:13)는 구절은 '그도 할 수 있고, 너도 할 수 있으니, 나도 할 수 있다' 류의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류의 사고에서 강조되는 것은 자기 강화의 욕망이다. 하지만 바울은 정반대의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그는 은혜 안에서 타자들에게 자신을 유보 없이 선물로 내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기도

 

하나님, 연거푸 다가오는 시련은 삶의 의욕과 용기를 깎아내립니다. 이래저래 시르죽어 지내다 보면 영문을 알 수 없는 원한 감정이 우리를 사로잡기도 합니다. ‘어떤 처지에서든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다는 바울 사도의 말이 실감나지 않습니다. 그 확고하고도 담백한 고백 속에서 한 자유인의 초상을 봅니다. 그런 흔쾌한 자유를 누리고 싶습니다. 욕망의 활화산 위에 인생의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들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누군가에게 선물로 내주며 살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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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길

  • 읽고보니 그렇네요.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09.30 08:59
  • 한결같은 걸음,
    반갑습니다.

    한희철 2019.10.01 06:48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75)

 

 보이지 않는 길

 

한동안 새들로 인한 고민이 컸었다. 날아가던 새가 목양실 창문에 부딪치는 일이 종종 일어나곤 했던 것이다. 한쪽 면이 모두 통유리로 되어 있으니 새들에게는 치명적인 구조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책상에 앉아있다 보면 “퉁!” 하며 유리에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가 들리고, 그러면 어떤 새는 용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날아갔지만 모든 새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창문 아래 바닥에 죽은 새가 보일 때가 있었다. 새가 부딪치는 것을 막아보려고 블라인드를 낮게 내리고, 가능하면 창문을 열어두었고, 공터에 키가 빨리 크는 나무를 심을 궁리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새가 부딪치는 일이 없어졌다. 가만 생각해보니 새가 부딪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왜 그럴까? 이젠 새들도 이곳에 유리벽이 있다는 것을 알아 피해가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는 일이다. 어찌 새들의 구역이 따로 있어 이곳을 지나는 모든 새들이 유리창을 숙지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한 가지 짚이는 것이 있다. 지금 창문 밖으로는 큰 건물 하나가 들어서는 중이다. 여선교회 안식관이다. 감리교 은퇴 여교역자들이 생활할 거처를 신축하고 있는 것이다. 제법 큰 건물이 맞은편에 들어서니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었던 풍경이 답답하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며 새들의 길도 달라진 것일 게다. 건물을 뚫고 날아올 수는 없는 것이니까. 건물을 피해서 날다보니 창문 쪽으로 날아올 일도 없어진 것이고, 더 이상 창문에 부딪치는 일도 없어진 것이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도 누군가의 길은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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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과 화 사이

김기석의 새로봄

 

복과 화 사이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너희의 이름을 악하다고 내칠 때에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아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다. 그들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너희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누가복음 6:20-26)

 

“복이 있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 너희의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헬라어의 어순에 따라 재구성한 것이다. ‘복이 있다’는 선언이 앞에 나오고 그 대상 혹은 이유가 뒤에 나온다. 단언적일 뿐만 아니라, 같은 구가 반복되기에 강렬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런데 ‘복’이라는 단어가 한국 교회에서 너무 낡은 말이 되어 버려서 원문의 뜻을 담아내기에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다. ‘복’으로 번역된 ‘마카리오스’를 일제 치하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이셨던 김교신 선생은 “환경이 지배할 수 없는 영혼 속에서 용출하는 내적 환희의 샘”으로 설명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정당한 관계 안에서 사람 된 자의 진정한 도를 따르는 데서 발생하는 것이다.(김교신 전집4, <성서연구>, 노평구 편, 32쪽)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은 요즘으로 치면 영 복 같지 않은 복이다.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슬피 우는 사람’, ‘배척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니? 이것은 오히려 화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지금 정말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 이들은 이 말씀에서 은혜를 받기보다는 상처를 받게 마련이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에 화를 내기도 한다. 마치 주님이 불의한 현실을 그냥 받아들이도록 권고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칼 마르크스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했다. 엄연한 고통의 현실에 눈을 뜨고 또 저항하지 못하도록 사람들의 영혼을 몽롱하게 만드는 마약이라는 것이다. 사실 역사 속에서 종교가 그런 역할을 한 때도 있었기에 마르크스의 말은 전적으로 그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난이나 굶주림을 미화하실 생각이 없다. 네 가지의 복은 24절부터 나오는 네 가지 화에 대한 선포를 배경으로 해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너희의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굶주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웃는 사람들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눅6:24-26)

