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참한 말로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62)

 

비참한 말로

 

“바벨론 왕(王)이 립나에서 시드기야의 목전(目前)에서 그 아들들을 죽였고 왕(王)이 또 유다의 모든 귀인(貴人)을 죽였으며 왕(王)이 또 시드기야의 눈을 빼게 하고 바벨론으로 옮기려 하여 사슬로 결박(結縛)하였더라”(에레미야 39:6-7).

 

독일 속담 중에 ‘끝이 좋아야 모든 게 좋은 것이다’(Ende gut, alles gut)는 속담이 있다. 가만 생각해 보면 자칫 오해를 살 수 있는 말이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그런 가벼운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속담을 보면 ‘끝만’이 아니라 ‘끝이’다. 끝만 좋으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끝이 좋아야 한다고 말한다. 모든 과정이 다 중요할 터이지만, 무엇보다도 끝이 더욱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좋게 시작을 했다가 좋지 않게 끝나는 일들이 적지가 않다. ‘지옥으로 가는 모든 길이 선한 동기로 포장되어 있다’는 말이 있거니와, 좋은 말잔치로 시작을 했다가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끝나는 경우들이 많다.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좋은 관계로 시작을 했다가 나중에는 좋지 않은 관계로 끝나는 경우들이 있다. 기쁨을 주던 사람들이 어느 날부터인가 아픔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한 사람의 인생도 다르지 않다. 누가 보아도 부러움을 살만한 삶을 살다가, 나중에는 더없이 비참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있다. 그런가 하면 신산고초(辛酸苦楚)를 겪어가며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던 사람이 언제 그런 시절이 있었느냐는 듯이 넉넉하고 평온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시드기야 왕의 말로는 참으로 비참하다. 시드기야는 자기 백성들이 두려웠다. 백성들은 바빌로니아 군대에게 투항을 했다. 예레미야가 전하는 주님의 뜻을 따라 자신이 바빌로니아에게 항복을 할 경우 바빌로니아 군대가 자신을 백성들에게 넘겨주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그럴 경우 백성들이 자신을 학대할 것이라고 시드기야는 생각했던 것이다.

 

시드기야의 모습이 불쌍하고 불행하다. 왕이 백성을 두려워하다니 말이다. 나라를 바로 이끌고 백성들을 사랑했다면 나라의 형편이 어찌 되든 무엇이 두려울까만, 시드기야는 자신을 백성에게 넘길 경우 백성들이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라 생각을 하고 있으니 딱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왕이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자 예레미야가 말한다.

 

“그 사람들 손에 넘어가시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소인이 전하는 야훼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래야 임금님의 앞길이 열릴 것입니다. 그래야 임금님께서는 목숨을 건지십니다.” (38:20, 공동번역)

 

지금이라도 주님의 말씀을 따르라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목숨을 건질 수 있다고, 만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매우 구체적인 일들을 나열했지만 왕은 끝내 예레미야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왕은 그런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하지 말라며 함구할 것을 명한다.

 

시드기야의 결국이 어땠을까? 잊을 수 없는 날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마침내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날을 이렇게 기록한다.

 

“시드기야 제 십일 년 넷째 달 구일에 마침내 성벽이 뚫렸다.”(39:2, 새번역)

 

혼비백산 도망을 치던 시드기야는 여리고 평원에서 사로잡혀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 앞에 끌려오게 된다. 마침내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이 처형을 당한다. 자식들이 죽는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보아야 했던 아비의 고통이 얼마나 컸을까.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처형한 느부갓네살 왕은 마침내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아버린다. 결국 시드기야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아들들이 죽는 모습이 되고 말았다.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그보다 더 고통스럽고 비극적인 결말이 어디 있을까? 바빌로니아로 끌려가기 위하여 쇠사슬에 묶이는 것은 앞선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싶다.

 

주님의 뜻에 눈이 멀자 결국은 두 눈이 뽑히고 마는 시드기야, 그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보게 된 것 또한 비극 중의 비극, 한 사람의 말로가 이리도 비참할 수 있을까 싶어 몸서리가 쳐진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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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덩이에 빠졌을 때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61)

 

웅덩이에 빠졌을 때

 

“그들이 예레미야를 취(取)하여 시위대(侍衛隊) 뜰에 있는 왕(王)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을 때에 예레미야를 줄로 달아내리웠는데 그 구덩이에는 물이 없고 진흙뿐이므로 예레미야가 진흙 중(中)에 빠졌더라 왕궁(王宮) 환관(宦官) 구스인(人) 에벳멜렉이 그들의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음을 들으니라 때에 왕(王)이 베냐민 문(門)에 앉았더니 에벳멜렉이 왕궁(王宮)에서 나와 왕(王)께 고(告)하여 가로되 내 주(主) 왕(王)이여 저 사람들이 선지자(先知者) 예레미야에게 행(行)한 모든 일은 악(惡)하니이다 성중(城中)에 떡이 떨어졌거늘 그들이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으니 그가 거기서 주려 죽으리이다 왕(王)이 구스인(人) 에벳멜렉에게 명(命)하여 가로되 너는 여기서 삼십 명(三十名)을 데리고 가서 선지자(先知者) 예레미야의 죽기 전(前)에 그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라 에벳멜렉이 사람들을 데리고 왕궁(王宮) 곳간(庫間) 밑 방(房)에 들어가서 거기서 헝겊과 낡은 옷을 취(取)하고 그것을 구덩이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줄로 내리우며 구스인(人) 에벳멜렉이 예레미야에게 이르되 너는 이 헝겊과 낡은 옷을 네 겨드랑이에 대고 줄을 그 아래 대라 예레미야가 그대로 하매 그들이 줄로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낸지라 예레미야가 시위대(侍衛隊) 뜰에 머무니라”(예레미야 38:6-13).

 

성경을 눈물로 읽을 때가 있다. 말씀을 읽다말고 나도 모르게 왈칵 뜨거운 눈물이 솟을 때가 있다. 말씀이 나를 만나는 순간이고, 내가 말씀을 만나는 순간일 것이다.

