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26)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갈까?

 

 

영혼이 준비가 되어 있기만 하다면

성령이 그 영혼을

자신의 근원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어느 해인가, 새해 벽두에 귀인을 맞이한 적이 있다. 겨우 두 번째 만남이었지만, 우리는 의기가 통해 곧 벗이 되었다.

 

국전 심사까지 한 널리 알려진 서예가인데, 그는 자기 글씨체를 ‘막가파체’라고 부르며 파격을 즐기는 위인이다. 햇닢, 무아 등의 여러 아호를 가진 그는 허름한 바랑에 한지와 붓과 먹과 낙관과 인주까지 싸 짊어지고 다닌다.

 

그는 청하지도 않았는데, 소위 ‘신년축시’를 써주고 가겠다며 시를 내놓으란다. 나는 내 시 가운데서 비교적 짧은 ‘쥐코밥상’이란 시를 내주었더니, 이내 붓을 들고 한바탕 묵희(墨戱)를 즐긴다.

 

 

 

 

시를 써서 벽에 붙여 놓은 뒤 우리는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그가 문득 함께 앉아 있던 일행에게 예의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갈까요?”

 

어떤 이가 대답했다.

 

“하나님에게로요.”

 

“에이, 그건 너무 진부하고!”

 

“천국을 가든지 지옥을 가든지 하겠지요!”

 

“그것도 진부하고!”

 

진부하다는 말에 아무도 대답을 않고 있으니까, 그가 입을 열어 말한다.

 

“에이, 그것도 몰라? 사람이 죽으면 ‘사랑하는 이의 가슴’으로 가지!”

 

나는 그것도 진부하다고 말하려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그가 구사하는 은유가 가슴을 뭉클하게 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떠신가? 죽어서 돌아갈 사랑하는 이의 가슴이 있는가?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는 설렘이 있는가?

 

고진하/시인, 한 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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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25)

 

걸레가 되어 찢기신 이를 기억하라

 

 

창조되지 않은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이 성전에 어울릴 수 없습니다.

천사보다 못한 것은 그 어느 것도

이 성전과 같을 수 없습니다.

이 성전은 대단히 아름답게 빛나고,

하나님이 지은 모든 것보다

더 밝고 순수하게 빛납니다.

창조되지 않은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그 광채에 견줄 수 없습니다.

 

 

 

이 성전은 당신과 나의 영혼이다. 이 성전의 제단 위에 타는 성촉(聖燭)은 당신과 나의 영혼의 불꽃이다. 이 성전에 바쳐진 제물은 모든 장애와 무지와 어리석음을 여윈 당신과 나의 순수한 영혼이다. 이 성전에 울려 퍼지는 찬양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당신과 나의 가슴에서 울려나오는 신의 메아리다. 이 성전 안에서 경이롭고 신적인 일이 일어난다(매튜 폭스).

 

이 성전을 더럽히지 말라.

 

이 성전을, 진리를 돈으로 거래하는 종교상인들에게서 보호하라.

 

이 성전에서 값을 매길 수 없는 하나님을 값을 매겨 거래하는 불경스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 이 성전에 죄의 씨앗을 흩뿌리는 분리주의자들, 회저병처럼 온몸을 썩게 만드는 부패의 근원인 교권주의자들이 발붙이지 못하게 하라.

 

이 성전을, 곧 당신과 나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걸레가 되어 찢겨지신 이를 기억하라.

 

고진하/시인, 한 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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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24)

 

“주님, 어찌하여 나병환자로 저를 찾아 오셨습니까?”

 

 

영적인 것과 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남에게 나누어주지 않는 사람이

영적이었던 적은 결코 없습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영적인 것과 복을

자기를 위해서만 간직해서는 안 됩니다.

무릇 사람은 자기 몸과 영혼 안에 지닌

모든 것을 서로 나누고,

남이 자기에게 바라는 것이면 무

엇이든지 내주어야 합니다.

