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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50

해가 서산을 넘으면 한희철의 얘기마을(55) 해가 서산을 넘으면 해가 서산을 넘으면 이내 땅거미가 깔립니다. 기우는 하루해가 갈수록 짧습니다. 땅거미가 깔리기 시작하면 예배당 십자가에 불을 밝힙니다. 털털거리는 경운기에 하루의 피곤을 싣고 어둠 밟고 돌아오는 사람들, 조금이라도 따뜻한 기운으로 그들을 맞고 싶기 때문입니다. 떠나가고 없는 식구들 웃음처럼, 따뜻한 불빛처럼, 땀 밴 하루의 수고를 맞이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매일 저녁, 해가 서산을 넘으면 깔려드는 땅거미를 따라 예배당 꼭대기 십자가에 불을 밝힙니다. - (1990년) 2020. 8. 15.
물빛 눈매 한희철의 얘기마을(54) 물빛 눈매 5살 때 만주로 떠났다 52년 만에 고국을 찾은 분을 만났다. 약간의 어투뿐 조금의 어색함이나 이질감도 안 느껴지는 의사소통, 떨어져 있는 이들이 더욱 소중히 지켜온 우리 것에 대한 애착이 놀라웠다. 헤어질 때 7살이었던, 지금 영월에 살고 있는 형님 만날 기대에 그분은 몹시 상기되어 있었다. 강산이 변해도 수없이 변했을 50년 세월. 그래도 그분은 52년 전, 5살이었을 때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동굴 있는 곳에 가서 제(제사)를 드리던 일과, 강냉이 밭 산짐승 쫓느라 밤마다 형하고 빈 깡통 두들기던 일, 두 가지가 아직도 생각난다고 했다. 50년 넘게 이국땅에서 쉽지 않은 삶을 살며 외롭고 힘들 때마다 빛바랜 사진 꺼내들 듯 되살리곤 했을 어릴 적 기억 두 가지... 2020. 8. 14.
8월에 순한 가을 풀벌레 소리 신동숙의 글밭(211) 8월에 순한 가을 풀벌레 소리 장마와 폭우가 두 달 가까이 이어지면서 삼복 더위의 징검돌로 이어지던 8월의 한 여름 빛깔이 흐지부지해지고 있다. 이미 입추(入秋)가 지났다고는 하지만 귀를 쨍쨍 울리던 한낮의 매미 소리가 여름 하늘을 쨍 울리지도 못하고 벌써 순하기만 하다. 저 혼자서 무더운 여름 한낮에 독창을 하던 매미 소리였지만, 가슴을 뚫고 들어오던 소리와는 달리 한결 순해지고 초가을의 풀벌레 소리와 섞이어 합창이 되었다. 여름과 가을이 나란히 부르는 8월의 노래다. 여느 때와는 달리 들려오는 소리도 바람의 냄새도 다른 초가을 같은 8월을 보내고 있다. 여전히 삶의 모든 터전을 쓸고 간 물난리에 망연자실해 있을 이웃들의 마음이 멀리서도 무겁게 전해진다. 잠깐 쨍하고 나타난 여름.. 2020. 8. 14.
찻물의 양 신동숙의 글밭(210) 찻물의 양 '입에 쓴 약이 몸에 좋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분명 언제부턴가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일 터입니다. 어쩌면 선조들의 무의식에 각인이 되어 있어서 입에 쓰지 않으면 몸에 유익함이 부족할 것이라는 믿음까지 일으키게 하는 선입견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제가 차를 자주 마시다 보니 가끔 저에게 찻물의 양을 물어오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계량된 물의 양대로 맞추어야 하는지, 말하자면 이왕에 우려서 마시는 차 한 잔에서 최상의 효과까지 기대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대답을 해 드립니다. 목 넘김이 편안한 정도로 물의 양을 조절하시고, 우려내는 시간도 조정하시면 됩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계량은 참고만 하시고, 찻물의 기준은 내 몸이 되어야 .. 2020. 8. 13.
살아도 안 산 한희철의 얘기마을(53) 살아도 안 산 “그냥 살다 죽지 이제 살리긴 뭘 살려, 세금만 더 낼 텐데.” 치화 씨 어머니는 호적이 없습니다. 십여 년 전 주민등록이 말소되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의 죽음 이후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 치화 씨 어머니도 부산 어디 수용소에 갇히는 등 정처 없는 떠돌이 생활을 했던 것인데 그러는 사이 주민등록이 말소되었던 것입니다. 마을 사람 몇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호적 이야기가 나왔고 이야기의 대부분은 까짓것 그냥 살다 죽지 뭘 하러 죽은 호적을 살리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십년 넘어 만에 아들 치화 씨를 만나 기구한 삶 오늘에 이어오지만 그렇게 살아도 이 세상 안 산 걸로 돼 있는 치화 씨 어머니. 언제 한 번 생이 따뜻이 그를 맞아줘 살 듯 산 적 있었겠냐만, 살아도 안 산,.. 2020. 8. 13.