 

지금까지 걸어온 목회의 여정을 되돌아볼 때,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은 독일에서 목회를 할 때였다. 이런 게 선배들이 말한 피눈물인가 싶은 눈물을 참 많이도 흘렸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예배당에 홀로 앉아 뜨거운 눈물을 닦을 때가 적지 않았다. 길은 쉽게 보이지 않았고, 길이 보이지 않는 순간과 과정은 참으로 고통스러웠다.

 

 

 

 

뜨거운 불 속을 지나는 것도 같고 맨발로 가시덤불 한가운데를 지나는 것도 같은 시간, 눈물로 다가왔던 말씀 중의 하나가 예레미야였다. 그 중에서도 웅덩이에 빠진 예레미야는 더욱 그랬다. 어쩌면 당시의 내 처지와 다를 것이 없다 여겨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타협하면 얼마든지 길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예레미야는 끝내 타협하지 않았다. 백성들이 원하는 소리를 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전했다. 나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말씀의 사람, 예레미야는 그 자리를 포기하지 않는다. 결국 예레미야는 웅덩이에 빠지고 만다. 물웅덩이에 갇힌 것인데, 이제 예레미야의 삶은 거기서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신하들의 청을 받아들여 왕이 허락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예레미야는 물웅덩이에서 벗어난다. 혼자의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웅덩이, 예레미야는 어떻게 웅덩이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일까? 비슷한 상황 속에서 괴로운 심정으로 말씀을 읽던 터라 더욱 마음을 담아 눈여겨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왈칵 눈물이 솟았다.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은 물웅덩이에 물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물웅덩이는 5월과 10월 사이의 갈수기를 대비해서 물을 저장해 두는 곳이었다. 예레미야가 웅덩이에 빠졌을 때는 아마도 6월이나 7월경이 아닐까 싶다. 예루살렘은 BC 587년 8월에 함락되는데, 예레미야가 웅덩이에 갇힌 때는 성이 함락되기 직전이었으니 말이다.

 

갈수기의 기간을 생각한다면 웅덩이에는 물이 절반쯤은 남아 있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물이 없고 진흙뿐이었으므로 진흙에 빠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진창 속에 빠지긴 했지만 물이 없어 진창에 빠졌을 뿐이었다.

 

그것이 우연으로 여겨지질 않았다. 운이 좋았던 것으로 생각되질 않았다. 물이 없는 진창, 필시 그것은 웅덩이에 빠지는 예레미야를 받는 하나님의 손이었다. 우연이란 하나님이 겸손히 자신을 감추기 위해 입고 있는 옷과 같다고 하지 않나. 진창에 빠진 상황을 힘들어하던 내게 한 줄기 빛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마음을 뜨겁게 했던 것은 또 있다. 왕을 찾아가 예레미야에게 행한 일이 악한 일이라 항변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왕궁 내시 구스 사람 에벳멜렉이었다. 구스라면 에티오피아, 그는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예레미야에게 일어난 일은 왕이 허락한 일이었다. 그런 일에 나선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 목숨을 담보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구스 사람이 나선다.

 

하나님은 지금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움직이고 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사람을 움직여 웅덩이에 빠진 예레미야를 건져내는 일을 시작하고 있다. 내가 아는 사람들, 내가 기대하는 사람들이 아니구나. 그들이 침묵한다고 낙심할 일이 아니구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정작 뜨거운 눈물을 쏟게 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왕의 허락을 받은 에벳멜렉은 사람들을 데리고 왕궁의 한 방으로 간다. 그곳에서 꺼낸 것은 ‘헝겊과 낡은 옷’이었다. ‘해어지고 찢어진 옷조각들’(새번역), ‘해진 옷과 누더기’(성경)들을 챙긴다.

 

그것들을 밧줄에 달아 예레미야에게 내려 보내며 에벳멜렉이 소리친다. “해어지고 찢어진 옷조각들을 양쪽 겨드랑이 밑에 대고, 밧줄에 매달리십시오.” <새번역>

 

웅덩이에 빠진 예레미야는 남아 있는 힘이 없었을 것이다. 밧줄만 잡고 올라오다가는 놓칠 것이 자명했다. 낡은 옷을 허리에 두르게 하고, 그곳을 밧줄로 묶는다면 따로 힘을 쓰지 않아도 큰 도움이 될 일이었다.

 

헝겊과 낡은 옷, 해어지고 찢어진 옷조각들, 그것이 예레미야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하나님의 손길이라 하기엔 너무도 초라하고, 보잘 것 없고, 허약하다. 도저히 그분의 손길이라 인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다시 확인하는 ‘헝겊과 낡은 옷’, ‘해어지고 찢어진 옷조각들’이라는 말 앞에 눈물을 그치기가 어려웠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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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앙과 두려움 사이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60)

 

불신앙과 두려움 사이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 일을 왕(王)에게 아시게 하여도 왕(王)이 단정(斷定)코 나를 죽이지 아니하시리이까 가령(假令) 내가 왕(王)을 권(勸)한다 할지라도 왕(王)이 듣지 아니하시리이다”(에레미야 38:15).

 

몇 해 전 같은 지방에서 목회를 하는 목회자들과 일본 나가사키 지역을 다녀온 적이 있다. 거론되고 있던 동남아 대신 의미 있는 곳을 찾으면 좋겠다고 한 마디 의견을 보탰다가, 결국은 동행을 하게 됐다.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소설 《침묵》의 배경이 된 곳, 일본에는 생각지 못한 시절 뜨거운 순교의 피를 흘린 현장이 있었다. 순교의 피는 너무나 뜨겁다 싶은데 그럼에도 신앙과 상관없다 여겨지는 오늘의 모습, 쉽게 메워지지 않는 생각의 간극 때문일지 둘러보는 그 땅은 기이함으로 다가왔다.

