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에게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42)


형에게


문득 떠오른, 오래 전에 썼던 글 하나가 있다. 왜 그것이 떠올랐을까 싶은데, 어쩌면 그 말이 그리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형!
-응?
-형도 울고 싶을 때가 있어?
-응!
-언제?
-아무 때나.
-형은 항상 웃었잖아.
-두 번 웃기 위해 세 번은 울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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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란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41)


희망이란


‘희망은 신앙과 사랑의 한 복판이다’


교회력을 따라 교단에서 발간하는 잡지 <강단과 목회>를 읽다가 만난 한 구절이다. 성서일과로 주어진 본문은 에스겔 37장, 마른 뼈들에 관한 환상이었다. 





‘희망은 신앙과 사랑의 한 복판이다’라는 말이 새롭고 신선하게 와 닿았는데, 그 말 옆에 인용한 성경구절이 고린도전서 13장 13절이었다. 잘 알고 있는 말씀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을 그렇게 이해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소망은 믿음과 사랑 사이에 있다. 


익숙한 말씀을 새롭게 새기자 의미가 새로워진다. 설교자가 선 자리는 그곳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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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처음 태어난 말, "제발, 꽃 보러 오지 마세요!"

신동숙의 글밭(122)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난 말, "제발, 꽃 보러 오지 마세요!"


봄이 오면 장사익 소리꾼의 곡조가 봄바람처럼 불어오는 듯합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둘째가 세 살이 되고 엄마 품을 벗어나려던 오래전의 이야기입니다. 거실에 펼쳐둔 신문을 넘기다가 하얀 목련꽃 한 송이처럼 눈에 들어온 사진이 있었습니다. 하얀 한복을 곱게 입은 장금도 명인의 하얀 춤사위. 진옥섭 연출가의 땀으로 장금도 명인의 민살풀이를 국립국악원 예악당 무대에 올린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어쩌면 이 생애 마지막 무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글줄에 예약을 부탁했습니다. 그해 6월, 저는 그렇게 십 여 년만에 자유의 몸이 되어서 혼자서 호젓이 서울행 KTX에 올랐습니다. 


6월의 서울 거리는 따사로웠습니다. 졸업 후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한 곳이 서울입니다. 강산도 변한다는 긴 세월을 훌쩍 넘기고, 오랜만에 걷던 가벼운 발걸음마다 그 시절에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 꽃처럼 다시 피어나는 듯했습니다. 라일락꽃이 한창이던 6월의 어느 날, 돈암동 성신여대 앞 태극당 맞은 편에서 222번 버스를 타고 가던 이른 아침 출근길. 버스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히다가 깜짝 놀라서 몸을 바로 세우고 또 부딪히고, 그렇게 모자란 잠을 꾸벅이다가 잠결에 내린 압구정 3호선 버스 정류장, 그 바쁜 출근길에 청담동 언덕길을 없는 듯, 제 뒤를 따라와서 명함을 내밀던, 어느 종갓집 장손처럼 단정하게 생긴 청년의 수줍은 눈빛. 2년 남짓 생활하던 서울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아픈 사연도 있었지만, 세월이 한 구비 두 구비 흐른 탓인지 좋았던 기억들만 아름다운 선물처럼 남아 있습니다.


제가 앉은 곳은 관람석이었지만, 장금도 명인의 춤사위에 제 호흡을 실었습니다. 고요히 손끝으로 흐르는 선을 따라서 하얀 저고리가 허공에 그리는 수묵화 같은. 가벼운 듯 무거운 발뒤꿈치 끝이 내딛는 땅은 매 순간 이 세상 처음의 땅 같은. 가슴에서 숨이 드나들 듯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무의 춤 같은. 흐르는 물처럼 구름처럼 고독 속에 호젓이 구도자가 걷는 침묵의 길 같은 장금도 명인의 춤사위. 그 긴 침묵을 깨고 봄바람처럼 불어온 소리가 소리꾼 장사익이었습니다. 그 역시 가슴에서 샘솟듯 꽃을 피우듯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 산제비 넘나들던 성황당 길에~"



많고 많은 사건 사고들에 아랑곳없이 올해도 어김없이 남쪽에선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옵니다. 제주도에서 피기 시작한 매화는 섬진강으로 진해로 경주로 점점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페북에 연일 올라오는 벗님들의 꽃소식들로, 세상의 무겁고 어두운 소식들 사이에서도 틈틈이 가슴이 환해집니다. 산수유, 목련, 민들레, 꽃다지, 진달래, 벚꽃, 유채꽃, 제비꽃, 튤립......  추운 겨울을 견딘 후 올해도 한결같이 피어나는 꽃들이 한창인 봄날입니다.