 

이 대목 역시 원문에는 ‘화가 있다’는 구절이 맨 앞에 나온다. 그리고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이 나온다. ‘부요한 사람’,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 ‘모든 이에게 좋은 평판을 듣는 사람.’ 이 구절도 얼핏 이해가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혼신의 힘을 다하여 구하는 것이 아닌가. 이 말에 담겨 있는 속뜻을 헤아리려면 상상력이 조금 필요하다. 여기서 화가 있다고 선언된 사람들은 '타자' 혹은 '이웃'의 고통이나 불행에는 아랑곳없이 홀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 자기 의를 내세우는 사람들, 우월감에 들떠 남을 무시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사람들의 좋은 평판을 듣기 원하는 이들이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공감할 줄 모른다.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울 줄도 모르고, 그들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몸을 낮출 줄도 모른다. 복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화일 때가 많다.

 

*기도

 

하나님, 주님의 말씀은 가끔 우리의 일상적 판단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풍요로움을 구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십니다. 슬픔을 한사코 피하려는 이들에게 지금 슬퍼하는 자가 복이 있다 말씀하십니다. 이 전복적 진실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십시오. 믿음은 관념도 이론도 아닌 현실임을 깨우쳐주십시오. 지금 가난한 사람, 배고픈 사람, 슬퍼하는 사람, 배척받는 사람들 곁에 다가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줄 용기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 가운데서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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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를 안다면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74)

 

수고를 안다면

 

매일 아침마다 전해지는 고마운 문자가 있다. 이민재 목사님이 보내오는 성서일과 본문이다. 마치 일용할 양식을 전해 받는 느낌이다. 성서일과 본문을 받으면 먼저 읽은 뒤 정릉교회 교직원들과 시무장로님들께 보낸다. 같은 말씀을 나누는 것이 의미 있는 동행에 좋은 도움이 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받은 문자를 보내는 일은 기계에 영 서툰 내게도 어렵지 않은 일이다. 받은 문자를 길게 누른 뒤 전달 기능을 사용하면 된다.(어떤 기능을 두 번까지 해보는 것은 그래도 가능하다.) 

 

 

 

 

 

이번에 두 분 선배 목사님 내외분과 같이 여행을 하며 아침마다 보게 된 모습이 있다. 이민재 목사님은 아침마다 노트북 앞에 앉아 뭔가 작업을 했다. 원고를 쓰시나 싶어 여쭈니, 성서일과 본문을 보내는 일이었다. 보니 목사님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보내고 있었다. 문자를 받은 내가 단톡방을 통해 보내는 것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제법 많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보내고 있으니 시간도 제법 걸렸고, 수고도 여간이 아니다 싶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는 새삼 인사를 드렸다.


“늘 고맙게 받고 있지만, 앞으로는 더욱 더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야겠어요.”

 

사람 나이 여든여덟 살을 두고 ‘미수’(米壽)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쌀 미’(米)라는 글자가 ‘八’과 ‘八’이 합해진 글자이기 때문이다. 쌀 한 톨을 먹기 위해서는 농부의 손이 여든여덟 번 가야 하는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 모든 농부의 수고 위에 하늘의 은총에 보태지지 않으면 우리는 밥을 먹을 수가 없다.

 

누군가의 수고를 안다면 세상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것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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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를 삼키는 자들의 정체

한종호의 '너른마당' 2019.09.28 09:48

한종호의 너른마당

 

낙타를 삼키는 자들의 정체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마태복음 23:24).”

 

난폭한 시대다. 검찰은 죄를 찾는 게 아니라 죄를 발명해내고 있는 것만 같고 언론은 받아쓰기 외에는 하지 못한다. 교육에서 받아쓰기를 아예 없애야 할 판이고, 발명은 과학과목에서 폐기해야 하는 걸까?

 

한 나라의 법무부장관 임명과 관련해서 온통 이런 난리를 겪은 적이 있을까? 대선급 소용돌이다. 그만큼 검찰개혁이 민감하기 때문이다. 사생결판이 나야 끝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어느 쪽이 승리할 것인가이다.

 

적폐지속인가, 개혁추진인가? 이 갈림길에서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물러서는 순간, 개혁세력의 몰살이 닥친다. 강력해진 검찰권력은 무소불위의 힘으로 우리 사회를 관리하려 들 것이다. 어찌 이대로 두고 볼 것인가?