어떤 부흥사 한희철의 얘기마을(52) 어떤 부흥사 “그 다음날 탁 계약을 했어.” 지방산상집회, 설교하던 강사는 자기가 그랜저 자가용을 사게 된 과정을 신이 나서 이야기했다. 감독도 못 타는 그랜저를 이야기가 나온 바로 다음날 교인들이 보기 좋게 계약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 구구절절 헤프다 싶게 아멘 잘하던 성도들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잠깐의 침묵이 내겐 컸고 길었다. 계속 이어진 자랑들, 수십 평 빌라에 살고, 한 달 목회비만 수백만 원, 넥타이에 박힌 다이아몬드가 몇 백, 어디 나갈 일 있을 땐 교인들이 수표를 전하고... 그의 말대로 그게 하나님의 축복일까? 물신의 노예로밖엔 더도 덜도 아니었다. 앉아 이야기를 듣는 교인 중의 대부분은 농촌교회 교인들. 문득 한 장면이 강사 이야기와 겹쳤다. 개.. 2020. 8. 12.
차 한 잔 신동숙의 글밭(209) 차 한 잔 빈 가슴으로마른 바람이 불어오는 날 문득차 한 잔 나누고 싶어이런 당신을 만난다면 푸른 가슴에 작은 옹달샘 하나 품고서 때론 세상을 가득 끌어 안은 비구름처럼 눈길이 맑고 그윽한 당신을 만난다면차 한 잔 나누고 싶어 어둔 가슴에 작은 별빛 하나 품고서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희미한 너를 빛나게 하는목소리가 맑고 다정한 당신을 만난다면차 한 잔 나누고 싶어 이런 당신을 만난다면하얀 박꽃이 피는 까만 밤 서로가 아무런 말없이 찻잔 속에 앉은 달빛을 본 순간 문득 고개 들어저 하늘에 뜬 달을 우리 함께 바라볼 수 있다면 그러나 이런 당신이지금 내 곁에 있지 않아도 괜찮은 이유는내가 이런 사람이 되어도 좋겠다는 노랫말처럼 어느새 고요해진 가슴에 작은 옹달샘 하나 때론 별빛 하나 .. 2020. 8. 12.
사랑이 익기도 전에 신동숙의 글밭(209) 사랑이 익기도 전에 신의 첫사랑으로똘똘 뭉친 씨앗 한 알 그 씨앗 속 천지창조 이전의 암흑과 공허를 두드리는 빗소리 밤새 내린 빗물에 움푹 패인 가슴고인 눈물에 퉁퉁 불기도 전에 기도와 사색의 뿌리를 진리의 땅 속으로 깊이 내리기도 전에 푸릇한 새순이 고개 들어하늘을 우러르기도 전에 진실의 꽃대를 홀로 걸어가는 고독과 침묵의 좁은 길을 걸어 줄기 끝까지 닿기도 전에 노을빛의 그리움으로 무르익기도 전에 살갗을 태우는 여름의 뜨거움을가을날 황홀한 노을빛의 이별을가난한 마음을 노래하는 겨울을충분히 계절 속에 잠기기도 전에 사랑이 익기도 전에세상으로 나가야 하는 씨앗들 2020. 8. 11.
쥑이는 것두 하나님이요 한희철의 얘기마을(51) 쥑이는 것두 하나님이요 “쥑이는 것두 하나님이요, 살리는 것두 하나님이니......” 지난여름 장마에 봄 작물을 모두 ‘절딴’ 당한 지 집사님은 그렇게 기도했었다. 대신 가을 농사만은 잘 되게 해 달라는, 반은 탄식이었고 반은 눈물인 기도였다. 그 넓은 강가 밭을 바다처럼 삼켜버린 가을 홍수가 무섭게 지나갔다. 밭인지 갯벌인지, 논인지 개울인지 홍수 지난 뒷자리는 구별이 안 됐다. 결국 수마는 지 집사님 기도 위로 지나갔다. 수원 아들네 다니러 가 길이 끊겨 아직 오지도 못한 지 집사님. 그를 만나면 무슨 말을 어떻게 건네야 하는 건지. - (1990) 2020. 8.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