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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50

이중 잣대 한희철의 애기마을(60) 이중 잣대 어린 딸 소리와 함께 들로 나갔다 오는 길이었습니다. 곳곳에 들국화가 참 곱게 피어 있었습니다. 보아주는 이 없어도 여전히 피어나 대지를 수놓는 들꽃의 아름다움, 방에 꽂아둘까 하여 그 중 몇 개를 꺾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아빠, 그럼 꽃이 아야야 하잖아!” 눈이 동그래진 소리가 꽃 꺾는 날 빤히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예전에 소리가 교회 주위의 꽃을 꺾을 때, 그렇게 꽃을 꺾으면 꽃이 아파할 거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걸 기억하고 있는 어린 딸 앞에서 내가 꽃을 꺾었으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돌아오는 길 내내 내 이중 잣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남에겐 엄격하고 자신에겐 관대한, 드물긴 하지만 남에겐 관대하고 자신에겐 엄격한 이.. 2020. 8. 20.
순한 풀벌레 소리 신동숙의 글밭(216) 순한 풀벌레 소리 새벽녘 풀벌레 소리가 귀를 순하게 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후 들려오는 첫소리가 풀벌레 소리라는 사실에 문득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이보다 더 큰 복을 누릴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자연에서 들려오는 자연의 소리는 잠자던 영혼을 깨우고 길 잃은 영혼을 부르는 태초의 종소리 같습니다. 자연의 초대는 언제나 내면의 산책길로 향해 있습니다. 잠시 앉아 있으니 가슴 깊은 곳으로부터 따스하게 차오르는 감사와 고요의 샘물이 출렁입니다. 가슴에 흐르는 지금 이 순간의 출렁임은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픈 일어남이 아닌, 지금 이 순간만으로도 이미 충만해서 더 오래 머물고픈 고요함입니다. 제겐 이런 고요의 샘물과 침묵의 열매를 나누고픈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잘 익은 무화과.. 2020. 8. 20.
하늘 냄새가 나는 사람 신동숙의 글밭(215) 하늘 냄새가 나는 사람 하늘 냄새가 나는 사람이 있다그 사람을 마음으로 떠올리면 그 사람은 사라지고빈탕한 허공만 보인다 자사(子思)의 중용(中庸)에서 그는 하늘을 꿰뚫어 보고 부처의 중도(中道)에서그는 하늘을 똑바로 보고 기독교의 성경에서그는 하늘을 알아보고 젊은 노비 청년에게서그는 하늘을 살피어 보고 그 어른은 치매가 와도하늘을 우러러보며 "아바지"만 부르더라 숨을 거두던 마지막 순간에도하얀 수염 난 입에선 "아바지"로이 땅에 씨알 같은 마침표를 찍고 탐진치의 거짓 자아인 제나를 비움으로투명해진 참자아인 얼나를 통하여 보이는 건 맑은 하늘 뿐 그이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하늘이기에그가 거하는 곳은 이 땅을 채우는 없는 듯 계시는 하늘이기에 그의 움직임은 춤사위가 되고제소리는 하늘.. 2020. 8. 19.
아픔 배인 삶 한희철의 얘기마을(59) 아픔 배인 삶 “이적지 살아온 얘기 전부 역그문 책 서너 권도 넘을 게유. 근데 얘기 할려문 자꾸 자꾸 눈물이 나와. 그래 얘기 못 허지.” 뭉뚝 뭉뚝 더듬어 이야기하는 할머니의 팔십여 평생, 굽이굽이 아픔 배인 삶입니다. 어쩌면 그리도 삶은 할머니 한 평생의 삶을 눈물과 한숨으로 물들였는지. 진득한 기쁨으로부턴 늘 그만한 거리로 격리돼 온 백발의 삶이 아립니다. “그래도 할머닌 밝게 사시잖아요?”“속상한 일 있을 적마다 꿀꺽 꿀꺽 삼켜 썩혔지. 이적지 남 미워하지 않구 살았어.” 삶이 얼마나 단순한 것이며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덤덤한 이야기 끝 끝내 소매로 눈물 훔치는 할머니를 통해 배웁니다. - (1990년) 2020. 8. 19.