 

비바람이 몹시 심하게 부는 어느 날 밤, 남루한 차림의 거지가 성 프란체스코의 오두막으로 찾아왔다.

 

“너무 배가 고프고 추우니, 먹을 것과 잠자리를 좀 마련해 주세요.”

 

프란체스코는 얼른 그 거지를 데리고 들어와서 불빛에 비춰 보니, 그 거지는 얼굴과 코가 문드러진 문둥이였다.

 

그는 서둘러 음식을 준비해서 정성껏 대접한 뒤, 자기의 잠자리를 그에게 내주었다. 침대에 들어간 거지는 그러나 잠시 후, 추워서 견딜 수가 없으니, 당신의 몸으로 자기의 몸을 데워 달라고 했다.

프란체스코는 그가 요구하는 대로, 더러운 몸에 자기의 몸을 비벼 그의 몸을 덥혀 주었다. 잠이 든 거지를 보고 프란체스코도 그 옆에서 잠이 들었다.

 

새벽 기도 시간이 되어 일어나 보니, 침대에서 자던 거지는 간 곳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피고름이 흐르던 그 문둥이의 몸을 감싸고 잤는데도 프란체스코의 몸과 침대에는 그 더러운 이물질이 전혀 묻어 있지 않았다. 프란체스코는 즉시 그 자리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주님, 어찌하여 나병환자로 저를 찾아 오셨습니까? 주님과 같이 동침했으니, 이 죄인의 기쁨을 무엇으로 다 표현하리요!”

 

 

 

밭에 뿌려진 씨앗의 죽음처럼 자기 무화(無化)의 삶을 살았던 프란체스코의 이 이야기는 아주 미묘한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이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 난 뒤 신과 하나 되는 기쁨을 얻었으니, 이 얼마나 신비롭고 경이로운 일인가.

 

가장 작은 자에게 물 한 그릇을 대접하면 그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예수는 가르쳤다. 프란체스코는 예수의 이 가르침을 온전히 실천함으로써 자기보다 큰 존재와 하나 되는 신비를 몸소 체험하는 은총을 얻은 것이다. 진흙으로 빚어진 보잘것없는 유한한 한 인간이 우주적 신성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눔이 갖는 신비요 은총이다.

 

우리는 내가 지닌 것을 나누면 내 소유가 줄어든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너무 좁은 안목이 빚어내는 편견이다. 풍요(affuence)란 단어에는 ‘풍부히 흐른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삶을 순환하는 부와 풍요를 누리려면, 내가 가진 것을 움켜쥐지 말고 흐르게 해야 한다.

 

현대과학이 밝힌 것처럼 모든 물질은 에너지로 되어 있다. 에너지는 멈추지 않고 항상 흐른다. 그러므로 에너지의 순환을 멈추는 것은 피의 흐름을 멈추는 것과 같다. 피가 응고되어 흐르지 않으면 그것은 곧 죽음이다. 나눔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씨앗 속에는 수천 개의 숲의 약속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씨앗은 그냥 있어서는 안 된다. 씨앗은 기름진 땅에 그 지성을 주어야 한다. 그렇게 주게 되면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흘러 물질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주면 줄수록 많이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줌으로써 우주의 풍요한 흐름을 당신의 삶 속에 순환시키는 것이 되므로.”(디팍 쵸프라)

 

디팍 쵸프라의 말처럼 나눔은 작은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 땅에 뿌려진 씨앗은 썩어야 싹을 틔우므로 없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썩어 없어짐[無化]으로써 숲을 이룰 수 있다. 예수나 프란체스코처럼 스스로 낮아지는 사랑의 실천자가 되려면, 이러한 식물적 상상력이 요청되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이 선물로 베풀어 준 당신의 소유를 나누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원하면 다른 이에게 기쁨을 주라. 사랑 받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 주목받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주목하고 인정하라. 물질적으로 풍요롭기를 바라거든 다른 사람을 물질적으로 풍부하게 도우라. 당신이 뿌린 씨앗은 반드시 수천 배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어떤 씨앗의 죽음도 헛되지 않다. 우주는 단 하나의 쿼크[quark:물질의 최소 단위]도 낭비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주가 빚어내는 이 미묘하고 아름다운 신비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의 기쁨과 행복은 배가될 것이다. 그 참여의 한 방법은 곧 나눔이다. 당신의 존재 자체를 내어주는 사랑의 나눔은 결코 헛되지 않다.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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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23)