 

어디 정치판만 그런가? 대형교회 세습에 한 교단이 아예 몰빵을 했다. 기막힌 일이다. 무얼 더 가져야 속이 시원하다는 말일까? 주구장창 교회를 사유화하려는 세력의 권세가 추하다. 이미 그곳은 성전이 아니다. “강도의 소굴”일 뿐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선교역정에서 바리새파와 율법학자의 위선을 매우 강렬하게 미워하셨다. 그리고 여기에 더욱 중요하게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들의 정체를 폭로하신 점이다. 그것은 이들이 지닌 사회적 위치와 종교적 권위가 폭로의 대상에서 벗어나게 하고 있었다는 현실과 관련이 있다.

 

즉, 누구도 감히 그러한 작업을 할 용기나 생각을 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이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잘 알지 못한 채 그들의 지도자적 권위에 순종하는 일종의 종교적 세뇌에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예수께서 이들이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이 자신들의 종교적 선행을 포장하는 행위라는 점을 지적한 부분이다. 이들은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을 대단한 것으로 선전하고, 그것이 자신들의 의로움을 보장해주는 듯한 모습으로 세상에 알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들이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가치를 존중하고 종교생활의 기준을 거기에서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들이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이유는 낙타를 삼키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으로 자신들의 위치를 확보하고, 그 대가로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낙타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이만큼 순수합니다, 나는 이만큼이나 정직합니다, 나는 이만큼이나 학식이 높습니다. 나는 이만큼이나 희생해 왔습니다, 나는 이만큼 선행을 베풀어 왔습니다.” 등등은 사실은 전부다 낙타를 삼켜먹기 위한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행위라는 것이다.

 

“아, 욕심이 없으시군요. 아, 얼마나 자신을 버리고 희생해 오셨습니까?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군요. 오로지 높은 지혜에만 관심을 보이고 살아오셨군요.” 등의 평가를 얻어내어 낙타를 먹어치우기 위해 위장하는 자들은 도처에 있다.

 

가령, 정치판이 벌어지면 이렇게 ‘나는 하루살이를 걸러내고 사는 사람입니다’라는 자기발전의 선전을 우리는 수없이 목격한다. 그렇게 해서 얻어진 표와 자리가 주어지면, 그 다음에는 그의 위 속에 수 십 마리 낙타가 들어가는 것을 본다.

 

나는 소위 기독교 인사들이(진보와 보수를 망라하지만 진보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위선과 탐욕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교단선거뿐만 아니라 연합기관이나 자신의 교단과 기관에서 자리를 보전하거나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실은 낙타를 겨냥하면서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덕을 선전하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마음은 낙타에 가 있고 하루살이는 그걸 위한 도구가 될 뿐이다.

 

 

 

 

 

지금 우리는 나라의 운명을 감당하겠다는 이들의 말과 삶 속에서도 하루살이가 낙타를 얻기 위한 제물로 바쳐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자신이 살아온 바가 하루살이를 걸러내며 살아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욕없이 국가와 민족의 미래만을 위해 나섰다고 하지만, 그들이 사는 집과 재물과 삶의 스타일, 그 자손들의 행실은 낙타를 삼킬만한 위가 있지 않고서는 유지될 수 없는 것들임을 발견한다.

 

조국 장관의 자녀 문제로 쌍심지를 돋우고 있는 정치인들의 속을 들여다보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이미 뱃속에 낙타 몇 마리는 너끈히 집어삼키고는 하루살이조차 걸러낸 듯 재고 있다. 참으로 두꺼운 낯짝이다. 그걸 벗기려면 보다 예리한 칼이 필요할 것이다.

 

당대의 현실에서 예수께서는 이들의 정체를 폭로하시면서 ‘눈먼 인도자’라고 공박하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인도자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준을 알게 된다. 그가 낙타, 즉 거부하기 어려운 크기와 강도의 재물과 권세와 명예의 유혹 앞에서 자신의 진실을 포기하는가, 아닌가이다.