이 봄날에 "제발, 꽃 보러 오지 마세요!" 이 땅에 무수히 많은 봄이 찾아왔지만, 아마도 이 세상에 처음으로 태어난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봄바람을 막으려는 무모한 일처럼 꽃놀이를 막으려는 마음들의 힘겨움이 조금은 헤아려지기에, 어쩔 수 없이 막아야만 하는 그 마음들이 무겁게 다가옵니다. 민살풀이의 장금도 명인이 내딛던 가벼운 듯 무거운 발걸음처럼 긴 호흡처럼, 훌쩍 떠나고픈 가벼운 마음을 내려놓고 또 내려놓으려 합니다. 


그렇지만 집 안에서 생활해야 하는 이 봄날에도, 사람은 사람이라서 아름답습니다. "~ 꽃이 피면 같이 웃고 / 꽃이 지면 같이 울던~" 가슴으로 숨을 쉬는 일이 또한 가슴으로 꽃을 피우는 일임을 스스로가 알아차릴 수 있다면, 매 순간을 영원으로, 지상에서 천국을 사는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같이 웃고, 같이 울고, 같이 아름다울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이 또 있을까 하는 마음입니다.  


겨울나무의 고독과 침묵 속에서 활짝 피운 봄꽃처럼, 지난한 일상 속에서 틈틈이 멈추어, 고독과 침묵 속에서 불어오는 성령의 자유자재하신 하나님을 봄바람처럼 느낄 수 있다면, 거룩한 성전인 제 가슴에도 꽃 한 송이 피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봄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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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이란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40)


사순절이란





나만 아픈 줄 알았는데
나만 힘든 줄 알았는데
나보다 더 아픈 당신
나보다 더 힘든 당신
미련함으로
송구함으로
뒤늦게 깨닫는


사순절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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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로 손 씻기와 설교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39)


비누로 손 씻기와 설교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일상으로 자리 잡은 습관이 두 가지 있지 싶다. 기침이나 재채기를 할 때 손 등으로 가리고 하는 것과, 손 씻기를 자주 하는 것이다. 손을 씻을 때 비누로 손을 씻으면 소독제를 바르는 것보다도 효과적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들은 대로 비누로 손을 씻다가 엉뚱한 생각을 한다. 혹시 비누로 손을 씻으면 효과적이라는 말은 유머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비누로 손을 씻으면 손이 미끌미끌해지고, 미끌미끌해진 손을 닦아내려면 한참 물로 닦아야 한다. 비누가 손 구석구석에 묻었으니 비누를 다 닦아내려면 손 구석구석을 닦아야 한다. 그렇게 비누를 없애느라 손을 닦다보면 나도 모르게 손을 열심히 오래 제대로 닦아야만 한다. 비누가 효과적이라는 말은 얼마든지 과학적인 근거가 있겠지만, 내게는 단순한 유머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는 설교가 그랬으면.
그렇게 쉽고도 당연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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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뜰에서 불어오는 맑고 투명한 바람

신동숙의 글밭(121)


속뜰에서 불어오는 맑고 투명한 바람


세상에서 불어오는 무거운 소식들로 연일 답답하고 무거운 가슴입니다. 답답하고 무거운 가슴을 내려놓을 곳이 마땅치 않아서 어설프게 안고서 주신 하루의 언저리를 서성거렸습니다. 유튜브로 법정스님의 법문을 듣다가, 고미숙 고전평론가의 강의도 듣다가, 목사님의 말씀을 듣다가, 가는 곳마다 법정 스님의 저서 <홀로 사는 즐거움>을 끼고 다닌 하루였습니다. 


저녁밥을 먹은 후 마저 치우지도 못하고, 법정 스님의 <홀로 사는 즐거움>을 챙겨서 떠들썩한 식구들의 세속으로부터 벗어나 잠시 출가를 하였습니다. 식구들로부터 떠나와서 출가를 하는 장소는 거실 쇼파가 되기도 하고 제 방이 되기도 합니다. 