 

설거지를 명상으로 바꿀 수 있는가

 

 

내적인 행위가 크면 외적인 행위도 크고,

안이 보잘 것 없으면 바깥도 보잘 것 없습니다.

내적인 행위는 자체적으로 크기와 폭과 길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내적인 행위는 하나님의 심장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합니다.

 

슈멜케 폰 니콜스부어크라는 이름의 랍비에게 어느 제자가 물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겠습니까?”

 

스승은 그 제자를 여인숙을 운명하고 있는 아브라함 하임이라는 또 다른 랍비에게 보냈다. 아브라함 하임이야말로 현명하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강조하면서!

 

제자는 그 여인숙을 찾아가서 방을 하나 잡고 여러 주일을 머물렀다. 그리고는 이 스승의 비밀이 무엇인지, 그 흔적이라도 잡아보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지만 아무런 특별한 것도 감지할 수 없었다. 그가 본 것은 너무도 평범한 사람이었고, 그는 그런 여인숙에서 일어나게 마련인 너무도 평범한 일들을 하나씩 처리할 뿐이었다.

 

 

 

 

마침내 그는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고 랍비 아브라함 하임에게, 도대체 스승님은 온종일 무슨 일을 그렇게 하시느냐고 물었다. 랍비가 대답했다.

 

내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식기들을 항상 깨끗하게 닦는 거라네.”

 

제자가 놀라워하며 물었다.

 

그게 다입니까?”

그렇다네. 그게 전부야.”

 

여인숙 주인이 대답했다. 제자는 실망을 금치 못하며 자기 스승에게로 돌아가 자신이 겪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그러자 슈멜케 랍비가 그에게 말했다.

 

이젠 자네가 알아야 할 것을 모두 알았구먼.”

 

로렌츠 마티의 <수상집>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 제자의 기대, 무언가 영적인 것을 기대한 것이 그에게 장애가 되어 아브라함 랍비의 평범함 속에 감춰진 거룩한 삶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어떻게 평범한 삶의 움직임이 거룩한 의식으로 변하고, 설거지라는 일 자체가 명상으로 바뀌는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우리의 행위가 누구에게 보여주려 하거나 가르치려 하지 않고 내적인 간절함에서 비롯된 행위라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심장에서 비롯된 행위일 것이다.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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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22)

 

돼지의 맑은 두 눈

 

 

 

하나님은 스스로를 누리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누리시는 것과 똑같이

모든 피조물을 누리십니다.

모든 피조물을 누리시되,

피조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서의 피조물을 누리십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누리시는 것과 똑같이

만물을 누리십니다.

 

세상 만물의 가장 작은 조각들에도

하나님의 지문이 찍혀 있네.

모든 원자 속에 삼위일체의 거룩한 형상이

성스럽게 모셔져 있으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이

어슴푸레 어려 있네…

내 몸뚱이를 이루는 하나하나의 세포가

모두 다 창조주를 찬미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선언하네.

물총새는 물고기를 잡도록 만들어졌고

붕붕 우는 벌새는

꽃의 꿀을 빨도록 만들어졌으며,

사람은 하나님을 묵상하고

사랑하도록 창조되었다네.

 

이 시를 쓴 에르네스또 까르데날은 남미의 니카라구아 출신의 수도사이며 시인이다. 그는 유명한 토머스 머튼 신부가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던 게세마네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고, 사제로 서품된 뒤 자기 모국 나카라구아로 돌아가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창설된 공동체에서 봉사자로 살았다.