 

순교지를 둘러보던 중 오무라 코오리 마을에 들렀을 때였다.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131명이 순교를 당한 마을이었다. 처음 접한 신앙, 순박하고 무지했던 사람들, 그럼에도 그 무엇이 그들을 순교의 자리로 나아가게 했을까, 과연 나를 포함한 오늘의 신앙인들은 같은 경우를 만났을 때 죽음으로써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니 오무라 코오리 마을에서 기독교인들을 처형한 이들은 131명을 처형한 뒤에 목을 잘라 몸과 머리를 따로 묻었다고 한다. 행여나 자신들이 죽인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살아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은 한 목사님이 “그들도 부활은 믿었나 보네?” 하여 다 같이 웃었다. 그 목사님의 말에 한 마디를 보탰다.

 

“믿었던 게 아니라 두려워했던 것이겠지요.”

 

 

 

예레미야가 전한 주님의 말씀을 백성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말로 여겨 예레미야를 물웅덩이에 던져 넣었던 시드기야 왕, 그런데 성전 어귀로 예레미야를 불러내 “아무 것도 나에게 숨기지 말라” 하며 주님의 뜻을 묻는다.

 

시드기야는 두려웠던 것이다. 아무리 자기가 받아들이지 않고 외면한다고 해도 주님의 뜻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왜 시드기야가 몰랐을까?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실은 주님의 뜻이 두려웠던 것이다.

 

왕의 질문에 예레미야는 이렇게 대답을 한다.

 

“제가 만일 숨김없이 말씀드린다면, 임금님께서는 저를 죽이실 것입니다. 또 제가 임금님께 말씀을 드려도, 임금님께서는 저의 말을 들어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새번역>

 

“소인이 바른 말을 하면 임금님께서는 틀림없이 소인을 죽이실 것입니다. 소인이 말씀드려도 임금님께서는 듣지 않으실 것입니다.” <공동번역>

 

“제가 임금님께 사실대로 아뢰면 임금님께서 반드시 저를 죽이실 것이고, 제가 임금님께 조언을 드린다 해도 임금님께서 제 말을 들으실 리가 없습니다.” <성경>

 

말씀에 귀를 닫고 완전무장을 한 채 두려움으로 말씀을 묻고 있는, 시드기야의 모습이 딱하고 두렵다. 불신앙과 두려움 사이, 그곳은 결코 신앙의 자리가 아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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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제 집으로 삼은 사람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59)

 

말씀을 제 집으로 삼은 사람

 

이에 그 방백(方伯)들이 왕(王)께 고(告)하되 이 사람이 백성(百姓)의 평안(平安)을 구(求)치 아니하고 해(害)를 구(求)하오니 청(請)컨대 이 사람을 죽이소서 그가 이같이 말하여 이 성(城)에 남은 군사(軍士)의 손과 모든 백성(百姓)의 손을 약(弱)하게 하나이다(에레미야 38:4).

 

오래 전 기억이 맞는다면 장작불 속에서 타 죽어간 개미 이야기를 들려준 이는 솔제니친이 아닐까 싶다. 활활 타고 있는 모닥불 속에 통나무 하나를 집어넣었다. 통나무가 타오르기 시작했을 때 불이 붙은 장작에서 개미들이 떼를 지어서 쏟아져 나왔다. 무심히 던져 넣은 그 장작개비 속에 개미집에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는 황급히 불 붙은 통나무를 모닥불 속에서 끌어내었다. 생명을 건진 개미들의 일부가 불을 피해 달아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미들은 좀처럼 불길을 피해 달아나려고 하지를 않았다. 가까스로 불길을 피했던 개미들도 방향을 바꾸어 통나무 둘레를 빙빙 맴돌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많은 개미들이 여전히 불이 타고 있는 통나무 위로 다시 기어 올라갔다. 그리고는 통나무에 붙어서 그대로 타 죽어가는 것이었다.

 

개미 이야기는 기이하게 다가온다. 불에 타서 죽게 될 위험이라면 서둘러 불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당연한 일, 그런데 그 어떤 힘이 개미들을 제 집으로 다시 돌아오게 한 것일까, 그 무엇이 개미들을 불 속에서 타 죽게 했던 것일까, 의아한 생각이 든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의 손에 넘어갈 것을 여전히 외친다. 예루살렘 성 안에 머물러 있는 자는 전쟁이나 기근이나 염병으로 죽게 될 것이라고, 그러나 바빌로니아 군인들에게 나아가서 항복을 하는 사람은 자기의 목숨을 건질 것이라고, 결국 예루살렘 성은 바빌로니아 왕의 군대에게 넘어가게 될 것이라고 외쳤다. 그러자 대신들이 시드기야 왕에게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은 마땅히 사형에 처해야 합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해서, 아직도 이 도성에 남아 있는 군인들의 사기와 온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참으로 이 백성의 평안을 구하지 않고, 오히려 재앙을 재촉하고 있습니다”(4절, 새번역).

 

사람들은 도무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군인들의 사기와 온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다면서, 백성의 평안이 아니라 화를 구하고 있다면서 예레미야를 죽여야 한다고 왕에게 고한다. 자신들에게 필요한 말은 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말을 하고 있는 예레미야를 없애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예레미야의 모습이 딱하고 안쓰럽다. 그런 말을 하면 어떤 결과가 주어질지 뻔히 알면서도 어찌 예레미야는 멈추지 않았던 것일까, 꼭 그래야만 했던 것일까, 불편한 심정으로 묻게 된다.

 

돌아오느니 배척과 비난과 박해뿐임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가 포기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전한 데는 이유가 있다. 예레미야는 그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이라 말을 할 줄 모른다고, 주님의 뜻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어리고 부족하다면서 예레미야는 주님의 부르심을 외면하려고 했다. 어떻게든 주님을 설득해서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은 부름을 받았다.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1:7).

