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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37

이쑤시개 세 개 네 살 때부터 다섯 살까지 엄마 손에 붙들려 어린이집 대신 다도원에 다닌 딸아이 엄마는 개량 한복 입고 고무신 신고 앵통 들고 차 수업 받으러 가는 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날 밀집 모자 쓰고 호미랑 삽이랑 딸아이랑 차밭에서 살며 놀며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신기한 잡초도 신나게 뽑고 어린 찻잎도 신명나게 따느라 찻잎 삼매경에 빠져 살던 엄마 첫날 다실에 보물처럼 가득 쌓인 예쁜 다구들과 노리개들을 보면서 호기심 대장 개구쟁이 딸아이에게 딱 한 마디 했지요 "여기 있는 건 하나도 만지면 안된다" 2년 동안 단 한 번도 손대지 않은 기적이 딸아이한테서 일어난 건 신기하고도 고마운 일 그러던 어느날 평소에 다식꽂이로 한 번 쓰고 버리던 이쑤시개 노랑 분홍 파랑 리본이 달린 예쁜 이쑤시개 어느날 우리집에서 .. 2021. 2. 6.
꿈을 갖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마음속 좋은 생각을 품고, 품은 생각을 지키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다른 이의 눈치 살핌 없이 그저 묵묵히 자신의 꿈을 일궈내는 일은 그 꿈이 무엇이건 아름다운 일입니다. 꿈을 버리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임에도 스스로 버리는 꿈은 어려운 일입니다. 오직 한 가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꿈을 이루기 위해 나머지 바람들을 사소한 것으로 돌리는 것, 어려운 만큼 고귀한 일입니다. 버리고 품는 꿈, 꿈이 필요한 때입니다. - (1992년) 2021. 2. 6.
말동무 사람의 몸을 받고 태어나 이 아름다운 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가 돈과 건물과 권력과 명예와 인기와 성공을 위한 일이 우선이라면 얼마나 힘 빠지고 재미없는 걸음 걸음인가 돈이 있든지 없든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인기가 별로 없어도 성공이라 부를만한 것 딱히 없어도 말이 통하는 동무 하나만 별처럼 있다면 말이 통하는 말동무 하나를 만나고 싶어서 아무 책이나 읽으면 아무 동무나 만나게 될까 봐 겁나 밥은 굶어도 책은 아무 책이나 읽지 말자 어려서부터 굳은 마음 먹었지 말문이 막히고 숨통이 막히는 오늘 같은 날에도 말동무 삼아서 글을 읽는다 먹먹함 한 줌 고이면 가슴 웅덩이 물길 터주려 차 한 모금 홀짝 홀짝 삼킨다 2021. 2. 5.
산수유 단강의 한해는 산수유로 시작해 산수유로 끝이 납니다. 이른 봄, 단강의 봄을 제일 먼저 알리는 꽃이 산수유입니다. 잎보다도 먼저 노란 꽃으로 피어나 봄이 왔음을 알립니다. 한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가을철, 모든 이파리 떨어지고 나면 빨간 꽃처럼 남는 것이 또한 산수유입니다. 빨갛게 익어 가지마다 가득 매달린 산수유 열매는 열매라기 보다는 또 한 번의 꽃입니다. 콩 타작 마치고. 마늘 놓고 나면 한해 농사도 끝나고, 그러면 사람들은 산수유 열매를 털어 집안으로 들입니다. 멍석에 널어 말린 산수유는 긴긴 겨울, 마을사람들의 소일거리가 됩니다. 씨를 빼낸 산수유를 잘 말려두면 장사꾼이 들어와 근수를 달아 산수유를 사 갑니다. 해마다 값이 다르긴 하지만 한약재로 쓰이는 산수유는 그런 대로의 값이 있어 단강에선 .. 2021. 2. 5.