 

무릇 이 수도자 시인에게는 이 땅 위에 성스럽지 않은 것이 없다. 그는 돼지의 맑은 두 눈에서도 하나님의 성스러움은 드러나며, 폐결핵 환자가 뱉은 침도 카리브해의 맑은 바닷물만큼이나 깨끗하다고 말한다. 그가 이처럼 삼라만상을 너그러운 가슴으로 보듬어 안을 수 있는 것은, 그 자신이 엑카르트의 말처럼 “하나님 안으로 풍덩 뛰어들어 그분과 온전한 합일을 이룬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얄팍한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사람들이 더럽다고, 추하다고 고개를 획 돌려버리는 것들에 대해서도 그는 사랑스러운 눈길을 떼지 않는다. 어린 아이가 시궁창에 빠져 온몸을 더럽혔을 지라도 그 아이를 여전히 아끼고 사랑하는 어머니의 마음 같다고나 할까. 아니, 집 떠난 탕자가 다시 거지 신세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조건 없이 받아준 아버지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 같다고나 할까.

 

우리도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다면, 시인처럼 피조세계에 대한 단순한 사랑의 긍정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온갖 물상들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를 꿰뚫어보는 시인 같은 투명한 시선으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배하고 묵상하며, 갈등과 모순의 세상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섬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요즘 까르데날의 시를 읽으며 내 삶의 호흡이 깊어지고 고요해지는 순간을 경험한다. 그리고 내 삶의 뜨락에도 파릇파릇 새순이 돋는 융융한 희열을 맛본다.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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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21)

 

아무도 흔들 수 없는, 궁극의 위로

 

 

피조물의 위로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것에는 무언가가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위로는 순수하고 잡스러운 것이

섞여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완벽하고 완전합니다.

 

지난 겨울에는, 교우 중에 한 분이 참척의 아픔을 겪었다. ‘참척’이란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은 일을 말하는 것. 나는 교우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한 채 교우 딸의 시신이 안치된 병원 영안실로 향했다. 교우의 딸은 막 대학원을 졸업한 장래가 촉망되는 공학도였다. 나는 그가 장기에 퍼진 암으로 죽기 전에 몇 차례 대면할 기회가 있었는데, 아직 앳된 얼굴에 영혼의 해맑음이 어려 있었다.

 

병원 지하의 썰렁한 영안실, 교우는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이 퉁퉁 붓고 목도 잔뜩 쉬어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교우의 떨리는 어깨만 가만히 끌어안았다. 해맑은 표정으로 웃고 있는 딸의 영정 아래 앉아 있는 딸의 엄마 역시 넋이 나간 듯 말이 없었다. 왜 죄 없는 내 딸이 죽어야 하느냐, 하나님은 왜 사랑하는 내 딸을 이리도 일찍 데려갔느냐는 흔한 푸념 한 마디 없었다. 다만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 표정에는 고난당한 자의 한 전형인 욥의 탄식이 서려 있을 뿐.

 

아, 나의 괴로움을 달아보며

내가 당한 재앙을 저울 위에 모두 올려놓을 수 있다면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욥기 6:2).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의 어처구니없는 죽음 앞에서 늙은 부모는 하염없이 눈물만 쏟아낼 뿐이었다. 명색이 목사인 나도 슬픔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위로의 말을 찾지 못한 채 같이 눈물만 섞을 수밖에. 서둘러 눈물을 닦아주려 하기보다는 서로 눈물을 섞는 슬픔의 공명이 역설적으로 그걸 딛고 일어설 힘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고해라는 이 생(生)의 바다를 건너다보면, 이처럼 가슴 찢어지는 일, 그래서 눈물 흘릴 일이 부지기수다. 히브리인들의 영혼의 노래인 시편을 보면, 하늘의 위로를 갈구하는 상한 영혼들의 탄식시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시편의 주인공들이 흘린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흐른다면 아마도 장강(長江)을 이룰 것이다. 그 눈물은 단지 염분을 물에 풀어놓은 것이 아니다. 감상적인 자기 연민에서 쏟아낸 액체만도 아니다. 피붙이가 당하는 슬픔, 가까운 이웃이나 동족이 겪는 억울한 죽음과 고통을 자기 자신의 고통과 동일시한 자비와 위로의 눈물인 것이다. 이 때 눈물은 한 시인의 섬세한 통찰처럼 ‘영혼의 부동액’이 된다.

