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들판



들판에 가 보았네 
아이들의 웃음소리 
아이들은 들판을 가로 질러 
아지랑이처럼 달렸네 

들판에 가 보았네 
조용한 푸름
번지고 있었네 
하늘이 땅에 무릎 꿇어  
입 맞추고 있었네 

들판에 가 보았네 
언덕 위 
한 그루 나무처럼 섰을 때 
불어가는 바람 
바람 혹은 나무 
어느 샌지 나는 
아무 것이어도 좋았네.

-<얘기마을> (1995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강의 아침  (0) 2021.03.02
멀리서 온 소포  (0) 2021.03.01
봄 들판  (0) 2021.02.26
사랑하며  (0) 2021.02.25
나는 끝까지 고향을 지킨다  (1) 2021.02.24
어느 날 밤  (0) 2021.02.23
posted by

자기답게 산다는 것



사람들이 나를 보고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자” 할 때에 나는 기뻤다. 예루살렘아, 우리의 발이 네 성문 안에 들어서 있다.(시 122:1-2)

한 주간 잘 지내셨는지요? 하루하루 기적 같은 날들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벌써 2월의 마지막 주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무심히 눈을 들어 바라본 달력 위에서 날들은 가지런하지만 그 행간 속에 깃든 삶의 무게는 일정하지 않습니다. 때를 분별하며 사는 것이 지혜라는 지혜자들의 말을 실감하는 나날입니다.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 심을 때와 거둘 때, 찾아나설 때와 포기할 때만 잘 분별해도 삶은 한결 쉬워질 것 같습니다.

목회실에서 이번 주 찬양을 맡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간단하지만 전통적인 곡을 선정해 녹음을 했습니다. 교우들에게 교회의 여러 장소를 보여드리고 싶다는 제안에 따라 다양한 장소에서 녹화도 진행했습니다. 그 일이 꽤 의미 있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비대면 예배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기억의 장소들을 소거하고 있습니다. 장소들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이야기가 깃든 곳입니다. 텅 빈 예배당에 올라갈 때마다 외롭지 않은 것은 그곳에 스며있는 교우들의 삶의 이야기와 기도 그리고 찬양 소리가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제 사무실에 처음 방문하시는 분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대부분 두리번거리며 책장을 살핍니다. 책들이 켜켜이 쌓인 책무더기를 보며 어떤 분들은 “이 책 다 읽으셨어요?” 하고 질문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를 내는 법’이라는 책을 썼던 움베르토 에코의 말을 빌려 대답합니다. “내일부터 읽을 책이에요.” 그러면 더는 묻지 않고 웃고 맙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영상을 통해 많이 봤던 곳이라 낯설지 않아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낯선 곳도 아는 누군가가 머물던 장소임을 알면 돌연 친숙하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비대면 예배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기억이 약화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번 주에 화면에 비쳐지는 공간들을 보며 그리움을 달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순절 달력을 잘 활용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사실 저도 달력의 지시사항을 다 지키지는 못합니다. 전구 한 개를 빼지도 못했고, 계단을 자주 이용하지도 못했습니다. 별로 이동할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답게 살기’와 ‘자유의 힘 회복하기’라는 실천 사항을 두고는 많은 생각을 해야 했습니다. 자기답게 산다는 게 어떤 것일까요? ‘~답다’라는 접미사는 체언에 붙어서 체언의 성격이나 특징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문제는 ‘자기’입니다. ‘자기’가 누군지를 명확히 한정할 수 있어야 ‘자기다운’ 삶이 가능할 테니 말입니다. 참 어렵지요? ‘자기’라는 말 속에는 타자와 구별되는 존재로서의 자의식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자기답게 살라’는 말은 그렇게 살지 못하는 현실을 반영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체적인 존재로 살고 싶어하지만 늘 다른 이들을 의식하며 삽니다. 다른 이들의 칭찬과 인정을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응답을 받지 못하면 실망하기도 합니다. 행여 다른 이들과 나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삽니다. 앞서가는 이들과의 격차를 줄이고, 뒤따라오는 이들과의 격차를 벌리고 싶어합니다. 그러니 늘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답게 살라’는 말이 제게는 그런 삶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라는 말로 들립니다.