식구들과 함께 한 집에 살면서도 서로가 참 다르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는 다 챙겨주고 일일이 간섭하기보다는 언젠가부터 어설픈 엄마가 되기로 하였습니다. 점점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잠시 잠깐 주어지는 엄마의 빈 자리가 도리어 선물 같은 시간이 되는 것 같습니다. 


늦은 밤에 딸아이는 떡볶이를 만들겠다고 합니다. 낮에 아들은 누나 곁에 나란히 앉아서 저도 따라서 색색깔 쿠키 반죽을 빚습니다. 사용설명서를 봐 가면서 오븐에 굽기까지 저 혼자서 다 해냅니다. 엄마의 역할은 그런 자녀들의 모습에 틈틈이 감탄하면서 맛있게 먹어 주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홀로 사는 즐거움>을 이미 예전에 읽으면서 연필로 연하게 밑줄을 긋고 동그라미를 친 흔적이 많이 있습니다. 거듭 다시 읽어도 읽을 때마다 새롭고, 맑은 샘물을 마신 듯 푸른 하늘을 본 듯 제 속뜰로 맑고 투명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귀한 글들 중에서,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이 봄날에 함께 나누고픈 단락이 있어서 그대로 옮깁니다. 


"<마태복음>에 이런 구절이 있다.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지만 그 모진 추위와 비바람과 뙤약볕에도 꺾이지 않고 묵묵히 참고 견뎌낸 그 인고의 의지가 선연한 꽃으로 피어난 것이다. ≪소로우의 일기≫에서 소로우는 이렇게 쓰고 있다.
  '꽃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그에게 있는 아름다운 침묵이다.'

앞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한바탕 쓸고 닦아냈다. 아침나절 맑은 햇살과 공기 그 자체가 신선한 연둣빛이다. 가슴 가득 연둣빛 햇살과 공기를 호흡한다. 내 몸에서도 연둣빛 싹이 나려는지 근질거린다."(법정, <홀로 사는 즐거움>, 63~64쪽)


그 옛날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홀로 봄을 맞이하시던 법정 스님의 모습이 고요하고 투명하게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합니다. 글숲을 거닐며 스님의 속뜰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이 답답하던 가슴을 슬고 지날 때마다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입니다. 어쩌면 제 가슴을 누르던 것은 바윗돌이 아니라 쌓이고 쌓여서 두터워진 모래 먼지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슬고 슬고 슬면 얼마든지 맑게 슬어낼 수 있는 세상의 먼지, 때때로 진흙탕이 될 때면 한 송이의 연꽃을 피울 수도 있는 그만치의 탁한 세상 말입니다. 이 땅에 한결같이 찾아와 줘서 고마운 봄날, 세상에서 불어오는 탁한 바람을 씻기는 건, 자연의 봄바람과 맑은 영혼의 속뜰에서 불어오는 맑고 투명한 바람인가 봅니다. 


딸아이는 자기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남편과 아들은 둘이서 얘기를 나누는지 두런두런 들려오는 말소리가 정겹습니다. 그제서야 홀로 글숲을 거닐던 순례길에서 돌아와 저녁식사 뒷정리를 하러 주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늦은 밤 유튜브로 법정 스님의 육성 법문을 틀어 놓고 설거지를 하기로 했습니다. 듣다가 울컥 울컥 눈물이 나서 기침을 막으라는 팔꿈치로 눈물을 닦아 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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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지 다섯 롤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38)


화장지 다섯 롤


독일에 사는 아이들이 걱정이 되어 전화를 했더니 독일도 거의 모든 일상이 멈춰 섰다고 한다. 꼼짝없이 집 안에 갇혀 지내고 있단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이제 나라와 대륙을 너무도 쉽게 무시한 채 맘껏 활보하고 있다 여겨진다.


부모로서 제일 걱정되는 것은 한결같다. 밥은 제대로 먹는지, 아프지는 않는지를 물었다. 답답하지만 그래도 잘 지내고 있다니 고마운 일이었다. 뉴스를 통해 사재기 소식을 들었던 터라 쌀과 마스크, 화장지가 있는지를 물었다.