 

눈물은 영혼의 부동액이라구요?

눈물이 없으면 우리는 다 얼어버린다구요?

 

― 마종기, <나무가 있는 풍경> 일부

 

눈물이 영혼을 얼어붙지 않게 하는 부동액이라니? 눈물은 자비와 위로를 담고 있는 따뜻한 액체이기 때문이다.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눈물은 슬픔과 고통 때문에 주저앉은 타인을 일으켜 세우는 영혼의 묘약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안구 속에 은밀히 숨어 있는 눈물샘은 ‘축복의 샘’이 아닐까? 그래서 예수는 인생이 누릴 여덟 가지 복을 설파하면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마태복음 5:4)이라고 하신 것일까.

 

우리가 마음눈을 열어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가 함께 슬퍼하며 위로해야 할 상한 영혼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특히 세월호 참사로 자식을 잃고 애끓는 유가족들, 극빈의 고통, 실직의 불안, 전쟁의 공포, 환경 재앙, 영적인 공황 등 우리 영혼을 넘어지도록 하는 삶의 부정적 요인들은 허다하다. 이런 부정적 요인을 스스로 극복하고 자기 힘으로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자기 힘만으로 일어설 수 없는 사람들이 세상엔 더 많다.

 

하지만 힘없고 연약하고 무지한 사람만 아니라 강한 자도 넘어지고 지혜로운 사람도 실족할 수 있다. 따라서 세상의 그 누구도 ‘나는 타인의 위로와 격려 따윈 필요치 않아!’ 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인간을 ‘사이’[間]의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때론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이기도 하고, 때론 위로를 베풀어야 할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주고받는 위로는 불완전하다. 내가 당한 슬픔과 괴로움을 함께 나눌 사람이 곁에 있어도 위로받지 못할 때가 있지 않던가.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혼자 울고 혼자 기도하고 싶을 때가 있지 않던가. 그래서 화이트헤드 같은 철학자는 ‘고독’이야말로 종교성이라고 갈파했다. 말하자면 인간에게는 홀로 자기 존재의 바탕인 하나님과 대면하고 싶은 갈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뜨거운 갈망 끝에 하나님과의 웅숭깊은 대면이 이루어질 때 어떤 시인의 심오한 통찰처럼 세상에는 ‘영원한 비탄’도 없고 ‘영원한 눈물’도 없음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 이것은 사람이 베풀어줄 수 없는 위로이다. 눈동자처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만이 베푸실 수 있는 위로이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하나님과의 내밀한 교감으로만 얻을 수 있는 이런 궁극의 위로야말로 곧 구원이 아닐까.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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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20)

 

영적 치매와 과다한 설교

 

 

하나님은 영혼이 넓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영혼에게 많은 것을 받을 기회를 줍니다.

그렇게 해야만 몸소 많은 것을 줄 기회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넓힐 기회는 많지 않다. 지상 위에서의 우리 생은 영혼을 넓힐 유일한 기회이다.

 

하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의 넓이보다 교회 건물의 넓이에 관심을 기울이고, 영혼의 확장보다 교세의 확장을 원한다. 사실상 교회 건물의 넓이와 교세의 확장은 영혼의 확장과 아무 관계가 없다.

 

오히려 교회 건물이 넓어질수록 그 영혼은 위축되고, 교세가 확장될수록 사람들의 영적 관심은 엷어지지 않던가.