그러나 참 벗어나기 쉽지 않습니다. ‘성적, 사회적 지위, 재산, 외모’ 등이 우리의 인간적 가치를 재는 척도처럼 변했기 때문입니다. 경쟁을 내면화하고 살다 보니 나보다 나은 이들에 대한 질투와 선망의 감정에 시달리고, 나보다 못한 이들은 낮춰보는 버릇이 들기도 합니다. ‘타인은 나에게 있어 지옥’이라고 말했던 사르트르의 마음이 이런 건가 싶습니다. 비교하지 않고 자기답게 살 수는 없을까요? 18세기 유대교 하시딤 지도자인 주시아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는 세상에서는 어째서 너는 모세가 되지 못했느냐?고 묻지 않고, 어째서 주시아가 되지 못했느냐?고 물을 것이다.” 남과의 비교를 통해 행복과 불행을 저울질하는 마음만 버려도 삶은 한결 가벼워지리라 생각합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성실하게, 기쁘게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자유의 힘 회복하기’라는 주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타자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한 우리는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하며 사는 동안 우리 마음에는 온갖 쓰레기들이 켜켜이 쌓였습니다. 미움, 질투, 원한 감정, 복수심, 밑도 끝도 없는 분노, 심술궂음, 절망...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것은 살아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삶의 부산물들입니다. 그것을 제때에 분리하고 처리할 수만 있다면 큰 문제는 아닙니다. 해와 바람과 흙의 도움으로 그것을 분해하여 흙으로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어리석어서 그것을 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사라지지 않도록 꼭 붙들려 하고, 오히려 남들이 볼 수 있는 장소에 전시하기도 합니다. 자기를 생의 부산물에 묶어 두기에 우리 삶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처리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

 


사순절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잠시 멈춰 서는 시간입니다. 일상을 중단하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를 이끌던 인습적 과거에서 자꾸 벗어나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에 머물다가도 때가 되면 한적한 곳으로 물러나 하나님 앞에 엎드리곤 하셨습니다. 나아감과 물러섬이 유기적으로 맞물릴 때 삶은 건강해집니다. 지금은 물러서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숨결을 맞아들여야 할 때입니다. 봄볕이 잠시 머문 화단에서 푸른 움이 터 오르듯 하나님의 숨과 만날 때 척박해진 우리 영혼이 소생할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이들이 거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야말로 바벨의 소음이 오관을 뚫고 쳐들어오는 판에 듣기는 무슨 음성을 듣겠습니까. 온갖 소리와 빛깔과 모습과 느낌과 생각이 뒤범벅이 되어 사람들을 뒤덮고, 열두 살짜리면 이미 자동차 이름, 자전거 선수 이름, 축구 선수 이름, 영화 배우 이름, 모르는 게 없는 판인데 들리기는 무엇이 들리겠습니까. 이 북새통 속에서 어찌 내심의 노래가 들려 오겠습니까. 마음의 노래란 휜 가지 끝에 내린 이슬 한 방울이 떨리면서 시작되는 것, 새 소리와 트는 새싹으로 시작되는 것, 그것이 차츰 커지고 깊어져 마침내는 우리 안에서 이름할 수 없는 분의 목소리로 화하는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러끌레르끄, <게으름의 찬양>, 장익 옮김, 분도출판사,1988, p.45-46)

러끌레르끄 신부의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처리해야 할 일에 골몰하고, 다른 이들과의 친교에서 소외되지 않기 위해 이런저런 정보를 수집하는 데 몰두하느라, 세상에 가득 찬 하나님의 신비는 외면하고 삽니다. 사순절은 우리를 그 신비 앞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멈춰 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새 소리, 새싹이 움트는 소리, 눈석임물 흐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 소리에 집중하다 보면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차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미국의 화성탐사선인 퍼시비어런스 호가 보내온 화성의 바람 소리를 들어 보셨는지요? 그 소리는 우리를 저 광활하고 아득한 우주의 신비 앞으로 이끌어 갑니다. 삶은 여전히 힘겹습니다. 투덜거린다고 하여 누가 대신하여 살아주지도 않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견뎌야 합니다. 그리고 이겨내야 합니다. 더 큰 세계와 접속된 사람은 현실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가지 않을 겁니다.