늙은 농부의 기도 한희철의 얘기마을(58) 늙은 농부의 기도 나의 몸은 늙고 지쳤습니다. 텅 빈 나뭇가지 위에 매달려 서너 번 서리 맞은 호박덩이 마냥어디 하나 쓰일 데 없는 천덕꾸러기입니다. 후둑후둑 벗겨내는 산 다랑이 폐비닐처럼 툭툭 생각은 끊기고 이느니 마른 먼지뿐입니다. 이제 겨울입니다. 바람은 차고 몸은 무겁습니다. 오늘도 늙고 지친 몸으로 예배당을 찾는 건까막눈 상관없는 성경책 옆구리에 끼고 예배당을 찾는 건그나마 빈자리 하나라도 채워 젊은 목사양반 허전함을 덜려는 마음 궁리도 있거니와볼품없는 몸으로 예배당을 찾는 건거친 두 손 모아 남은 눈물 드리는 건 아무도 읍기 때문입니다. 내 맘 아는 이 내 맘 아뢸 이아무도 읍습니다. 하나님 아부지. 여기엔 아무도 읍습니다. - (1992년) 2020. 8. 18.
신동숙의 글밭(213) 결 광목으로 만든 천가방, 일명 에코백 안에는 푸른 사과 한 알, 책 한 권, 공책 한 권과 연필 한 자루, 잉크펜 한 자루, 주황색연필 한 자루, 쪼개진 지우개 한 조각이 든 검정색 작은 가죽 필통과 칡차를 우린 물병 하나가 있습니다. 쉼없이 돌아가는 일상에 살짝 조여진 마음의 결을 고르는 일이란, 자연의 리듬을 따라서 자연을 닮은 본래의 마음으로 거슬러 조율을 하기 위하여, 여러 날 고대하던 숲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숨을 봅니다. 호흡은 평소보다 조금은 느리고 긴 호흡입니다. 호흡이 느리면 자연히 발걸음도 느릿느릿 열심을 내지도 않고 목적도 없는 그야말로 느슨한 걸음입니다. 그 느슨함이 여유와 비움으로 이어지면서 숲의 들숨은 저절로 깊어집니다. 가다가 서고 머뭇머뭇.. 2020. 8. 17.
은하수와 이밥 한희철의 얘기마을(57) 은하수와 이밥 서너 뼘 하늘이 높아졌습니다. 밤엔 별들도 덩달아 높게 뜨고, 이슬 받아 세수한 것인지 높아진 별들이 맑기만 합니다. 초저녁 잠시뿐 초승달 일찍 기우는 요즘, 하늘엔 온통 별들의 아우성입니다. 은빛 물결 이루며 강물 흐르듯 밤하늘 한 복판으로 은하수가 흐릅니다. 제각각 떨어져 있는 별들이 다른 별에게로 갈 땐 그 길을 걸어가지 싶습니다. 옛 어른들은 은하수를 보며 그랬답니다. 가만히 누워 은하수가 입에 닿아야 이밥(쌀밥) 먹을 수 있는 거라고. 교우들을 통해 들은 옛 어른들의 이야기를 은하수를 보며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 즉 햅쌀을 먹을 ‘때’에 대한 가르침일 수도 있고, 은하수 흐드러질 만큼 맑은 날씨, 그래야 한낮엔 뜨거운 볕에 벼가 익어갈 .. 2020. 8. 17.
영원의 의미 한희철의 얘기마을(56) 영원의 의미 제단 앞에 무릎을 꿇으면 날 마주하는 두 개의 문자가 있습니다.알파(Α) 와 오메가(Ω), 처음과 나중이라는 의미입니다. 나는 늘 그 사이에 앉게 됩니다.처음과 나중 그 사이의 어느 한 점.내 삶의 시간이란 결국 그뿐이며 그것이 내겐 영원입니다. - (1990년) 2020. 8. 16.
볼펜 한 자루의 대한독립 신동숙의 글밭(212) 볼펜 한 자루의 대한독립 외국에 있는 벗에게 보낼 선물을 고르는 일에는 이왕이면 한국산을 고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먼 타향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고국에서 온 것이라면 더 소중하고, 때론 작고 보잘 것 없는 작은 선물 하나가 마중물이 되어서, 마치 고향의 산과 들을 본 듯 그만큼 반가울 수도 있는 일이다. 멀리 있기에 아름다운 달과 별처럼 작고 단순한 물건이 그리운 제 나라의 얼굴이 되고 체온이 될 수도 있기에, 좋은 한국산 볼펜과 잉크펜을 찾기로 했다. 북쪽 나라에 부치던 윤동주의 귀여운 조개껍질처럼, '울언니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개껍질'에서 물소리 바닷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일이다. 한동안 찾았으나 좋은 한국산 볼펜과 잉크펜을 고르는 일이 순조롭지 못한 이유를 곰곰이 .. 2020. 8.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