 

근자에 한국교회 어느 교단에서 교단장을 차지하기 위해 치졸한 다툼을 벌이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면서, 과연 그들은 우리의 영혼이 넓어지기를 바라시는하나님을 기억이나 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가브리엘 바하니안이란 신학자의 표현을 빌면, 그들은 하나님 없이 사는 실제적인 무신론자들이 아닐까?

 

오늘날 모든 이들이 치매(癡呆)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권력과 금력 따위의 악령에 사로잡힐 때 나타나는 병리현상인, 영적 치매보다 더 두려운 게 있을까.

 

 

 

 

너무 많은 설교

 

이따금 나는 영혼에게 설교하거나

가르침을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영혼 안에는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게 존재할 뿐만 아니라,

영혼 역시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있음을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너무 많은 설교, 너무 지루한 설교, 너무 졸리는 설교, 자기 확신도 없이 구토하듯 토해내는 시끄럽기만 한 설교, 자기 자신도 감화시키지 못하면서 남을 감화시키려는 설교, 말로는 하나님과 진리를 들먹이면서도 장사꾼의 기질을 버리지 못하는 설교, 학문의 그물에 갇힌 윤똑똑이의 공허한 설교, 가르쳐질 수 없는 것을 가르칠 수 있는 양 억지를 부리는 설교, 내면의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이가 떠벌리는 설교, 무한한 모름의 신비로 이끌지 못하는 설교, 내적 침묵으로 안내하지 못하는 설교, 자기 안에 자기보다 크신 분이 시퍼렇게 살아계심을 알지 못하면서 성령의 감화를 빙자하는 설교, 영혼이 없는 듯한 설교.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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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19)

 

살아 있는 성전

 

 

하나님의 형상이자 그분과 똑같은 모습의 영혼을 가진

우리는 새로운 성전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후배 채희동 목사의 부인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당시 채희동 목사는 온양의 한 가난한 교회를 섬기고 있었는데, 성전 건물이 너무 낡아서 헗고 다시 세우기로 교우들과 뜻을 모았다. 마침 그는 자기가 쓴 책을 출간하여 인세로 받은 돈 1,000만원이 있어서 그걸 교회에 건축비로 헌금했다. 물론 당장 성전을 짓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지만. 그는 그 돈을 성전 건축을 위한 종자돈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 무렵 새로 나온 교우 중에 형광등을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이가 고관절이 망가져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걸을 수도 없을 지경으로 병세가 악화되어 있었지만, 병원비가 없어 수술 받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집에만 누워 있었다. 채 목사는 그 교우의 딱한 형편을 보고 이런 결심을 했다.

 

성전을 짓는 일도 귀하지만, 살아 있는 하나님의 성전, 저 아픈 교우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 아닐까. 그 동안 모아진 헌금으로 먼저 교우를 살리고 보자!’

 

채 목사는 성전을 지으려던 돈을 가지고 고통 받는 교우를 찾아갔다. 그리고 교우에게 돈을 내놓고 수술을 받으라고 했다. 교우는 처음엔 완곡히 거절했으나 채 목사의 거듭된 설득과 진심어린 마음을 알고 수술을 받기로 했다.

 

며칠 뒤 그 교우는 수술을 받고 난 뒤에 채 목사에게 이런 가슴 아픈 고백을 들려주더란다. 사실은 목사가 찾아오던 날 밤에 자살을 하려 했었다고!

 

몇 년 뒤, 채 목사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 부인 이진영 목사가 남편 채 목사의 숭고한 뜻을 받들어 그 교회를 섬기고 있다. 아직도 새 성전은 짓지 못하고 여전히 그 낡은 성전에서!

 

하지만 오늘 우리 가운데는 눈앞에 살아 있는 성전을 돌볼 생각은 않고 화려한 건물을 세우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이들이 있다. 하나님의 자비에 눈먼 삯꾼들이다.

