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철의 '두런두런'/한희철의 얘기마을502 어떤 결혼식 결혼식 주례를 하며 신랑 신부를 군(君)과 양(孃)이라 부르는 것이야 당연한 것이면서도 왠지 군과 양이라는 호칭이 어색했고 미안하기도 했다. 신랑 49세, 신부 46세. 늦을 대로 늦은 결혼이었다. 자칫 만남이 어렵지 싶은 나이에 두 사람은 우연히 그러나 기막힌 인연으로 만나 잡다한 상념을 털기라도 하려는 듯 이내 약속의 자리에 섰다. 단강교회가 세워진 이래 교회에서 하는 첫 번째 결혼식이었다. 주일예배에 잇대어 잡은 시간, 그래도 흔쾌히 부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이도 연소하고 해서 원하는 분 있으면 주례자로 모시라 했지만 굳이 주례를 내게 부탁했다. 뜻밖의 부탁은 더욱 거절할 수 없는 법, 주례 부탁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양가 가족만 모여서 단출한 식을 올렸음 했던 처음 바람과는 달리 적잖은 동네잔.. 2021. 4. 24. 노는 재미 요즘 규민이는 한창 노는 재미에 빠졌습니다. 놀이방 친구들과 한나절을 놀고, 놀이방이 끝나면 선아, 재성이, 규성이와 어울려 어두워질 때까지 놉니다. 교회 마당에서 놀기도 하고, 선아네 집에서 재성이네 집에서, 때론 뒷동산 산비탈에서 놀기도 합니다. 자전거도 타고, 흙장난도 하고, 소꿉놀이도 하고, 시간 가는 줄을 모릅니다. 어두워지는 것도 모르고 놀다간 찾으러 나간 엄마 손을 잡고 돌아와 때론 저녁 밥상 앞에서 쓰러지듯 잠이 듭니다. 졸리도록 노는 아이, 아이의 천진한 몰두가 내겐 늘 신기하고 적지 않은 자극도 됩니다. - (1992년) 2021. 4. 19. 할머니의 식사 윤연섭 할머니는 무섭게 일을 합니다. 그야말로 쉴 틈이 없습니다. 일흔이 넘은 나이도 그렇고 넉넉히 사는 자식들 살림도 그렇고 이젠 일 놓아도 될 법 한데, 일하는 할머니 손길은 변함이 없습니다. 열흘이 넘게 걸리는 고된 당근 일에도 빠짐이 없고, 혼자 사는 집 좁은 마당과 방안엔 언제라도 일감들이 널려 있습니다. 모처럼 쉬는 겨울, 아주 쉴 수는 없다는 듯 산수유가 잔뜩 입니다. 혼자 사는 할머니는 혼자 식사를 합니다. 식사 하러 방안으로 들어가는 할머니 두 손엔 밥과 짠지가 들렸습니다. 한 손엔 밥 한손엔 짠지, 그뿐입니다. 쥐코밥상도, 그 흔한 쟁반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두 손으로 밥과 짠지를 날라 맨바닥에 놓고 한 술 밥을 뜹니다. 어둘 녘에야 끝나는 일, 찬밥일 때가 많습니다. 그게 .. 2021. 4. 18. 어정쩡함 씨가 굵게 잘 내렸는데도 값은 평당 500원. 허석분 할머니의 탄식이 길다. 강가 밭 당근이 전에 없이 잘 되었는데도 값이 곤두박질, 어이가 없는 것이다. 할머니 탄식 앞에 난 괜히 송구할 뿐이다. 윗작실 정영화 씨는 강가 밭에 배추를 심었다. 그런대로 잘 되어 통이 굵은 배추가 나란히 보기도 좋았다. 뜸하던 장사꾼이 그나마 들어오더니 밭 전체에 22만원, 그러니까 포기당 100원 꼴에 팔라고 했다. 화가 난 정영화 씨는 안 팔고 말았다. 여차하면 밭에서 얼려 죽이고 말일. 그래도 씨 값도 안 되는 그런 값엔 차마 팔 수가 없었다. 몇 군데 연락을 취했고 다행히 배추를 사겠다는 분들이 나섰다. 차를 마련해 원주 시내까지 싣고 나가야 한다. 여기저기 차편을 알아보고 사려는 이들과 값과 날짜를 맞춘다. 그러.. 2021. 4. 17. 밀려드는 어두운 예감 작실 병직이 네가 이사를 갔다. 