 

거듭해서 명하시는 주님의 말씀 앞에 마침내 예레미야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주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예레미야의 입에 대며 “보라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1:9) 하신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똑똑히 보아라. 오늘 내가 뭇 민족과 나라들 위에 너를 세우고, 네가 그것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고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였다”(1:10).

 

예레미야를 세워 뭇 민족과 나라들을 뽑으며 허물며, 멸망시키고 파괴하며, 세우며 심게 하시겠다니, 누가 보아도 그 일은 자신을 아이라 고백하는 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일이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결국 주님께 졌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부름을 받을 때야 도망을 치고 싶었다 할지라도 마침내 부르심을 받아들였다면 제대로 쓰임 받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주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라 부름을 받은 사람, 사람들이 나를 뭐라 하든, 박수를 치든 손가락질을 하든, 나는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할 사람, 예레미야는 타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불 속으로 돌아가면 불에 타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 집을 떠날 수가 없었던 개미들에 비춰 생각하면, 예레미야야 말로 주님께서 주신 말씀을 제 집으로 삼은 사람이었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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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쯤은 희망을 품고 반쯤은 두려움을 품은 채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58)

 

반쯤은 희망을 품고 반쯤은 두려움을 품은 채

 

“시드기야 왕(王)이 보내어 그를 이끌어 내고 왕궁(王宮)에서 그에게 비밀(秘密)히 물어 가로되 여호와께로서 받은 말씀이 있느뇨 예레미야가 대답(對答)하되 있나이다 또 가로되 왕(王)이 바벨론 왕(王)의 손에 붙임을 입으리이다”(예레미야 37:17).

 

같은 본문을 읽고 묵상한 다른 이의 글을 읽는 것은 조심스럽기도 하고 유익하기도 하다. 조심스러운 것은 그것이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처럼 자리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말씀과 씨름을 하며 내가 길어올릴 수 있는 묵상의 내용을, 다른 이가 길어 올린 물로 손쉽게 대신하는 우를 범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익함도 크다. 무엇보다도 다른 이의 묵상을 대하며 얻는 유익함 중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있다면 내 좁다란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는 점이다. 말씀을 대하는 마음은 저마다의 신앙과 성품과 경험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것, 나로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묵상의 내용을 대하게 되면 새삼 말씀의 깊이와 폭에 놀라며 고마워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주님의 말씀은 매장된 모든 것을 다 파낸 폐광이 아니라 아직도 무엇이 얼마나 묻혀 있는지를 전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땀 흘리며 곡괭이질을 하는 만큼만 알려주는 거대한 광산과 다를 바가 없다.

 

마침 지난주 묵상(‘내게는 말씀이 있습니다’)의 본문으로 삼았던 예레미야 37장 17절의 본문을 월터 브루그만이 쓴 《텍스트가 설교하게 하라》에서도 다루고 있다. 쉬어가는 마음으로, 경청하는 마음으로 내용 그대로를 옮겨본다.

 

 

 

 

<우리는 시드기야처럼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고 물으면서 나타납니다. 이 왕은 ‘은밀히’ 물어보려고 나타났는데, ‘밤중에’ 예수를 찾아온 니고데모(요한복음 3:2)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시드기야왕이 찾아온 까닭은 그가 감당할 수 없는 바벨론 군인들이 그 도시를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지지 체계’와 ‘지식인 공동체’가 그들의 자원을 모두 소진하여 도무지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닥친 무서운 상황 때문에 모든 것이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아직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여호와께서 기적을 행하여 구원해 주신 적이 있었다는 소문을 듣고, 또 그런 기적이 다시 한 번 일어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참조, 예레미야 21:2).

그처럼 무서운 상황에서 불안에 휩싸여 있으면서도 그는 절박한 희망을 품고 찾아온 것입니다. 이 희망은 두려움으로 채색되어 있는데, 한편으론 신앙의 전통에 뿌리박고 있으며 또 한편으론 실제 상황에 따른 불확실성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희망은 신학적인 특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를 담고 있습니다.

어쨌든 시드기야왕은 그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말씀을 들을 준비도 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그 들은 말씀을 도무지 감당할 수가 없어서 그 말씀을 들으려고 왔다는 사실 자체를 ‘부인해야’ 할 만큼 고통스러웠지만 말입니다(에레미야 38:24-28).

우리도 설교를 들으려고 올 때는 시드기야처럼 반쯤은 희망을 품고 반쯤은 두려움을 품은 채 그 자리에 있기가 당황스러우면서도, ‘복되거나 저주스러운’ 우리의 현 상황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은 아니라고 반쯤 믿으면서 나오게 됩니다.>

 

말씀을 들으러 나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을 시드기야에 빗대어 표현한 마지막 문장 ‘반쯤은 희망을 품고 반쯤은 두려움을 품은 채 그 자리에 있기가 당황스러우면서도, 복되거나 저주스러운 우리의 현 상황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은 아니라고 반쯤 믿으면서 나오게 됩니다.’에 공감을 한다.

 

말씀의 자리로 나아가는 우리들은 습관처럼 무덤덤하게 나아갈 때도 있고, 비를 기다리는 마른땅처럼 절박한 심정으로 나아갈 때도 있다. 어떤 모습이든 우리 안에는 ‘반쯤은 희망을 품고 반쯤은 두려움을 품은’ 마음이 있다. 말씀으로 마음이 채워지기를 바라는 희망과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을 감당해야 하는 두려움을 아울러 가지고 나아간다.

 

‘반쯤은 희망을 품고 반쯤은 두려움을 품은’, 말씀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우리가 알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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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말씀이 있습니다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57)

 

내게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토굴(土窟) 옥(獄) 음실(陰室)에 들어간 지 여러 날 만에 시드기야 왕(王)이 보내어 그를 이끌어 내고 왕궁(王宮)에서 그에게 비밀(秘密)히 물어 가로되 여호와께로서 받은 말씀이 있느뇨 예레미야가 대답(對答)하되 있나이다 또 가로되 왕(王)이 바벨론 왕(王)의 손에 붙임을 입으리이다”(예레미야 37:16-17).