 

자신의 영혼이 자비로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에게는 고통 받는 이웃이야말로 곧추세워야 할 성전에 다름 아니리라.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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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18)

 

사랑의 거부(巨富)

 

 

하나님께서 놀라운 방식으로 창조하신 눈부신 피조물 가운데

사람의 영혼만큼 하나님을 닮은 피조물은

하늘나라에도 이 세상에도 없습니다.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고린도전서 2: 9).

 

아무도 상상하지 못할 그 일이 무엇인지는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내 경험의 거울에 비추어 보면,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그 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풍성하고 풍성한 생명을 주셨다’는 선언일 것이다. 이를테면, ‘복’의 선언이다. 엑카르트의 말처럼 우리는 ‘복덩어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복덩어리로 지어졌다는 이런 자각은 ‘도상(途上)의 존재’, 길의 사람인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 곧 ‘왕 같은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아는 일이다. 이런 자각을 가진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부자이다. 세속적인 시각에서는 초라해 보일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은총을 흠뻑 누리는 진정한 부자이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찰을 달고 있으면서도, 인간을 돈에 종속시키는 자본주의 문명에 함몰되어 자신이 하나님의 은총을 덧입은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인도의 시성 라빈드라나드 타고르는 자신이 사랑의 거부(巨富)이신 하나님의 은총을 깨닫지 못하고 살았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시로 읊고 있다.

 

나는 길 저편 그늘진 곳에 살면서

내 이웃의 햇볕 가득한

정원을 바라보고 있다네.

나는 언제나 내가 가난하다고 느끼므로

이 문에서 저 문으로

배고픔을 구걸하고 다닌다네.

사람들이 그들의 풍성함 속에서 아낌없이

나에게 더 많이 주면 줄수록

나는 점점 더 내 동냥그릇이 허전하다고 느끼네.

어느 날 아침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누군가가 나의 문을 두드리면서

구걸을 청해 왔네.

절망에 싸여 장롱을 열자,

그 속에 쌓여 있는 엄청난 보물을 보고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부자이다. 그것을 분명히 자각하려면, 시인처럼 우리 내면의 장롱을 활짝 열어젖혀 보아야 할 것이다. 보물로 가득한 내면의 장롱을 방치한 채 바깥으로만 쏘다니며 구걸하다 보면, 자신이 백만장자라는 사실을 끝내 알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감싸주시는 생기로 충만한 채 생의 길을 가려면, 바깥으로만 향하는 우리의 눈길을 자주 우리 내면으로 돌려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내면의 왕좌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 친밀한 관계는 우리가 길 위의 사람으로 사는 동안 지속되어야 한다. 무려 300년 동안을 하나님과 동행했던 고대의 의인 에녹처럼!

 

고진하/시인, 한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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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하의 마이스터 엑카르트와 함께하는 ‘안으로의 여행’(17)

 

씨앗 속에는 숲이 약속이 들어 있다

 

 

영적인 것과 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남에게 나누어주지 않는 사람이

영적이었던 적은 결코 없습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영적인 것과 복을 자기를 위해서만 간직해서는 안 됩니다.

무릇 사람은 자기 몸과 영혼 안에 지닌 모든 것을 서로 나누고,

남이 자기에게 바라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내주어야 합니다.

 

비바람이 몹시 심하게 부는 어느 날 밤, 남루한 차림의 거지가 성 프란체스코의 오두막으로 찾아왔다.

 

“너무 배가 고프고 추우니, 먹을 것과 잠자리를 좀 마련해 주세요.”

 

프란체스코는 얼른 그 거지를 데리고 들어와서 불빛에 비춰 보니, 그 거지는 얼굴과 코가 문드러진 문둥이였다.

 

그는 서둘러 음식을 준비해서 정성껏 대접한 뒤, 자기의 잠자리를 그에게 내주었다. 침대에 들어간 거지는 그러나 잠시 후, 추워서 견딜 수가 없으니, 당신의 몸으로 자기의 몸을 데워 달라고 했다.