 

아, 이 어리석음여, 하나님 나라를 낙타에 비길까? 정작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놓치면서 낙타를 삼키겠다는 자들이 득시글거리는 세상에서 우리는 그 뱃속을 해부해야 하는 임무까지 맡았다. 참으로 고단하구나. 그래도 해야겠다. 욕심에 눈먼 자들이 인도하는 세상을 종치기 위해서.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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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의 한 자락

  • 창문 두개일까요? 땅에 앉아서 같이 나누어 먹는 사람을 뜻할까요? 글을 읽고 보니 한자가 새롭게 보이네요..
    감사합니다.

    이진구 2019.09.28 09:43
  • 마음껏 상상한ㄴ 것은 글을 바라보는 이의 몫이겠지요.

    한희철 2019.09.29 15:39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

 

 경지의 한 자락

 

小窓多明 작은 창가에 빛이 밝으니
使我久坐 나로 하여금 오래 머물게 하네

 

제주도 <추사기념관>에 걸린 추사의 글 중 마음을 찌르듯 다가온 글자는 ‘窓’이었다. ‘窓’이란 글자 대신 창문틀을 그려놓았으니, 그 자유분방함이 마치 달빛에 취한 사람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모든 글자가 그랬지만 또 하나 눈길이 머문 글자가 있었는데, ‘앉을 좌’(坐)였다. ‘坐’는 ‘흙’(土)에 ‘두 사람’(人+人)을 합한 글자로,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형상을 담고 있다. 그런데 추사는 ‘坐’를 쓰며 ‘土’ 위에 네모 두 개를 올려둔 것으로 썼다. 네모가 생각보다 큰데, ‘입 구’(口)로도 보이고 창문을 그렸나 싶기도 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漢字正解>를 펼쳐 ‘坐’라는 글자를 찾아보았다. 하나의 글자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갑골문(甲骨文), 금문(金文), 소전(小篆), 예서(隸書), 해서(楷書), 초서(草書), 행서(行書) 등으로는 어떻게 쓰이는 지가 담겨 있는 책이다. 그 중 예서에 해당하는 글씨를 보니, 추사가 쓴 글씨처럼 쓰여 있었다. 물론 추사의 글씨에서는 두 개의 네모가 꼭대기 부근에 자유롭게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찌 감히 추사의 글씨를 논할까만, 이미 추사는 글자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에 자유로움을 더해 마음껏 풀어내고 있었던 것이지 싶다. 소경이 코끼리 다리 더듬듯 헤아릴 길 없는 까마득한 경지의 한 자락을 어렴풋이 헤아려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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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없는 꿈이라 해도

김기석의 새로봄(

 

어처구니없는 꿈이라 해도

 

그 날이 오면,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통하는 큰길이 생겨, 앗시리아 사람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 사람은 앗시리아로 갈 것이며, 이집트 사람이 앗시리아 사람과 함께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스라엘과 이집트와 앗시리아, 이 세 나라가 이 세상 모든 나라에 복을 주게 될 것이다. 만군의 주님께서 이 세 나라에 복을 주며 이르시기를 “나의 백성 이집트야, 나의 손으로 지은 앗시리아야, 나의 소유 이스라엘아, 복을 받아라” 하실 것이다.(이사야 19:23-25)

 

꿈은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꿈꾸는 이들은 몽상가 혹은 현실 부적응자 취급을 당하곤 한다. 그러나 역사는 그런 이들을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돌입하는 법이다. 꿈을 버리는 순간 비관주의와 허무주의가 우리를 확고하게 지배한다. 평화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꿈은 어처구니없어 보일 때도 있지만, 그 꿈은 강고한 현실에 작은 틈을 만드는 법이다. 미국 유니온 신학교의 종신교수인 정현경 박사는 알자지라 TV에서 본 한 광고를 즐겁게 기억한다.

 

“이스라엘의 어린 소년이 축구를 하다가 실수로 축구공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가르는 높은 시멘트 담 너머로 넘겨버리는 것이다. 실망한 소년은 시멘트 담에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팔레스타인 쪽을 들여다봤다. 그러자 저쪽에서 놀고 있던 또래의 팔레스타인 소년이 그 소년의 얼굴을 보고는 씨익 웃으며 그 공을 힘껏 차 담을 넘겨 돌려보내준다.”(현경, <신의 정원에 핀 꽃들처럼>, 126쪽)

 

 

 

 

 

중요한 것은 그 ‘틈’이다.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작은 틈이 없었다면 이런 멋진 장면은 연출될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 있는 장벽 사이에 시소가 놓이자, 이쪽과 저쪽의 아이들이 시소를 타고 노는 장면을 보았다. 장벽을 깨뜨리는 상상력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그 틈으로 평화의 바람이 불었다. 기독교인들은 그런 ‘틈’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전혀 소통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게 해야 한다. 예수님은 세상이 그어놓은 모든 경계선을 가로지른 분이다.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의인과 죄인, 성과 속 사이에 길을 내 서로 통하게 만드셨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이 삶으로 만드신 그 길을 우리 길로 삼아 살아가는 것이다.