쌀은 별 문제가 없고, 마스크는 있으나 마나란다. 마스크를 쓰고 나가면 환자 대하듯 바라보는데, 더욱이 아시아인이 쓰고 있으면 마치 바이러스 숙주를 바라보는 것처럼 따갑게 바라보아 불편하기 그지없다는 것이었다. 


화장지는 이제 다섯 롤이 남았단다. 마트에 가도 화장지 진열대가 비어 있다는 것이다. 걱정이 되어 “화장지를 보내줄까?” 물었더니, 큰 소리로 웃는다. “무슨 화장지까지 보내줘요.” 하면서 어떻게든 구해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직 5롤이나 남았는데요, 뭘.” 한다. 멀리서 걱정할까 싶어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통화를 마치며 괜히 미안했다. 이 어려울 때 곁에 있어주지 못한다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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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는 손님 모시듯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37)


찾아오는 손님 모시듯


‘좋은날 풍경’ 박보영 집사님이 노래 하나를 보내주었다. 흔하게 쓰는 카톡을 통해서도 노래를 보낼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여전히 신통방통이다.

 




‘봄’이라는 노래인데, 명함처럼 생긴 종이 위에 노랫말을 손 글씨로 적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곁에 찾아왔지만 놓치고 있는 봄의 정취를 나눌 겸 아는 이들에게 노래를 보냈다. 나도 노래를 보낼 수 있다니, 이 또한 신통방통!


행여
꽃잎 떨굴까
내리는 봄비
조심스럽고


행여
미안해할까
떨어진 꽃잎
해맑게 웃고


오래 전에 쓴 짤막한 글이다. 비에 젖은 채 떨어진 예쁜 꽃잎을 보다가 지나가는 생각이 있어 옮긴 것인데, 우연처럼 글자 수가 맞았다. 


더러는 내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찾아오는 손님을 만나듯 글을 쓸 때가 있다. 그렇게 써지는 글에 오히려 마음이 오롯이 담긴다. 나를 찾아오시는 손님일랑 언제라도 정성으로 모실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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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금단 현상인가, 예수 따르기인가

신동숙의 글밭(120)


예배 금단 현상인가, 예수 따르기인가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을 말한다면 침묵을 해야 하지만, 예배당 안에서 무리하게 예배 모임을 강행하려는 일부의 교회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 이야기입니다. 연일 드물게 올라오는 포스팅에 답답한 마음이 가시질 않아서 제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현재 코로나 집단 감염 예방을 위한 공공수칙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전국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현 시국입니다. 그런 중에 일부의 기독교 목회자와 성도들의 모습에서 예배 금단 현상을 보고 있습니다. 중독과 금단 현상이란 곧 나의 신앙이 깨어 있지 못한, 졸음 운전처럼 졸음 신앙이라는 증거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종교란, 나와 이웃의 생명을 살리려, 깨어 있는 사랑이 될 때에만, 존재의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요. 그런 사랑이란, 매 순간 깨어서 나와 이웃을 보살피려는, 자비와 긍휼의 마음이 아닌가 하고요. 그처럼 열린 가슴에는 보다 이기적인 중독이 아닌, 보다 이타적인 중심이 자리 잡을 테니까요.


월 회원권을 끊어 놓고 헬스장과 수영장을 다니며 몸을 푸는 사람들은 하루만 쉬어도 몸이 무겁다고 합니다. 새벽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시는 권사님들은 어쩌다 새벽기도를 빼먹은 날은 하루가 영 시원찮고 허전하다 하십니다. 그리고 쉼없이 새벽기도의 재단을 쌓으십니다.


하지만 종교 생활이 단순히 하루의 몸풀기를 위한 중독의 대상으로 전락 될 때, 그렇게 졸음 종교가 향하는 길은 노쇠함이 아닌가 하고요. 저 역시도 빌었던 기도 제목처럼, 제 일신과 가족의 안락함과 물질의 부유함과 어딘지 모호한 세계 평화만을 기도 제목으로 삼으려는 기복신앙은, 맹목적 믿음을 낳고, 맹목적 추종을 낳고, 맹목적 졸음 종교인을 낳고, 중독적 종교 생활인을 낳고, 주변의 이웃들과 사회에 대해선 점차 무관심으로 흐를 소지가 다분한 종교적 태만이 아닌가 하고요. 토머스 머튼의 말처럼, '세례는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 구원의 시작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삶 속에서 종교생활이 마약처럼 단지 중독의 대상일 뿐이라면, 그것은 생명이신 예수의 복음에 대한 신성 모독은 아닌가 하고요. 성령이 살아서 역사하는 신앙인의 가슴에선, 예배가 맹목적 믿음의 중독이 될 순 없을 것 같습니다. 가슴에 성령이 살아서 역사하시기를 간절히 원하는 신앙인의 가슴은, 닫힌 가슴이 아닌 열린 가슴일 테니까요. 머튼의 말처럼, '한 종교인의 영적 성숙도는 개방성에 있습니다.' 이방인과 이웃을 향해 언제나 열린 가슴이셨던 복음의 예수를 다시금 떠올려봅니다.