예년 같으면 각급 학교의 졸업식이 거의 마무리 될 즈음입니다. 한 자리에 다 모여 졸업식을 거행할 수 없었다지요?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 하는 식의 감격스러운 졸업식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생의 한 과정을 마치는 의례를 생략하거나 간략하게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각급 학교를 졸업한 이들, 그리고 새로운 학년을 맞이하는 모든 젊은이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기쁨을 맛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학교도 학생들과 직접 대면하여 말씀을 나누지는 못하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부모님들께서는 서슴없이 학생들과 교회학교가 연결될 수 있도록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생명과 평화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백신 접종이 드디어 시작된다지요? 안전성에 대한 우려를 표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지나치게 염려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차분하게 차례를 기다렸다가 기회가 되면 백신 접종에 응하시면 좋겠습니다. 백신이 만능은 아니어서 사회적 거리 두기와 마스크 착용, 손 씻기 등의 기본 방역 지침은 철저하게 지켜야 하겠습니다. 백신 접종 기사를 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미움과 혐오, 냉소, 분열증을 예방해주는 백신은 없을까?’ 올바른 신앙이야말로 그런 백신이 아닐까요?

꽃샘추위가 남아 있다고는 하더라도 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웅크렸던 몸과 마음을 활짝 펴고 새로운 날을 맞아들이면 좋겠습니다. 봄을 단순히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누군가의 봄소식이 되어보면 어떨까요? 참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2월 25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posted by

무의 새




무한한 날갯짓으로 
몸무게를 지우며

무심한 마음으로
하늘을 안으며

새가 난다
하늘품에 든다

 

'신동숙의 글밭 > 시노래 한 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도 하늘처럼  (0) 2021.03.25
물 인심  (0) 2021.03.01
무의 새  (0) 2021.02.25
참빗, 참빛  (0) 2021.02.12
이쑤시개 세 개  (0) 2021.02.06
말동무  (0) 2021.02.05
posted by

사랑하며



사람 사랑하며
이야기 사랑하며
바람과 들꽃과 비 사랑하며
눈물과 웃음 사랑하며
주어진 길 가게 하소서

두려움 없이
두리번거림 없이

 -<얘기마을> (1992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멀리서 온 소포  (0) 2021.03.01
봄 들판  (0) 2021.02.26
사랑하며  (0) 2021.02.25
나는 끝까지 고향을 지킨다  (1) 2021.02.24
어느 날 밤  (0) 2021.02.23
창(窓)  (0) 2021.02.22
posted by

로즈마리와 길상사




한겨울을 지나오며 언뜻언뜻 감돌던 봄기운이 이제는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 요즘입니다. 길을 걸으며 발아래 땅을 살펴보노라면 아직은 시들고 마른 풀들이 많지만 그 사이에서도 유독 푸릇한 잎 중에 하나가 로즈마리입니다. 

언뜻 보아 잎 모양새가 소나무를 닮은 로즈마리는 개구쟁이 까치집 머리칼을 쓰다듬듯이 손으로 스치듯 살살살 흔들어서 그 향을 맡으면 솔향에 레몬향이 섞인듯 환하게 피어나는 상큼한 향에 금새 기분이 좋아지곤 합니다. 

로즈마리를 생각하면 스무살 중반에 신사동 가로수길과 돈암동 두 곳의 요가 학원에서 작은 강사로 수련하던 때가 떠오릅니다.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있던 고시원 방이 삭막해서 퇴근길에 숙소로 데리고 온 벗이 바로 작은 로즈마리 묘목입니다.

언제나 로즈마리와의 인사법은 반갑게 악수를 나누듯 손으로 잎을 살살살 쓰다듬으며 향을 맡는 일입니다. 작은 화분에 담긴 로즈마리에게 물도 주고 그렇게 인사를 나누는 날이 더해 갈 수록 로즈마리는 언뜻 보아 위로 키가 자라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왠지 키에 비해서 잎은 살이 찌지 않고 오히려 풀이 죽은 듯 보였습니다. 어떻게 살릴까 몇 날 며칠 궁리를 하였습니다.

 



낮에는 요가를 가르치고, 길벗처럼 원성스님의 그림책에서 본 해맑은 동자승의 얼굴을 마음에 담기도 하고, 법정 스님의 삶과 월든 숲 소로우의 삶을 생각하면 혼자 길을 걸으면서도 외롭지 않던 맑은 나날입니다. 

요가를 공부할 수록 명상과 생명과 생태에도 관심이 가게 된 것은 요가의 대체의학인 아유르베다와 한의학에 깃든 자연의 진실하고 선한 아름다움 때문입니다. 자연히 섭생은 자연식에 가까워졌고 몸도 따라서 저절로 기울어 순응하듯 물처럼 도시에서 자연으로 흘렀습니다. 

당근과 감자와 오이와 사과만 먹고도 몸이 만족해 했습니다. 물통이 있고 찻잎이 있으면 어디든 평안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언제나 물통과 찻잎을 지니고 다니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때는 요가 수련을 마치고 나오면 원장님이 다려주시던 따끈한 보이차가 몸을 보호해 주던 따뜻한 기억이 있습니다.

