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191 천인공노(천공) 내 인생의 스승을 찾기 위해서 한 권의 책도 함부러 선택하지 않았다. 중학생이 되고 신학기에 국어 담당이신 담임 선생님이 학급문고를 만들려고 하니, 집에 있는 책들 중에서 각자 두 권씩만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당시 우리집에 있는 책이라곤 한 질의 백과사전이 전부였다. 아버지는 나보고 쓸데없는 책 읽지 말고 학교 공부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정말로 교과서만 보았고, 백지 같은 머릿속에 입력된 건 교과서와 매 수업 시간마다 과목 선생님들의 재미난 수업 내용이 대부분인 중학생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중3 때는 시험지를 풀면서, 선생님이 여기서 장난을 치셨네, 하면서 함정은 피해갈 수 있었고, 정답을 찾을 수 있었다. 쉬는 시간에는 또래들이 돌려보던 '인어공주를 위하여'라는 그 흔한 만화책도 내 .. 2022. 4. 2. 그렇다면, 용산역 노숙인들의 새 보금자리는, 대검찰청으로 강원도 산불 피해로 한창 동해안 이재민 돕기 성금 모금 중이라는데 망연자실해 있을 주민들의 눈가에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까맣게 타다가 타다가 잿더미가 된 빈 가슴들 먼저 보듬어줄 줄 알았는데 타다 남은 불씨까지 꺼뜨려준 빗물이 빈 땅에서 채 마르기도 전에 지푸라기 한 올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화재복구지원 정부 보조금 한 푼이라도 바라며 그런 손끝으로 한 점 찍었을 하얀 투표 용지 붉은 도장 하나 눈앞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선거 직전까지 후보자로서 국민들을 향해 외친 공약을 향한 믿음과 약속의 땅 국민들 가슴으로 채 뿌리 내리기도 전에 아직 대통령도 아닌 국민의 한 사람일 뿐인 당선인이 대통령 직무실을 국방부 건물로 이전하겠다고, 대책도 내세우지 않고서 헛소리를 합니다. 꺼져가던 강원도 동해안의 산불.. 2022. 3. 20. '코로나19'보다 더 위험한 '코바나19금'('썩은 밥에 빠진 누런 코') 한 사람이 있다. 그 옛날 친구를 따라서 뭣 모르고 찾아간 해인사의 백련암. 그리고 성철 스님께 한 말씀을 청하던 젊은이다. 그러면 부처님 앞에 삼 천 배를 올리라는 성철 스님의 한 마디에 괜히 투덜댔다가 "그라믄 니는 마, 만 배 해라!"라는 성철 스님의 엄호에 오기가 발동해서 정말로 백련암 초행길에 만 배를 올렸던 젊은이다. 그가 바로 성철 스님의 상좌인 원택 스님이다. 다리가 끊어지고 온몸이 부숴지는 듯한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만 배를 겨우 마친 젊은이는 기어가다시피하며 성철 스님께 한 말씀을 청하였다고 한다. 청년이 기대했던 한 말씀이란 다름 아닌 청년 인생의 지침이 될 만한 한 말씀이었으리라. 성철 스님은 "지킬 수 있나?" 물으신 후 딱 한 말씀만 하시곤 내려가라 하셨다며 상좌인 원택 스님은 .. 2021. 12. 28. 생각은 그림자, 마음이 실체 대상과 마주하는 찰라 거울에 비친 듯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한 마음이 있습니다. 곧이어 생각이 그림자처럼 뒤따릅니다. 종종 그 생각은 마음을 지우는 지우개가 됩니다. 매 순간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림자가 된 생각에게 맨 첫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무의식 또는 비몽사몽, 명상이나 기도의 순간에 대상과 마주하는 바로 그 순간과 동시에 마음 거울에 비친, 떠오른 그 첫마음이 바로 우리의 본성 즉 본래 마음에 가깝습니다. 곧이어 뒤따르는 의식화된 생각은 단지 본래 마음의 그림자인 것입니다. 실체는 마음입니다. 한 생각을 일으켜 이루어 놓은 이 세상은 마음의 그림자 곧 허상일 뿐입니다. 그 옛날 눈에 보이는 세상이 다인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 석가모니와 예수가 손가락으로 끊임없이 가리키며 보여준 .. 2021. 9. 11.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기" 이따금 아이들에게 질문을 한 후 돌아올 대답을 기다리는 경우가 있다. 어린 생각에도 엄마한테 혼이 날까봐, 어린 마음에도 자기에게 곤란하다 싶으면, 아이들은 무심코 엉뚱한 말로 둘러대거나, 금방 들통날 적절치 않은 말이 입에서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러한 미흡한 말들은 당장에 주어진 현실을 회피하고 싶다거나, 현실을 충분히 직시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아둔함에서 비롯된다. 