이웃들도 먼저 믿은 기독교인처럼, 똑같이 보고 똑같이 느낄 수 있는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뿌리에서 분화된 개체이니까요.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겐 너무나 상식이 된 개념이기도 합니다. 교회 건물 밖에 있다고 해서, 노아의 방주 밖에 있다는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그 옛날 예수는 예배당만을 찾아다니면서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전하시진 않으셨으니까요. 오늘날에도 당분간 예배당 안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고 하여, 삶 속에서 예배가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기를 원하시는 성전은 신앙인의 몸이니까요. 우리의 몸이 성전이니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고 이미 말씀하고 계시듯이요.


자유이신 하나님을 예배당 건물 안에만 가둬 놓는 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유이신 하나님은 이 세상 어디든 가실 수 있는 살아 계신 분일 테니까요. 예전처럼 함께 모여서 간절히 주일 예배를 드리고 싶어하는 마음들을 모르는바는 아닙니다. 예전처럼 예배당 안에서 늘 가족처럼 함께 기도하며, 함께 예배 드리고, 함께 식사하며,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살갑게 지내던 성도들이 보고 싶고 그리운 마음들임을 모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내 가족과 내 교회의 교인이 소중한 만큼 주위에 이웃도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잃어버린 마지막 한 명까지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교회 안에 있든, 교회 밖에 있든 자기가 선 자리에서, 매 순간을 깨어 있으려는 자비와 긍휼의 모습으로, 세상을 비추어 주는 기독교가 저는 언제나 그립습니다. 그리고 간절합니다. 기독교를 손가락질 하는 세상 사람들 조차도, 그들의 마음 한 켠에선, 어느 순간 기독교인들이 따뜻한 가슴을 보여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따스한 가슴이란, 나와 너가 다르지 않다는 하나된 가슴에 불붙는 온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따스한 가슴으로부터 나오는 사랑은 빛과 소금 같아서, 거리의 전도지와 말이 없이도 가슴으로 바로 느낄 수 있는 그런 따스한 사랑일 것입니다. 예수가 하늘로 오르시며 이방인이나 모든 사람의 가슴마다 공평하게 성령을 선물로 주고 가셨으니까요.


저에겐 매일 찾아오는 하루가 암흑과 혼돈으로 시작됩니다. 그 무거움으로부터 하루를 깨우는 말씀이 있습니다. 현실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눈을 뜨게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거듭 스스로에게 되뇌이는 것은, 저에게 다가오는 매 순간이 암흑과 혼돈 같기 때문입니다. 저는 늘 어렵습니다. 여기서부터 하루의 첫걸음, 어쩌면 매 순간의 첫걸음을 내딛으려 거듭 이 말씀을 먹고 아니, 품고 살아가려 하는지도 모릅니다. 육신의 호흡처럼 가슴이 그 한 말씀으로 끊임없이 숨을 쉬기를 원하는지도 모릅니다.