작은 방에서 로즈마리와 단둘이 마주하고 있자니, 작은 화분에 담긴 로즈마리의 처지와 나와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로즈마리가 이 작은 화분이 아닌, 산속이나 산자락 어디쯤에다 뿌리를 내렸다면 훨씬 더 생기를 뿜었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고보면 빽빽한 도심 속에서만 살아온 나의 처지도 작은 화분에 담긴 로즈마리의 생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런 한 생각이 들고부터는 마음이 더욱 자연과 산을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휴일날, 로즈마리라도 먼저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이른바 로즈마리 출가를 시키자는 결심을 낸 것입니다. 생각 끝에 지하철을 타고 마을 버스를 갈아 타고서 도착한 곳은 법정 스님의 성북동 길상사입니다. 길상사의 시민선방으로 오르는 길 우측 화단 나무 아래에 작은 로즈마리 묘목 하나를 허락도 없이 모셔둔 것입니다. 

그때의 일로부터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그 작은 로즈마리가 여전히 뿌리를 잘 내리고 있는지, 아니면 누군가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벌써 뽑아버렸는지, 아니면 저절로 그 자리에서 생을 마무리했는지는 여전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길상사를 떠올릴 때면 저와 잠시나마 벗이 되었던 로즈마리의 향기가 지금도 생생히 떠오릅니다.

posted by

나는 끝까지 고향을 지킨다

  • 오늘 방문하신 분이 단강마을이 고향인분이 계셨습니다.

    우포지기 2021.02.27 16:50



단강에서 귀래로 나가다 보면 지둔이라는 마을이 있다. 용암을 지나 세포 가기 전. 산봉우리 하나가 눈에 띄게 뾰족하게 서 있는 마을이다.


전에 못 보던 돌탑 하나가 지둔리 신작로 초입에 세워졌다. 마을마다 동네 이름을 돌에 새겨 세워놓는 것이 얼마 전부터 시작됐는데, 다른 마을과는 달리 지둔에는 지둔리라 새긴 돌 위에 커다란 돌을 하나 더 얹어 커다란 글씨를 새겨 놓았다.

 


“나는 끝까지 고향을 지킨다.”


까맣게 새겨진 글씨는 오가며 볼 때마다 함성처럼 전해져 온다. 글씨가 돌에서 떨어져 나와 환청처럼 함성으로 들려져 온다.


그러나 그건 희망의 함성이 아니라 절망스런 절규, 눈물과 절망이 모여 검은 글씨로 새겨졌을 뿐이다. 
작은 돌 위에 새겨놓은 절박한 절규,


“나는 끝까지 고향을 지킨다.” 

-<얘기마을> (1992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봄 들판  (0) 2021.02.26
사랑하며  (0) 2021.02.25
나는 끝까지 고향을 지킨다  (1) 2021.02.24
어느 날 밤  (0) 2021.02.23
창(窓)  (0) 2021.02.22
고맙습니다  (0) 2021.02.21
posted by

어느 날 밤



늦은밤, 자리를 펴고 누워 하늘을 본다. 별들의 잔치, 정말 별들은 ‘고함치며 뛰어내리는 싸락눈’ 같이 하늘 가득했다.


맑고 밝게 빛나는 별들의 아우성. 별자리들은 저만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느라, 옆자리 별들은 그 이야기 귀담아 듣느라 모두들 눈빛이 총총했다. 그들 사이로 은하가 굽이쳐 흘렀다. 넓고 깊은 은빛 강물, 파르스름한 물결 일으키며 하늘을 가로질러 흘러온 은하는 뒷동산 떡갈나무 숲 사이로 사라졌다.

 


이따금씩 하늘을 긋는 별똥별들의 눈부신 질주, 당신의 기쁨을 위해선 난 스러져도 좋아요. 열 번이라도, 백 번이라도. 남은 이들의 기쁨을 바라 찬란한 몸으로 단숨에 불꽃이 되는, 망설임 없는 별똥별들의 순연한 아름다움!


자리에 누워 밤하늘별을 보다 한없이 작아지는, 그러다 어느덧 나 또한 별 하나 되어 우주 속에 점 하나로 깊이 박히는 어느 날 밤. 