지난 여름 성경학교 연극 발표 시간엔 아합 왕 역을 맡아 참 멋있고도 씩씩하게 연극을 잘 했던 병직이, 병직이 네가 문막으로 떠났다. 설정순 집사님 내외가 떠난 것은 의외였다. 곧 환갑의 나이. 아무래도 떠나기엔 늦은 나이 아닌가. 그냥 내 논 부쳐도 남는 게 없는 판에 남의 땅 빌려 붙이려니 그 사정 오죽했으랴만, 두 사람이 이제 나가 무슨 일을 어찌 할까 짐작이 잘 안 된다. 빨갛게 잘 익은 산수유나무를 사이에 둔 아랫작실 양담말 앞뒷집이 모두 텅 비어 버렸다. 며칠 있으면 종하 네가 이사를 간다. 팔십이 넘은 할머니 밑에서 살던 종하 종일이 종석이가 결국은 떠나게 됐다. 다 모여야 열 명뿐인 학생부에 종하, 종일이가 빠지면 그 구멍은 휑하니 클 것이다. 재워 주는 건.. 2021. 4. 16. 떠나가는 손 트럭 운전석 옆에 나란히 앉은 설정순 집사님도 남편 박동진 아저씨도 모두 눈이 젖을 대로 젖어 있었다. 작실로 올라가다 만난 이사 차, 고만고만한 보따리들이 차 뒤에 되는 대로 실려 있었다. 설정순 집사님 내외가 문막으로 이사를 나가는 길이다. 때가 겨울, 두 분 모두 환갑의 나이, 이제 어디로 나간단 말인가. 내 땅 하나 없이 남의 땅 붙이는 것도 이젠 한계, 두 분은 떠밀리고 있었다. 드신 약주로 더욱 흐려진 아저씨의 젖은 두 눈이 안타까웠다. “건강하세요.” 더는 할 말이 없었다. 애써 웃으며 그렇게 인사할 때 두 분은 차창 밖으로 내 손만 마주 쥐었다. 뭔가 하려던 말이 주르르 흘러내린 눈물에 막히고 말았다. 마침 도로 포장을 위한 공사 중, 올라오는 차와 마주쳐 이사차가 길옆 논으로 피해 들어갔.. 2021. 4. 15. 봄(23) 에구구 시방 사월 허구두 중순인디 이게 웬 뜬금읍는 추위라냐 꽃들이 춥겁다 여벌 옷두 읍구만 - (1996년) 2021. 4. 14. 눈물의 기도 수요저녁예배. 기도 순서를 맡은 집사님이 기도를 하다 말고 울음을 터트렸다. 울음에 막혀 기도가 자꾸 끊겼다. “농사는 시작됐는데.... 일꾼은 읍구..., 갈지두 못하고 있는 논밭을 보면 속이 터지구...,자식들은 모두 나가..., 곁에 읍구..., 세대를 잘못 만나...,” 뚝뚝 끊기는, 듣는 이 숨마저 따라 끊기는, 눈물의 기도. - (1992년) 2021. 4. 13. 형제를 눈동자 같이 목요성서모임에서 사도행전을 인도하던 김 목사가 몇 주 미국을 다녀오게 되어 비게 된 시간을 손곡교회 한석진 목사님께 부탁을 드렸다. 동양사상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형이라 신선한 시간이 되겠다 싶었다. 석진 형은 '도마복음'을 택했고, 우리는 석주 동안 도마복음을 읽고 얘길 나눴다. 1945년에 우연히 Nag-hamadi 박물관 한쪽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로 발견된 도마복음은 인도로 전도를 간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그곳에서 쓴 복음서로 알려져 있다. 대부분 '예수가 말했다 -'로 시작되는 도마복음은 모두 114개의 말씀으로 이루어졌는데 일종의 선문답 같은, 불교 문화권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재해석이라는 성격을 강하게 풍기고 있었다. 요한복음이 헬라문화권 안에서의 복음에 대한 재해석이었다면 도마복음은.. 2021. 4. 12. 이전 1 ··· 21 22 23 24 25 26 27 ··· 5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