 

“그 날이 오면, 이집트에서 앗시리아로 통하는 큰길이 생겨, 앗시리아 사람은 이집트로 가고 이집트 사람은 앗시리아로 갈 것이며, 이집트 사람이 앗시리아 사람과 함께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이사야 19:23)

 

이사야는 기존질서를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적대관계였던 나라들이 서로 소통하고, 함께 세상 여러 나라에 복을 매개하는 꿈을 꾼다. 이런 꿈이 없어 세상은 거칠고 빈곤해졌다. 역사적 상상력을 억압하고 세상을 시장으로 바꾸는 정치를 바로잡을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사람들은 어리석은 꿈이라 말할지 몰라도 우리는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가 세상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 아닌가.

 

*기도

 

하나님, 현실에 적응하며 사는 동안 우리는 날개를 잃은 새처럼 살고 있습니다. 몸은 비대해졌지만 정신은 왜소해졌고, 땅의 현실에 몰두하다보니 하늘을 잊었습니다. 경쟁과 불화가 우리의 자연 상태인 것처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적대 관계에 있던 이들이 함께 손을 잡고, 서로에게 복이 되는 세상을 꿈꾸었던 이사야의 그 꿈을 우리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우리를 확고하게 사로잡고 있는 강고한 편견과 적대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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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窓)

  • 목사님 사진에 그 글씨가 창문 '창' 인가요?

    이진구 2019.09.27 09:46
  • 창문을 형용문자로 쓴 것 맞죠. 형상문자라고 하나요?

    이진구 2019.09.27 10:53
  • '상형문자' 아닐까 싶습니다.

    한희철 2019.09.27 22:28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273)

 

 창(窓)

 

때늦은 휴가를 다녀왔다. 교회 안의 여름행사를 모두 마치고, 다른 교직원들이 모두 휴가를 다녀온 뒤에 떠나니 마음이 홀가분했다. 휴가철이 끝나서인지 가는 곳마다 한적한 것도 좋은 일이었다. 두 분 선배 목사님 내외분과 함께 제주도를 다녀왔는데, 하필이면 뒤늦게 찾아온 태풍으로 인해 떠나는 것 자체가 아슬아슬했다. 줄줄이 취소되었던 항공편이 우리가 예약한 비행기부터 가능했으니까.

 

제주도는 갈 때마다 새롭게 느껴진다. 오래 머물 일이 없다보니 그럴 것이다. 섬이면서도 늘 새로운 세상으로 다가온다. 이번 여행도 그랬다. 따로 급할 것도 없고 굳이 지켜야 할 일정도 없이 마음가는대로 움직였는데, 그런 마음을 안다는 듯이 섬은 가슴을 열 듯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자유롭게 정해진 일정 중에 <추사기념관> 방문이 있었다. 추사가 유배를 왔을 때 머물던 집에 세운 기념관이었다. 주차장도 널찍했고, 입장료도 없었다.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기념관의 모양을 ‘세한도’에 그려진 집 모양대로 지은 것이었다. 어서 유배의 시간에서 벗어나고 싶은 추사의 마음이었을까, 세한도 그림 속 집에는 유일하게 문이 하나 그려져 있는데 기념관은 그 문마저 건축물에 반영하고 있었다.

 

 

 

 

 

휴가 중 추사기념관을 찾은 보람은 단 하나, 그곳에서 만난 글씨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며 넓지 않은 기념관을 둘러보다가 추사가 쓴 글씨들을 만났다. 그 중의 하나가 현판을 탁본한 것이었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小窓多明 使我久坐
작은 창가에 빛이 밝으니 나로 하여금 오래 머물게 하네

 

글의 내용도 좋았고, 그런 내용을 담아낸 글씨도 좋았다. 마치 추사가 작은 창가에 앉아 빛을 즐기고 있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유난히 마음에 다가온 글자가 하나 있었다. ‘窓’이었다. 그 글자를 보는 순간, 마치 창(槍)에 찔리는 것 같았다.