 

‘용기’(勇氣)를 사전에서는 ‘씩씩하고 굳센 기운’ 또는 ‘사물을 겁내지 않는 기개’라 풀고 있다. 예수님을 통해 생각하게 되는 용기의 모습이 있다. 풍랑이 이는 밤바다, 어부 출신의 제자들은 놀라 당황했지만, 예수님은 태연히 잠을 주무신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고 평온함을 누리는 것, 그것이 믿음 혹은 믿음에서 비롯된 용기임을 예수님은 그 밤 몸으로 보여주셨다.

 

또 한 가지 예수님을 통해 보게 되는 용기는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는 모습이다.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 하니 여기에서 떠나가라고, 뜻밖에도 어떤 바리새인들이 일러주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

 

“가서, 그 여우에게 전하기를 ‘보아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칠 것이요,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끝낸다’ 하여라.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 날도, 나는 내 길을 가야 하겠다. 예언자가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는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새번역, 누가복음 13:32-33)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는 줄을 잘 알지만 그 길이 내 길이기에 포기하지 않고 가는 것, 그 또한 믿음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용기임을 생각하게 한다.

 

 

내 나라 조국의 멸망을 예언해야 했던 예레미야의 심정이 어찌 괴롭지 않았을까? 귀에 단 말을 기대하는 백성들에게 쓰디 쓴 소리를 외쳐야 했던 예레미야의 마음이 편할 리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예언자의 길, 주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해야 하는 것이 예레미야에게 주어진 길이었다.

 

바벨론이 이집트의 군대 때문에 잠시 예루살렘에서 물러났을 때였다. 예레미야는 집안의 일로 베냐민으로 갔다가 그를 미워하던 이들에게 붙잡혀 지하 감옥에 갇히고 만다.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바벨론으로 투항하러 간다는 누명을 씌우고선 예레미야를 때린 뒤 오래도록 감옥에 가둬두었다.

 

예레미야를 가둔 곳은 ‘토굴(土窟) 옥(獄) 음실(陰室)’이었다. 어둠 속에 소리를 가둔 것이다. 하지만 소리는 어둠이나 지하에 갇히지 않는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대신 말씀을 전하는 자를 가두고 있지만 사람이 말씀의 근원을 가둘 수는 없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가둠으로 주님의 말씀을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과 다를 것이 없다.

 

이 모든 일을 방조했던 시드기야 왕이 어느 날 사람을 보내어 예레미야를 왕궁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고 은밀히 물어본다. 말씀을 전하는 이를 가뒀던 왕이 자신이 가뒀던 이를 불러내어 아무도 모르게 주님의 말씀을 묻는 모습이 기이하게 역설적이다.

 

왕은 예레미야를 감옥에 가둠으로 더 이상 쓴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었지만, 실은 주님의 말씀이 두려웠던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도피를 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여 은밀하게 묻는, 시드기야의 모습 속에는 인간의 연약함이 담겨 있다.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왕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는지에 따라 예레미야의 처지와 목숨이 좌우되는 순간이었다. 지하 토굴 어둠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설마 예레미야가 몰랐을까?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렇게 대답을 한다.

 

“있습니다. 임금님께서는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지게 될 것입니다.”

 

왕에게 쓴 소리를 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아프게 경험했으니, 이제 자신이 대답할 말이 무엇인지를 예레미야는 충분히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잘 모르겠다고 하든지 아니면 알 듯 모를 듯한 말로 얼버무리든지, 선택의 여지는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예레미야는 왕의 면전에서 또 다시 있는 그대로의 주님 말씀을 말하고 있다.

 

어떻게 대답하는지에 따라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지를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알았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그렇게 대답을 했다. 주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한 대가로 내게 돌아오는 것이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내게는 주님께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하는 사람, 그가 주님의 사람이며 그것이 주님의 사람이 걸어갈 길이다.

 

“내게는 주님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 사람의 눈치를 보며 자라목 감추듯 말씀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맡기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다가 어느 토굴 어느 음실에 갇힌 오늘의 예레미야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지.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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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마리는 태워도 말씀은 태우지 못한다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56)

 

두루마리는 태워도 말씀은 태우지 못한다

 

“이에 예레미야가 다른 두루마리를 취(取)하여 네리야의 아들 서기관(書記官) 바룩에게 주매 그가 유다 왕(王) 여호야김의 불사른 책(冊)의 모든 말을 예레미야의 구전(口傳)대로 기록(記錄)하고 그 외(外)에도 그 같은 말을 많이 더 하였더라”(예레미야 36:32).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어디 그런 모습이 한둘일까만 내게도 떠오르는 모습이 있다. 흔히 미련한 사람을 ‘꿩 대가리’라 부르는 데,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어릴 적 시골의 초등학교에서는 겨울이 되어 눈이 수북이 쌓이면 선생님들이 학생들과 함께 뒷산으로 올랐다. 토끼사냥을 가는 것이다. 한쪽에 그물을 쳐 놓고는 손에 막대기를 든 학생들이 산 전체를 에워싼 채 함성을 지르며 몰이를 시작하면 놀라 도망을 치던 토끼들이 걸려들곤 했다.

 

어떤 날은 토끼 대신 엉뚱한 것을 잡기도 했다. ‘꿩 대신 닭’이 아니라, ‘토끼 대신 꿩’을 잡는 것이다. 눈 덮인 겨울 산에서 꿩을 발견하면 학생들이 고함을 지르며 몰아댄다. 꿩은 독특한 습성이 있어 오랫동안을 날지 않고 잠깐 날다가는 꼭 내려앉고는 한다.

 

꿩에게는 또 한 가지 바보 같은 특징이 있는데, 몰이에 쫓기다 더는 어쩔 수가 없게 되면 자기 머리를, 그야말로 대가리를 눈 속에 파묻고는 꼼짝을 하지 않는다. 제 깐에는 숨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제 눈에 아무것도 안 보이니 안전하게 숨은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이니, 그렇게 우스꽝스럽고 어리석은 모습이 또 있을까 싶다.