모두가 일종의 거짓말인 셈이다. 그럴 때면 내 유년 시절의 추억 속 장면들이 출렁이는 그리움의 바다로부터 해처럼 떠오른다. 나의 자녀들과 지금 현재 겪고 있는 똑같은 순간이 나의 유년기에도 있었고, 지금도 그대로 겹쳐진다. 함께 뛰어놀던 동네 언니들이랑 무슨 말을 주고 받을 때면, 큰 언니들은 웃음 띈 얼굴로 사뭇 진지한.. 2021. 9. 10. 플라스틱 그릇과 찻잎 찌꺼기 엄마가 일하러 나간 후 배고픈 아이들만 있는 빈 집으로 짜장면, 짬뽕, 마라탕, 베트남 쌀국수, 떡볶이 국물이 이따끔 지구를 돌고 돌아가며 다국적으로 배달이 된다 늦은 밤 높이 뜬 달을 보며 집으로 돌아오면 한 끼니용 플라스틱 그릇들이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 공장에서 기름으로 만든 일회용 플라스틱 그릇에 먹다가 남긴 배달음식들도 죄다 기름투성이들 주방세제를 열 번을 뭍혀가며 제 아무리 문질러도 기름과 기름은 서로 엉겨붙어 미끌미끌 나를 놀린다 그냥 대충 헹구어 재활용 폐기물로 버릴까 하다가 천 년의 세월이 흘러도 썩지 않는다는 플라스틱이라 오늘날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나 하나라도 하나의 쓰레기라도 줄이자는 한 생각을 씨앗처럼 숨군다 주방세제를 뭍히고 또 뭍히고 씻겨내고 또 씻겨내어도 미끌미끌 저 혼자서.. 2021. 6. 19. 기말고사가 끝나면 <조국의 시간>을 읽기로 했다 요즘은 학생들 기말고사 기간이라고 한다. 학교에서도 코로나 안전 수칙을 잘 지키느라 등교하는 날이 많지 않다. 고1이 된 딸아이가 가끔 침대에 모로 누워서 귀로만 듣는 온라인 수업이 절반이래도, 돌아오는 시험날은 나가는 월세와 월급처럼 어김이 없다. 그 옛날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버스에서 내리면, 혼자서 집으로 걸어가는 밤길이 어둑했다. 동대신동 영주터널 사거리 신호등 앞에서 멈추어 서면, 언제나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먼저 살피다가, 머리 위에는 달이 혼자서도 밝고, 바로 옆으로 우뚝 보이는 혜광고등학교 창문들마다 그 늦은 시간까지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거기서 그대로 북녘 하늘로 가로선을 그으면, 저 멀리 대청공원 6·25충혼탑 꼭대기에 작은 불빛들이 마치 작은 별빛 같았는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내 .. 2021. 6. 14. 한국은 섬나라가 아닌, 대륙과 하늘의 나라다 해외 여행이라 하면 비행기가 먼저 떠오른다. 지금은 코로나 비상시기로 출입국이 엄격한 시절을 보내고 있지만, 생각해 보면 비행기를 타고 가는 하늘길이 아니고선, 지구상의 그 어느 다른 나라든 갈 수 없는, 땅의 길이 막힌 처지가 현재 한국의 입장인 셈이다. 세삼스레 이런 현실을 떠올리다 보면 가슴 한 구석이 갑갑해진다. 마치 지구촌의 대륙으로부터 한국이라는 나라가 뚝 떨어져 섬처럼 고립된 것 같아서 스스로의 입지를 돌아보게 된다. 마치 일본처럼 섬나라가 된 한국은 아닌지. 그래서 국민들의 정서까지도 섬나라의 폐쇄성을 은연중에 닮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염려를 내려놓지 못할 때가 있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구한말 한국이 일제강점기의 수탈을 겪으며, 광복 직후 열강들이 이 땅에서 일으킨 6.. 2021. 6. 2. 윤동주 시인의 하늘, 그 원맥을 <나철 평전>에서 찾았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시인, 일본인도 사랑하는 세계 평화의 시인, 내가 가장 사랑하는 하늘이 아름다운 시인, 그런 윤동주 시인의 하늘이 나는 늘 궁금했었다. 그 하늘은 어디에서 왔을까?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학술서와 문학서에선 어린 시절 윤동주 시인이 살았던 마을인 북간도, 그곳 마을에 살던 이웃들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라서 그렇다고들 했다. 하지만 제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윤동주 시인의 하늘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윤동주 시인의 시에서 펼쳐지는 하늘은 분명히 크고 밝은 배달의 하늘이다. 시에서 크고 밝은 한의 정서가 가장 잘 드러나는 시인이 윤동주인 셈이다. 나는 늘 그의 하늘이 궁금했었다. 그 하늘의 원맥이 궁금했었다. 그동안 윤동주 시인과 관련한 대부분의 책들 그 어디에서도 안타깝지만 그 원맥을.. 2021. 5. 29. 이전 1 2 3 4 5 ··· 2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