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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37

봄 들판 들판에 가 보았네 아이들의 웃음소리 아이들은 들판을 가로 질러 아지랑이처럼 달렸네 들판에 가 보았네 조용한 푸름 번지고 있었네 하늘이 땅에 무릎 꿇어 입 맞추고 있었네 들판에 가 보았네 언덕 위 한 그루 나무처럼 섰을 때 불어가는 바람 바람 혹은 나무 어느 샌지 나는 아무 것이어도 좋았네. - (1995년) 2021. 2. 26.
자기답게 산다는 것 사람들이 나를 보고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자” 할 때에 나는 기뻤다. 예루살렘아, 우리의 발이 네 성문 안에 들어서 있다.(시 122:1-2) 한 주간 잘 지내셨는지요? 하루하루 기적 같은 날들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벌써 2월의 마지막 주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무심히 눈을 들어 바라본 달력 위에서 날들은 가지런하지만 그 행간 속에 깃든 삶의 무게는 일정하지 않습니다. 때를 분별하며 사는 것이 지혜라는 지혜자들의 말을 실감하는 나날입니다.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 심을 때와 거둘 때, 찾아나설 때와 포기할 때만 잘 분별해도 삶은 한결 쉬워질 것 같습니다. 목회실에서 이번 주 찬양을 맡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간단하지만 전통적인 곡을 선정해 녹음을 했습니다. 교우들에게 교회의 여러 장.. 2021. 2. 26.
무의 새 무한한 날갯짓으로 몸무게를 지우며 무심한 마음으로 하늘을 안으며 새가 난다 하늘품에 든다 2021. 2. 25.
사랑하며 사람 사랑하며 이야기 사랑하며 바람과 들꽃과 비 사랑하며 눈물과 웃음 사랑하며 주어진 길 가게 하소서 두려움 없이 두리번거림 없이 - (1992년) 2021. 2. 25.
로즈마리와 길상사 한겨울을 지나오며 언뜻언뜻 감돌던 봄기운이 이제는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 요즘입니다. 길을 걸으며 발아래 땅을 살펴보노라면 아직은 시들고 마른 풀들이 많지만 그 사이에서도 유독 푸릇한 잎 중에 하나가 로즈마리입니다. 언뜻 보아 잎 모양새가 소나무를 닮은 로즈마리는 개구쟁이 까치집 머리칼을 쓰다듬듯이 손으로 스치듯 살살살 흔들어서 그 향을 맡으면 솔향에 레몬향이 섞인듯 환하게 피어나는 상큼한 향에 금새 기분이 좋아지곤 합니다. 로즈마리를 생각하면 스무살 중반에 신사동 가로수길과 돈암동 두 곳의 요가 학원에서 작은 강사로 수련하던 때가 떠오릅니다.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있던 고시원 방이 삭막해서 퇴근길에 숙소로 데리고 온 벗이 바로 작은 로즈마리 묘목입니다. 언제나 로즈마리와의 인사법은 반갑게 악수를 나누.. 2021. 2. 24.
나는 끝까지 고향을 지킨다 단강에서 귀래로 나가다 보면 지둔이라는 마을이 있다. 용암을 지나 세포 가기 전. 산봉우리 하나가 눈에 띄게 뾰족하게 서 있는 마을이다. 전에 못 보던 돌탑 하나가 지둔리 신작로 초입에 세워졌다. 마을마다 동네 이름을 돌에 새겨 세워놓는 것이 얼마 전부터 시작됐는데, 다른 마을과는 달리 지둔에는 지둔리라 새긴 돌 위에 커다란 돌을 하나 더 얹어 커다란 글씨를 새겨 놓았다. “나는 끝까지 고향을 지킨다.” 까맣게 새겨진 글씨는 오가며 볼 때마다 함성처럼 전해져 온다. 글씨가 돌에서 떨어져 나와 환청처럼 함성으로 들려져 온다. 그러나 그건 희망의 함성이 아니라 절망스런 절규, 눈물과 절망이 모여 검은 글씨로 새겨졌을 뿐이다. 작은 돌 위에 새겨놓은 절박한 절규, “나는 끝까지 고향을 지킨다.” - (1992년) 2021. 2. 24.
어느 날 밤 늦은밤, 자리를 펴고 누워 하늘을 본다. 별들의 잔치, 정말 별들은 ‘고함치며 뛰어내리는 싸락눈’ 같이 하늘 가득했다. 맑고 밝게 빛나는 별들의 아우성. 별자리들은 저만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느라, 옆자리 별들은 그 이야기 귀담아 듣느라 모두들 눈빛이 총총했다. 그들 사이로 은하가 굽이쳐 흘렀다. 넓고 깊은 은빛 강물, 파르스름한 물결 일으키며 하늘을 가로질러 흘러온 은하는 뒷동산 떡갈나무 숲 사이로 사라졌다. 이따금씩 하늘을 긋는 별똥별들의 눈부신 질주, 당신의 기쁨을 위해선 난 스러져도 좋아요. 열 번이라도, 백 번이라도. 남은 이들의 기쁨을 바라 찬란한 몸으로 단숨에 불꽃이 되는, 망설임 없는 별똥별들의 순연한 아름다움! 자리에 누워 밤하늘별을 보다 한없이 작아지는, 그러다 어느덧 나 또한 .. 2021. 2. 23.
루이보스 차와 아버지 아버지는 루이보스 차가 좋다고 하셨다. 딸이 드리는 이런 차 저런 차를 다양하게 맛보시더니 그중에 루이보스 차를 드시면 속이 가장 편안하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식사는 되새김질로 마무리를 하셨다. 풀밭에 앉은 황소가 우물우물 풀을 씹어 먹듯이 소눈을 닮은 아버지의 큰 눈망울은 끔벅끔벅 먼 고향 하늘가 어드메 쯤인가를 그리시는 듯 보였다. 그러면 함께 밥을 먹던 엄마의 입에서 툭 튀어나오던 한소리가 "추잡구로" 아버지의 되새김질에 뒤따르는 엄마의 추임새였다. 그러면 아버지는 소처럼 점잖구로 어릴 적에 소여물을 먹이시던 묵은 얘기를 또다시 처음처럼 풀어놓으셨다. 그러면 어린 내 눈앞으로 누런 황소가 보이고, 우물우물 움직이는 소의 되새김질이 보이고, 순한 소의 눈망울 속으로 푸른 풀밭을 닮은 푸른 하늘이 넓게.. 2021. 2. 23.
창(窓) 단강에서 사는 내게 단강은 하나의 창(窓) 단강을 통해 나는 하늘과 세상을 본다. 맑기를 따뜻하기를 이따금씩 먼지 낀 창을 닦으며 그렇게 빈다. 창을 닦는 것은 하늘을 닦는 것, 세상을 닦는 것 맑고 따뜻해 깊은 하늘 맑게 보기를 넓은 세상 따뜻하게 보기를, 오늘도 나는 나의 창을 닦으며 조용히 빈다. - (1994년) 2021. 2.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