 

 

여호야김 왕은 예레미야를 통해 전해진 주님의 말씀이 영 불편했다. 하긴 바벨론에게 나라를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으니 어느 왕이 그런 그것을 좋아할까?

 

왕은 두루마리에 적힌 주님의 말씀을 듣는 대로 소도(小刀)로 베어 화롯불에 태웠다. 두루마리를 베어낼 때 쓴 칼은 갈대 글씨를 쓰기 위해 촉을 만들 때 사용하는 것으로, 주님의 말씀을 기록할 때 서기관들이 사용하던 칼이었다. 말씀을 기록하기 위해 사용했던 칼을 말씀을 베어 없앨 때 사용했던 것이다.

 

그렇게 왕이 두루마리를 모두 태운 뒤에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다시 명하신다. 다른 두루마리를 구해다가 첫 번째 두루마리에 기록하였던 먼젓번 말씀을 모두 다시 적으라는 것이었다.

 

또한 주님은 왕에게 임할 진노를 말씀하신다. 먼저 왕의 후손들 중 다윗의 왕좌에 앉을 자가 하나도 없을 것이라 하신다. 여호야김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에 오르지만 여호야긴은 왕위에 오른 지 석 달 만에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고, 37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야 자유로운 몸이 된다. 여호야김의 시체는 무더운 낮에도 추운 밤에도 바깥에 버려져 뒹굴게 될 것이라 하신다. 죽은 뒤에도 아무도 돌보는 자가 없는 수치를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이 내리시는 재앙은 왕에게서 그치지 않는다. 왕 뿐만이 아니라 그의 신하들에게도, 또한 주님이 경고하였으나 믿지 않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에게도 내리게 된다.

 

예레미야는 주님이 명하신 것을 그대로 따른다. 왕은 두루마리를 태웠지만 주님의 말씀은 다시 기록이 된다. 먼젓번 말씀만이 아니라, 더 많은 말씀이 기록된다. 재난을 예고하는 말씀까지가 담겼기 때문이다.

 

칼로 두루마리를 베어내고 베어낸 두루마리는 태웠을지 몰라도, 주님의 말씀까지를 태울 수는 없는 일이다. 내 귀에 쓴 소리라 하여 주님의 말씀을 없앤다고 주님의 말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잠시 멀어지는 것으로 보일지 몰라도 오히려 더 분명한 힘으로 다가온다.

 

주님의 말씀은 내가 외면한다고 해서 나와 무관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눈 속에 제 대가리를 파묻고 스스로 안전하다 여기는 겨울 꿩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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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도질당한 말씀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55)

 

난도질 당한 말씀

 

“왕(王)이 여후디를 보내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매 여후디가 서기관(書記官) 엘리사마의 방(房)에서 가져다가 왕(王)과 왕(王)의 곁에 선 모든 방백(方伯)의 귀에 낭독(朗讀)하니 때는 구월(九月)이라 왕(王)이 겨울 궁전(宮殿)에 앉았고 그 앞에는 불 피운 화로(火爐)가 있더라 여후디가 삼편(三篇) 사편(四篇)을 낭독(朗讀)하면 왕(王)이 소도(小刀)로 그것을 연(連)하여 베어 화로(火爐) 불에 던져서 온 두루마리를 태웠더라 왕(王)과 그 신하(臣下)들이 이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그 옷을 찢지 아니하였고 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 왕(王)께 두루마리를 사르지 말기를 간구(懇求)하여도 왕(王)이 듣지 아니하였으며 왕(王)이 왕(王)의 아들 여라므엘과 아스리엘의 아들 스라야와 압디엘의 아들 셀레먀를 명(命)하여 서기관(書記官) 바룩과 선지자(先知者) 예레미야를 잡으라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그들을 숨기셨더라”(예레미야 36:21-26).

 

어느 날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그동안 주님이 하신 말씀을 모두 두루마리에 기록하라 하신다. 혹시라도 기록된 말씀을 듣고 깨달아 나쁜 길에서 돌이킨다면 주님께서도 백성들에게 내리시기로 한 재앙을 거두시려는 일말의 기대 때문이었다. 한없이 약한 주님!

 

예레미야는 자신이 들은 주님의 말씀을 바룩에게 들려주었고, 바룩은 예레미야가 들려주는 말씀을 받아 적었다. 바룩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받아 적게 한 데는 이유가 있었는데, 당시 예레미야는 감금이 되어 성전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두루마리에 말씀을 적어 기록된 말씀을 백성들에게 선포하기 위함이었다. 말씀은 외침을 통해서만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기록을 통해서도 전해진다.

 

 

 

예레미야는 기록된 말씀을 금식일에 성전을 찾는 모든 이들에게 읽을 것을 명한다. 회개를 할 때나 큰 재난이 닥쳤을 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이거나 주님의 뜻을 간절한 마음으로 찾고 기다릴 때 금식을 했다. 말씀은 아무 때나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 선포되는 것이 마땅할 터이다.

 

마침내 금식이 선포되었고, 바룩은 성전에 모인 이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낭독한다. 바룩이 읽는 말씀을 들은 미가야가 그 사실을 왕궁에 보고를 한다. 왕궁의 관리들은 여후디를 바룩에게 보내 백성들에게 읽어준 두루마리를 가지고 오게 한다. 그들은 두루마리에 기록된 말씀을 듣고는 깜짝 놀란다.

 

두루마리에 주님의 말씀을 적게 된 과정을 알게 된 관리들은 바룩과 예레미야를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르는 곳에 숨으라 하고는, 왕을 찾아가 두루마리에 관하여 보고를 한다.

 

이야기를 들은 여호야김 왕은 그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했고, 주님의 말씀은 다시 한 번 왕 앞에서 낭독된다. 주님의 말씀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다양한 상황 속에서 여러 사람에게 들려진다. 문제는 누가 어떤 마음으로 말씀을 듣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 왕의 태도가 뜻밖이다. 말씀이 서너 쪽씩 낭독이 될 때마다 왕은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를 소도(小刀)로 베어 화롯불에 태웠다(23절).