내딛는 한 걸음에 등불 하나를 조심스레 비추는 말씀,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 세상의 무수한 가치관과 혼돈의 땅을 살아가는 저에게 예수가 보여준 온전한 마음이 없었다면, 아니 몰랐다면 제 인생은 여전히 암흑과 혼돈 속에 헤매었을 지도 모릅니다. 진리의 영으로인한 그러한 스스로에 대한 물음과 인도하심이 아니라면, 세상은 그야말로 사이비 신천지와 극악무도한 n번방과 극도의 혼돈과 암흑의 세상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는 제가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이유가 됩니다. 길이 되고 진리가 되고 빛이 됩니다. 예수가 보여준 온전한 마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하나님과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한 말씀을 등불처럼 씨앗처럼 품기를 원합니다. 아마도 육신의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을 영혼의 숨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현실은 코로나19 바이러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킴으로, 다함께 무사히 견디며 지나가기를 바라고 있는 중요한 때입니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제 스스로에게 거듭 던지는 물음을 되묻고 싶습니다. 그리고 혹시 예배 금단 현상으로 마음에 갈등을 겪고 계시는, 일부 기독교의 목회자와 성도들에게도 묻고 싶습니다. '나의 현재 신앙의 반응이 단순한 예배 금단 현상인가, 예수 따르기인가.' 그리고 또 거듭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의료진들을 비롯해서 구석구석 애쓰시는 분들이, 세상엔 드러나지 않은 곳에 더 많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이라면, 가슴에 살아 있을 성령과 예수가 가시고자 하는 곳으로 마음이 따라가기를. 안락한 예배당만이 아닌 가난하고 소외되고 어려움을 겪는 이웃들에게로, 몸이 갈 수 없다면 마음이라도 흘러갈 수 있기를, 예수라면 그리 하시지 않을까 싶은 마음입니다. 제가 성경에서 본 예수는 그런 분이시기에.


오늘의 한 걸음에 비추는 등불 하나는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 묵은 교리와 종교적 전통과 맹목적 믿음과 잠든 중독과 금단 현상들의 낡은 옷을 벗고, 홀가분한 자유의 날개옷을 입으신 예수를 가슴에 품기를 스스로가 원합니다. 종교가 예배 금단 현상을 일으키는 마약이 아닌, 깨어 숨 쉬는 생명과 자비와 긍휼과 사랑의 물길이 되어 세상으로 흐를 때에만, 살아 있는 종교로써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가 이 땅에 존재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 않은가 하고요. 그리고 이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기가 지나고 더불어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그러한 교회를 통해서 예수의 복음은, 빛과 소금이 되어서 세상을 향해 비출 수 있을 테니까요. 여기까지 좀 지루한 사색의 산책길을 걸어왔습니다. 여기까지 다 읽으신 분들에게서 인내심의 은총을 봅니다. 노란 유채꽃이 살랑이며 푸른 하늘을 맑게 흔들어 놓고 있는 봄날입니다. 이제막 벚꽃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이 아름다운 자연이 들려주는 경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오늘도 매 순간 고요한 예배의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내 영혼이 비로소 안식을 누리는 침묵의 기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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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쓸한 뒷모습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436)


 씁쓸한 뒷모습


토요일 오후, 설교를 준비하던 중 잠시 쉴 겸 밖을 내다보는데 예배당 바로 앞 공터에 누군가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나이가 지긋한 한 부인이 원예용 부삽을 들고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공터에 꽃씨를 심는 줄 알았다. 교인이 아닌 이웃이 교회 앞 공터에 꽃씨를 심는다면 꽃처럼 아름다운 마음, 찾아가서 인사를 해야지 싶어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부인 옆에는 화분이 있었는데, 화분에 흙을 채우고 있었다. 마당이 없는 이가 화분에 흙을 채우기 위해 왔구나 싶었고, 설교준비를 이어갔다. 잠시 시간이 지난 뒤 이제는 갔을까 싶어 다시 내다보니 부인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부인은 조금 전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흙을 채운 화분에다 주변에 피어난 제비꽃을 캐서 옮겨 담고 있었다. 보랏빛 제비꽃이 무리지어 예쁘게 피어났는데, 교회 조경 일을 맡은 홍 권사님이 정성껏 심은 제비꽃이었다.


아차 싶어 창문을 열고서는 그러지 마시라고, 교회에서 일부러 심은 꽃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부인은 당황해 하며 미안하다고 했다. 공터에 예쁜 꽃이 피어 있어 캐가도 되는 줄 알았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으며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싶었다. 그런데 부인은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이왕 캤으니 캔 것은 가져갈게요. 다시 땅에 심으면 아무래도 죽을 것 같네요.”


말문이 막혀 대답을 못하고 있는 사이 부인은 화분을 들고 자리를 옮겼다. 보랏빛 제비꽃이야 어디서든 아름답겠지만, 그 꽃을 들고 돌아서는 뒷모습은 씁쓸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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