-<얘기마을> (1994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하며  (0) 2021.02.25
나는 끝까지 고향을 지킨다  (1) 2021.02.24
어느 날 밤  (0) 2021.02.23
창(窓)  (0) 2021.02.22
고맙습니다  (0) 2021.02.21
퍼런 날  (0) 2021.02.20
posted by

루이보스 차와 아버지



아버지는 루이보스 차가 좋다고 하셨다. 딸이 드리는 이런 차 저런 차를 다양하게 맛보시더니 그중에 루이보스 차를 드시면 속이 가장 편안하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식사는 되새김질로 마무리를 하셨다. 풀밭에 앉은 황소가 우물우물 풀을 씹어 먹듯이 소눈을 닮은 아버지의 큰 눈망울은 끔벅끔벅 먼 고향 하늘가 어드메 쯤인가를 그리시는 듯 보였다.

그러면 함께 밥을 먹던 엄마의 입에서 툭 튀어나오던 한소리가 "추잡구로" 아버지의 되새김질에 뒤따르는 엄마의 추임새였다. 그러면 아버지는 소처럼 점잖구로 어릴 적에 소여물을 먹이시던 묵은 얘기를 또다시 처음처럼 풀어놓으셨다. 

그러면 어린 내 눈앞으로 누런 황소가 보이고, 우물우물 움직이는 소의 되새김질이 보이고, 순한 소의 눈망울 속으로 푸른 풀밭을 닮은 푸른 하늘이 넓게 펼쳐졌다. 

그리고 시골의 어느 작은 초가집이 우리집이 되고, 저녁밥 짓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 옆으로 지붕 위에는 하얀 박이 밤하늘의 달님을 닮아 있었고, 달님의 순박한 얼굴은 엄마의 얼굴이 되고 아버지의 얼굴이 되고, 순한 한국 사람의 얼굴이 되고 하나의 커다란 얼, 하늘이 되었다.

신기하게도 장이 약한 조카 아들이 돌아가신 할아버지처럼 루이보스 차를 좋아한다. 한참 성장기에 있어서 생우유를 물처럼 마시는데, 간혹 고모집에 놀러올 때면 루이보스 차를 우려서 루이보스 밀크티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조카 아들에게도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차에 대한 사전 지식도 없이 스스로의 몸으로 자기의 체질에 맞는 똑같은 차를 찾았다는 사실이 참 신기하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루이보스 차 티백 하나를 찬물에 담궈두었다. 가족들이 잠자는 동안 밤새 잘 우러나서 아침이면 투명한 보리차 빛깔로 반기며 아침에 가족들의 빈 속을 깨워줄 것이다. 

내 체질에 맞는 차를 하나 알고 있다는 것은 편안하고 좋은 길벗을 곁에 둔 것과 다르지 않다. 몸이 잠을 자는 동안 밤새 비운 속으로 물처럼 순해진 루이보스 차 한 잔을 마시며 하루의 첫물길을 내려는 것이다.

 

posted by

창(窓)



단강에서 사는 내게 단강은 하나의 창(窓)
단강을 통해 나는 하늘과 세상을 본다.

 


맑기를
따뜻하기를
이따금씩 먼지 낀 창을 닦으며 그렇게 빈다.


창을 닦는 것은 하늘을 닦는 것, 
세상을 닦는 것
맑고 따뜻해 깊은 하늘 맑게 보기를
넓은 세상 따뜻하게 보기를,
오늘도 나는 나의 창을 닦으며 조용히 빈다.

-<얘기마을> (1994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끝까지 고향을 지킨다  (1) 2021.02.24
어느 날 밤  (0) 2021.02.23
창(窓)  (0) 2021.02.22
고맙습니다  (0) 2021.02.21
퍼런 날  (0) 2021.02.20
쓰러지는 법  (0) 2021.02.19
posted by

고맙습니다



작고 후미진 마을
작은 예배당을 섬기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다들 떠난 곳에 외롭게 남아
씨 뿌리는 사람들
가난하고 지치고
병들고 외로운 사람들과 살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이 땅의 아픔 감싸기엔
내 사랑과 믿음
턱없이 모자랍니다.
힘들다가 외롭기도 합니다.


그래도 나를 이곳에서 살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그중 당신과 가까운 곳,
여기 살게 하시니, 
고맙습니다.

-<얘기마을> (1992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날 밤  (0) 2021.02.23
창(窓)  (0) 2021.02.22
고맙습니다  (0) 2021.02.21
퍼런 날  (0) 2021.02.20
쓰러지는 법  (0) 2021.02.19
단호한 물러섬  (0) 2021.02.18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