 

왕이 두루마리를 벤 소도(小刀)는 서기관들이 글을 쓸 때 쓰는 갈대 촉을 날카롭게 하거나 파피루스 판(板)을 자를 때 쓰는 작은 칼을 가리킨다. 서기관들이 두루마리에 글을 쓸 때 쓰는 도구를 왕은 예언을 적어 놓은 두루마리를 잘라 망가뜨리는데 쓴 셈이 되었다.(박동현) 말씀을 기록하는데 사용했던 칼을 말씀을 난도질하는데 썼던 것이다.

 

왕이 주님의 말씀에 대해 갖는 태도가 그러하니 주변 신하들도 다를 것이 없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난도질하여 불에 태우는 모습을 보면서도, 전혀 두려움이 없었다.(24절)

 

두루마리를 찢어 불태우는 왕의 행위를 만류한 신하가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여호야김 왕은 듣지 않았고(25절), 오히려 예레미야와 바룩을 잡을 것을 명령한다.(26절) 두루마리를 모두 불태웠다 할지라도 말씀을 전할 예언자가 남아 있으니 아예 말씀의 근원까지를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

 

말씀을 들으며 찢어야 했던 것은 말씀을 듣는 이의 옷과 마음이었다. 그런데 여호야김 왕은 주님의 말씀을 찢었다. 그것도 주님의 말씀을 분명히 기록하기 위해 사용하던 칼로 말씀을 난도질했다.

 

말씀을 들으며 불태워야 할 것은 말씀을 듣는 이의 죄악이었다. 그런데 여호야김 왕은 주님의 말씀을 불태웠다.

 

두렵다. 주님의 말씀 앞에서 가질 수 있는 인간의 거만함이 어디까지인지, 왕의 소도(小刀)에 베인 듯 섬뜩하게 다가온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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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를 마시지 않은 사람들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54)

 

포도주를 마시지 않은 사람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그 자손(子孫)에게 포도주(葡萄酒)를 마시지 말라 한 그 명령(命令)은 실행(實行)되도다 그들은 그 선조(先祖)의 명령(命令)을 순종(順從)하여 오늘까지 마시지 아니하거늘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부지런히 말하여도 너희는 나를 듣지 아니하도다”(예레미야 35:14).

 

강원도의 한 외진 마을에서 목회를 하며 집 한 채를 지은 일이 있다. 흙과 나무와 돌을 모아 집을 지었다. 벌목을 하는 분이 나무를 전해주었고, 마을 분들은 동네의 집을 수리할 때 나오는 구들장과 창문 등을 전해주었다. 그 모든 것을 모아 마을 어른들과 시간을 잊고 쉬엄쉬엄 지은 집이니 허술하기로 하면 더없이 허술한 집이 되었다. 새집을 헌집처럼 지은 셈이다. 고개를 한참 숙여야 드나들 수 있고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잠을 잘 수가 있는, 참 불편한 집이기도 하다.

 

집은 허술하고 불편하지만 이름만은 그럴듯한 이름을 얻었다. ‘인우재’(隣愚齋), 어리석음과 가까워지는 집이라는 뜻이다. 어리석음과 가까워지는 일은 여전히 피해야 할 일일까,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어리석음의 의미를 회복하는 것 아닐까, 세상이 만들어준 주판을 스스로 버리는데 우리의 희망이 달려 있는 것 아닐까, 세상과 거리를 두고서 불편을 벗 삼아 어리석음을 배우는 자리가 되기를 바랐다.

 

 

 

예레미야 35장에는 약속을 끝까지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주님과의 약속을 어긴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오는 34장과는 대조적이다.

 

끝까지 약속을 지킨 사람들은 레갑 족속 사람들이었다. 레갑은 열왕기하에 나오는 인물로 북왕국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세운 예후가 사마리아의 바알 신당에서 바알 숭배자들을 없앨 때 함께 있었던 사람이다. 신앙적으로 부패했던 북왕국에서 그래도 바른 신앙을 지켜가던 사람 중의 하나였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레갑의 후손들을 주님의 집 한 방으로 데리고 가서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고 명하신다. 예레미야는 하난의 아들들의 방에 포도주가 가득한 사발과 잔을 놓고서 그들에게 포도주를 마시라고 권한다.

 

하지만 레갑의 후손들은 어느 누구도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는데, 이는 선조가 남긴 당부 때문이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자신의 자손들에게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명하였던 것이다. 레갑의 후손들은 선조가 남긴 당부를 지키느라 예언자가 권하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던 것이다.

 

요나답이 후손에게 남긴 당부는 포도주에 관한 것뿐만이 아니었다. 집도 짓지 말라 했고, 곡식의 씨도 뿌리지 말라 했고, 포도원도 재배하지 말라 했고, 평생을 장막에서 살아가라고 했다. 장막에서 산다는 것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삶을 의미한다.

 

요나답이 요구한 것은 더없이 불편한 삶이 아닐 수가 없다. 곡식의 씨를 뿌리지 않고 산다는 것, 포도원을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 집을 짓지 않고 떠돌이 생활을 한다는 것은 고단하고, 가난하고, 아무 것도 자신의 앞날을 보장할 것이 없는 위태한 삶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레갑의 후손들은 그런 삶을 이어가고 있었던 것일까?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의 조상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그렇게 살라고 명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그렇게 살고 있지 않았지만, 선조가 남긴 말을 지키기 위하여 그들은 불편하고 불안한 삶을 묵묵히 이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선조가 남긴 당부를 잊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지키고 있는 레갑 후손들의 모습은 주님 백성들의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주님께서는 레갑의 후손들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 자손은 조상이 내린 명령에 순종해서, 이 날까지 전혀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들은 내가 직접 말하고, 또 거듭하여 말했으나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새번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부지런히 말하여도 너희는 나를 듣지 아니하도다” <개역한글>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끊임없이 말하여도 너희는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도다” <개역개정>