 

프란체스코는 그가 요구하는 대로, 더러운 몸에 자기의 몸을 비벼 그의 몸을 덥혀 주었다. 잠이 든 거지를 보고 프란체스코도 그 옆에서 잠이 들었다. 새벽 기도 시간이 되어 일어나 보니, 침대에서 자던 거지는 간 곳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피고름이 흐르던 그 문둥이의 몸을 감싸고 잤는 데도 프란체스코의 몸과 침대에는 그 더러운 이물질이 전혀 묻어 있지 않았다.

 

프란체스코는 즉시 그 자리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하느님, 어찌하여 나병환자로 저를 찾아 오셨습니까? 주님과 같이 동침했으니, 이 죄인의 기쁨을 무엇으로 다 표현하리요!”

 

밭에 뿌려진 씨앗의 죽음처럼 자기 무화(無化)의 삶을 살았던 프란체스코의 이 이야기는 아주 미묘한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이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 난 뒤 신과 하나 되는 기쁨을 얻었으니, 이 얼마나 신비롭고 경이로운 일인가.

 

가장 작은 자에게 물 한 그릇을 대접하면 그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예수는 가르쳤다. 프란체스코는 예수의 이 가르침을 온전히 실천함으로써 자기보다 큰 존재와 하나 되는 신비를 몸소 체험하는 은총을 얻은 것이다. 진흙으로 빚어진 보잘것없는 유한한 한 인간이 우주적 신성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눔이 갖는 신비요 은총이다.

 

우리는 내가 지닌 것을 나누면 내 소유가 줄어든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너무 좁은 안목이 빚어내는 편견이다. 풍요(affuence)란 단어에는 ‘풍부히 흐른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삶을 순환하는 부와 풍요를 누리려면, 내가 가진 것을 움켜쥐지 말고 흐르게 해야 한다.

 

현대과학이 밝힌 것처럼 모든 물질은 에너지로 되어 있다. 에너지는 멈추지 않고 항상 흐른다. 그러므로 에너지의 순환을 멈추는 것은 피의 흐름을 멈추는 것과 같다. 피가 응고되어 흐르지 않으면 그것은 곧 죽음이다. 나눔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모든 씨앗 속에는 수천 개의 숲의 약속이 들어 있다. 그러므로 씨앗은 그냥 있어서는 안 된다. 씨앗은 기름진 땅에 그 지성을 주어야 한다. 그렇게 주게 되면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흘러 물질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주면 줄수록 많이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줌으로써 우주의 풍요한 흐름을 당신의 삶 속에 순환시키는 것이 되므로.”(디팍 쵸프라)

 

디팍 쵸프라의 말처럼 나눔은 작은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 땅에 뿌려진 씨앗은 썩어야 싹을 틔우므로 없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썩어 없어짐[無化]으로써 숲을 이룰 수 있다. 예수나 프란체스코처럼 스스로 낮아지는 사랑의 실천자가 되려면, 이러한 식물적 상상력이 요청되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이 선물로 베풀어 준 당신의 소유를 나누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원하면 다른 이에게 기쁨을 주라. 사랑 받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사랑하라. 주목받고 싶다면 다른 사람을 주목하고 인정하라. 물질적으로 풍요롭기를 바라거든 다른 사람을 물질적으로 풍부하게 도우라. 당신이 뿌린 씨앗은 반드시 수천 배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어떤 씨앗의 죽음도 헛되지 않다. 우주는 단 하나의 쿼크[quark:물질의 최소 단위]도 낭비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주가 빚어내는 이 미묘하고 아름다운 신비에 참여함으로써 우리의 기쁨과 행복은 배가될 것이다. 그 참여의 한 방법은 곧 나눔이다. 당신의 존재 자체를 내어주는 사랑의 나눔은 결코 헛되지 않다.

 

고진하/시인, 한 살림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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