 

추사는 창이라는 글자를 쓰는 대신 창을 그려놓았다. 설마 추사가 창이라는 한문을 떠올리지 못했을 리는 만무할 터, 작은 창에 가득 머문 맑은 빛에 취한 듯 창틀을 그리는 것으로 글자를 대신한 것이었다.


추사의 글씨 속에 흐르는 자유로움은 곧 그의 마음이었던 것이었다. 창이라는 글씨를 쓰는 대신 창을 그릴 만큼. 추사의 마음 한 자락 마음에 담고 돌아설 때, 문득 돌담을 끼고 불어오는 제주의 바람은 유난히 자유롭고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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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밝으면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300)

 

눈이 밝으면

 

이따금씩 책을 선물할 때가 있다. 책을 선물하다보면 받는 이로부터 부탁을 받는 일이 있는데, 서명을 해 달라는 부탁이다. 그러면 그냥 이름만 적는 것이 뭣해 짧게 한 마디를 적곤 하는데, 대부분은 불쑥 떠오르는 말을 적게 된다.

 

 


 

 

<어느 날의 기도>를 선물로 전하고 싶으니 앞에 서명을 부탁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책을 열었다. 그리고는 막 떠오르는 생각 하나를 적는다.

 

눈이 밝으면
세상이 밝고
귀가 환하면
세상이 환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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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로의 초대

김기석의 새로봄(200)

 

공동체로의 초대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하여, 모두들 떼를 지어 푸른 풀밭에 앉게 하셨다. 그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앉았다. 예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어서, 하늘을 쳐다보고 축복하신 다음에, 빵을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셨다. 그리고 그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빵 부스러기와 물고기 남은 것을 주워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빵을 먹은 사람은 남자 어른만도 오천 명이었다.(마가복음 6:39-44)

 

‘빈들’, ‘어둠’, ‘배고픔.’ 예수를 따라왔던 이들이 처한 상황이 딱하기는 하지만 제자들에게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유일한 해결책이 그들을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님의 생각은 달랐다. 주님은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허기진 그들을 차마 그냥 돌려보내실 수 없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제자들은 그들을 먹이려면 적어도 200데나리온 어치의 빵이 필요한데, 그럴 돈도 없고 또 설사 있다 해도 빵을 구할 데도 없다고 말씀드렸다.

 

“너희에게 빵이 얼마나 있느냐? 가서, 알아보아라.” 제자들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알아본 후에 말한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주님은 많다 적다 평가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시켜 무리들을 떼를 지어 푸른 풀밭에 앉게 하셨다. 무리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앉았다. 우리는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잘 안다. 주님은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며 축사하신 후에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을 거두니 열 두 광주리가 되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앉도록 하셨다는 대목이다. 배분의 편의를 위한 조치였을까? 그럴 수도 있지만 조금 다른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무리를 공동체로 초대하신 것이다. 라르쉬 공동체의 설립자인 장 바니에는 “공동체란 모든 사람이―아니 좀 더 현실적으로 보아 대다수가―자기중심이라는 그늘에서 빠져나와 참된 사랑의 빛 속으로 들어가는 장소”(<공동체와 성장>, 17쪽)라고 말했다. 무리는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기는 하지만 역사 변혁의 주체가 되기 어렵다. 하지만 공동체에 속한 사람은 다르다. 그들은 서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함께 느끼고 괴로워하고, 서로의 필요에 응답한다. 공동체는 우리가 잃어버렸던 소속감을 회복시켜 준다. 공동체는 우리의 새로운 고향이다.

 

예수님은 자칫하면 익명성 속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들을 공동체로 초대하신 것이다. 그들은 광야에서 사랑의 기적을 함께 체험한 사람들이 되었다. 함께 있음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깨닫자 내면의 어둠이 스러지고 상처가 아물었다. 현대인들은 익명의 대중이 되어 살아간다. 외로움은 당연한 귀결이다. 적대적인 눈빛, 경계하는 눈빛들이 우리 가슴에 자꾸만 생채기를 낸다. 주님은 익명의 대중들이 경계심을 풀고 서로를 바라보는 따뜻한 공동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입구임을 보여주셨다.

 

*기도

 

하나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명령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당황했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들은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기에 어떤 일을 시작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우리의 가능성이 그칠 때 하나님의 가능성이 열림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외로운 세상이지만 곁에 선 이들의 손을 붙잡아 주면서 아름다운 세상을 향한 순례를 멈추지 않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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