그러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믿음에서 오는 모든 기쁨과 평화를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주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여러분에게 차고 넘치기를 바랍니다.”(롬 15:13) 주님의 평강을 빕니다. 별고 없이 다들 잘 지내시는지요? 며칠 동안 제법 날이 추웠습니다. 건물 사이를 휘돌아 나오는 바람을 온 몸으로 맞이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내곤 있지만 그래도 계절은 어김이 없습니다. 바야흐로 입춘지절입니다. 24절기상으로는 입춘이 새해의 시작입니다. 사람들은 대문이나 주련에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등의 입춘첩立春帖을 써붙여 놓고 한 해 동안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빕니다. 미신처럼 보일지 몰라도 각박하고 차가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일종의 지혜가 아닌가 싶습니다. 주님의 은총으.. 2021. 2. 4.
보물 미영이, 은희, 경림이는 단강교회의 보물들입니다.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보물들입니다. 고등학교 학생, 그래도 그들은 교회 학교 선생님입니다. 몇 안 남은 동생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칩니다. 토요일 밤에 따로 모여 주보를 접고, 적잖은 주보를 늦도록 접고, 다음날 아이들 가르칠 걸 준비합니다. 한나절이 다 걸리는 주보발송도 그들의 몫입니다. 궂다면 한없이 궂은 그 일을 그들은 웃음으로, 얘기꽃으로 대신합니다. 행사 때마다의 제단 장식도 그들의 몫이고, 때때로의 청소도 그들 몫입니다. 공부에, 농사일에 쉽지 않은 시간들, 그래도 그들은 기쁨으로 모든 일을 받습니다. 지난해부터 이진웅 선생님이 들어와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의대 졸업반, 만만한 시간이 아니면서도 언제 한 번 거르는 법 없습니다. 너무 .. 2021. 2. 4.
눈물샘 가끔 누군가를 만나 소화되지 않는 말이 있지 목에서 걸리고 가슴에 맺히는 말 한 마디 저녁답 쪼그리고 앉아 군불로 태워버릴 부뚜막 아궁이도 내겐 없는데 한겨울밤 문틈으로 바람 따라 보내버릴 엉성한 문풍지도 내겐 없는데 사방이 꽉 막힌 방에서 말이 통하지 않으니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고 숨통이라도 트려고 빠져나갈 구멍을 찾다가 몸을 지으실 때 가장 연약한 틈 눈물샘으로 흐른다 가슴이 나를 대신해서 나를 위해서 말없이 울어준다 2021. 2. 3.
어떤 하루 아침 일찍 끝정자로 내려가 안 속장님과 속장님의 언니를 태우고 작실로 올라갔습니다. 며칠째 앓아누워 있던 속장님의 언니가 작실 집으로 돌아가는 날입니다. 속장님 또한 몸이 안 좋은 상태지만 더 아픈 언닐 혼자 보낼 수가 없어 속장님이 언니를 따라 나섰습니다. 며칠 동안을 텅 비어있던 썰렁한 집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의 눈에서 핑그르르 눈물이 돕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네들, 게다가 걸음도 편치 않은 병약한 몸들입니다. 내려오는 길, 김천복 할머니 댁에 들러 할머니를 모시고 부론으로 나왔습니다. 밀려있는 객토 대금을 갚으러 농협에 가는 길입니다. 허리 굽은 여든의 노인네가 콩과 깨, 고추 등을 장에 이고 가 푼푼이 팔아 모은 돈으로 농협 빚을 갚으러 갑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웃으며 나누지만 할머니 모시고 .. 2021. 2. 3.
일하는 아이들 주일 어린이 예배. 종을 쳤지만 아이들이 모이질 않았다. 늘 빠짐이 없던 은옥이와 은진이까지 안 나왔다. 녀석들이 모두 웬일일까, 허전하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저녁 무렵 아랫말로 내려가다 은옥이 은진이 은희를 만났다. 그들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온통 얼굴이 벌겋게 탔고 옷은 흙과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할머니가 몸져누워 계시자 어린 그들이 할머니 대신 당근 밭을 매고 오는 길이었다. 미안했다. 놀면서 안 오는 줄 알고 섭섭하게 생각했던 내가 영 부끄러웠다. 일하는 아이들을 두고 난 너무 쉽게만 생각했던 것이다. - (1993년) 2021. 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