 

“그런데 너희는 내가 그렇게도 거듭거듭 일러 준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공동번역>

 

“그런데 너희는 어떠냐! 너희 주의를 끌고자 내가 그토록 수고하였는데도, 너희는 계속 나를 무시했다.” <메시지>

 

사람이 남긴 말도 선조의 말이라 하여 성심껏 지키는데, 어찌 내 백성이 내 말을 지키지 않을 수가 있느냐는 주님의 말씀 속에는 주님의 실망과 탄식과 책망이 담겨 있지 싶다.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직접 듣지도 않은 선조의 말도 성실하게 지키는 레갑 자손들을 두고서, 주님께서 직접 말하고 거듭해서 말해도, 부지런히 말해도, 끊임없이 말해도, 거듭거듭 말해도 당신의 백성들이 당신의 말씀을 지키지 않고 있으니, 주님 눈에는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부러우신 것 같기도 하다.

 

더없이 불편하고 불안한 선택이었으니 시대가 바뀌고 가치가 바뀌었다며 얼마든지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단 하나 선조가 남긴 명이라는 이유로 묵묵히 따르고 있는 레갑의 후손들 앞에서 주님의 백성들이 보이고 있는 모습은 가볍고 어처구니가 없어 보인다.

 

오늘 우리들의 믿음이 세상 사람들이 지켜가는 가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깃털보다 가벼운 것! 아무리 주님이 직접, 거듭, 부지런히, 끊임없이 말씀하셔도 듣지를 않는다면 아무리 우리가 중요해 보이는 말과 행동을 한다 할지라도!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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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를 송아지 같이 만들겠다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53)

 

너희를 송아지 같이 만들겠다

 

 

“송아지를 둘에 쪼개고 그 두 사이로 지나서 내 앞에 언약(言約)을 세우고 그 말을 실행(實行)치 아니하여 내 언약(言約)을 범(犯)한 너희를 곧 쪼갠 송아지 사이로 지난 유다 방백(方伯)들과 예루살렘 백성(百姓)들과 환관(宦官)들과 제사장(祭司長)들과 이 땅 모든 백성(百姓)을 내가 너희 원수(怨讐)의 손과 너희 생명(生命)을 찾는 자(者)의 손에 붙이리니 너희 시체(屍體)가 공중(空中)의 새들과 땅 짐승의 식물(食物)이 될 것이며 또 내가 유다 왕(王) 시드기야와 그 방백(方伯)들을 그 원수(怨讐)의 손과 그 생명(生命)을 찾는 자(者)의 손과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王)의 군대(軍隊)의 손에 붙이리라”(예레미야 34:18-21).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는 말을 들어 알고 있는 이들에게 주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 하신다(마태복음 5:34). ‘아예’ 맹세하지 말라신다.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고,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고,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고, 자신의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하는 맹세에는 두 종류의 맹세가 있었다고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야만 하는 맹세와, 지키면 좋지만 지키지 못해도 어쩔 수가 없는 맹세가 있었다는 것이다. 꼭 지켜야 하는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했고, 못 지키면 할 수 없는 맹세는 하늘, 땅, 예루살렘, 자기 머리를 두고 했는데, 문제는 은밀한 심사에 있었다.

 

내게 이익이 되는 맹세를 할 때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고, 내게 손해가 되는 맹세를 할 때는 하나님 아닌 다른 이름으로 맹세를 했던 것이다. 못(안) 지켜도 어쩔 수 없다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모든 맹세가 다 소중한 것이라고, 사람에게 한 맹세도 실은 하나님 앞에서 한 맹세라는 점을 일깨우신다. 맹세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판이요, 예루살렘은 크신 임금님의 도성이요, 머리 또한 인간이 자기마음대로 머리카락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무엇을 걸고 맹세를 한다 할지라도 모두가 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처이니 자신의 생각을 감추기 위하여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들먹거리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굳이 맹세를 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믿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나라의 상황이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자 시드기야 왕은 주님이 명하신 법을 지키기로 한다. 안식년이 되면 종 되었던 히브리인들을 자유인으로 돌리는 규정이 있었는데, 그 법을 지키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하면 나쁜 상황이 호전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혹시나 싶어서 했는데 정말로 상황이 좋아지는 것이 아닌가. 이집트의 지원군이 다가오고, 바벨론 군대가 얼마동안 물러나는 것이었다. 일이 이렇게 좋아지자 시드기야를 비롯한 기득권자들의 마음이 바뀌고 만다. 종을 자유인으로 풀어주기로 한 것을 다시 취소한 것이다.

 

종에게 자유를 주기로 한 약속은 성전에서 주님과 한 약속이었다. 송아지를 두 조각으로 갈라놓고 그 사이로 지나가며 주님 앞에서 엄숙하게 서약했다. 송아지를 두 조각으로 쪼갠 뒤 그 사이를 지나가며 약속을 한 것은, 만약 약속을 어길 경우 자신이 지금 지나온 짐승처럼 되는 벌을 기꺼이 받겠다는 약속의 의미였다.

 

주님께서는 약속을 어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송아지를 두 조각으로 갈라 놓고, 그 사이로 지나가 내 앞에서 언약을 맺어 놓고서도, 그 언약의 조문을 지키지 않고 나의 언약을 위반한 그 사람들을, 내가 이제 그 송아지와 같이 만들어 놓겠다.” <새번역>

 

어려움이 닥쳐왔을 때에는 주님의 법을 지키겠다고 엄히 약속을 하고, 막상 어려움이 지나가는 것 같으면 그 약속을 뒤집고 마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 속에는 얼마든지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들어 있다.

 

그럴수록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을 당해 송아지를 갈라놓듯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맹세한 것을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주님은 우리를 우리가 지나온 송아지처럼 만드신다는 것이다.

 

한희철/동화작가, 성지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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