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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1157

할아버지의 아침 이른 아침, 변관수 할아버지가 당신의 논둑길을 걸어갑니다. 꼬부랑 할아버지가 꼬부랑 논둑길을 꼬꾸라질 듯 걸어갑니다. 뒷짐 지고 걸어가며 벼들을 살핍니다. 간밤에 잘 잤는지. 밤새 얼마나 컸는지, 물이 마르지 않았는지, 피가 솟아나진 않았는지 이른 아침 길을 나서 한 바퀴 논을 돕니다. 그게 할아버지의 하루 시작입니다. 할아버지는 논을 순례하듯 하루를 시작합니다. 곡식이 주인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는 말은 참말입니다. - (1995년) 2021. 3. 7.
싱그러움 오랜만에 비가 내린다. 목말랐던 땅이, 나무와 풀이 마음껏 비를 맞는다. 온 몸을 다 적시는 들판 모습이 아름답다. 석 달 가뭄 끝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흙먼지 적실 때, 그때 나는 냄새처럼 더 좋은 냄새가 어디 있겠냐 했던 옛말을 실감한다. "타-닥. 타-닥. 타다닥" 잎담배 모 덮은 비닐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더없이 시원하다. 땅속으로 스며들어 뿌리에 닿을 비, 문득 마음 밑바닥이 물기로 젖어드는 싱그러움. - (1995년) 2021. 3. 6.
어느 날의 기도 받으라고 받을 수 있다고 때때로 당신 뜻 모를 고통과 아픔 주지만 받을 수 있다고 받아야 한다고 인정하지만 그러나 주님 저만치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툭 길 끊기고 천 길 벼랑일 때가 있습니다. 받으라 하시고 받아야 한다고 인정하지만 - (1995년) 2021. 3. 5.
새벽 강 새벽 강가에 물안개가 뽀얗게 피어올랐습니다. 어둠 속을 밤새 흐른 강물이 몸이 더운지 허연 김으로 솟아오릅니다. 우윳빛 물안개가 또 하나의 강이 되어 강물 따라 흐를 때, 또 하나의 흘러가는 것, 물새 가족입니다. 때를 예감한 새들이 나란히 줄을 맞춰 날아갑니다. 이내 물안개 속에 파묻혀 더는 보이지 않는 새들, 물안개 피어나는 새벽 강에선 새들도 강물처럼 흘러갑니다. - (1995년) 2021. 3. 4.
봄 들판 들판에 가 보았네 아이들의 웃음소리 아이들은 들판을 가로 질러 아지랑이처럼 달렸네 들판에 가 보았네 조용한 푸름 번지고 있었네 하늘이 땅에 무릎 꿇어 입 맞추고 있었네 들판에 가 보았네 언덕 위 한 그루 나무처럼 섰을 때 불어가는 바람 바람 혹은 나무 어느 샌지 나는 아무 것이어도 좋았네. - (1995년) 2021. 3. 3.
단강의 아침 단강의 첫 아침을 여는 것은 새들이다. 아직 어둠에 빛이 스미지 않은 새벽, 어둠을 뚫고 들려오는 삐죽한 소리가 있다. 가늘고 길게 이어지다 그 끝이 어둠속에 묻히는 애절한 휘파람 소리, 듣는 이의 마음까지를 단숨에 맑게 하는 호랑지빠귀 소리는 이 산 저산 저들끼리 부르고 대답하며 날이 밝도록 이어진다. 새벽닭의 울음소리도 변함이 없다. 그게 제일이라는 듯 목청껏 장한 소리를 질러 댄다. 그 뒤를 잇는 것이 참새들이다. 참새들은 소란하다. 향나무 속에 모여, 쥐똥나무 가지에 앉아, 혹은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수선을 핀다. 저마다 간밤의 꿈을 쏟아 놓는 것인지 듣는 놈이 따로 없다. 그래도 참새들의 재잘거림은 언제라도 정겹다. 가벼운 음악으로 아침 맞듯 참새들의 재잘거림은 경쾌하고 즐겁다. 오늘 아침엔 후.. 2021. 3. 2.
멀리서 온 소포 Australia Yoo KYONG HAHM (오스트레일리아 함유경). 전혀 낯선 곳, 낯선 이로부터 온 소포를 혹 잘못 배달된 것 아닌가 거듭 수신자 이름을 확인하며 받았다. 커다란 상자였다. 분명 수신자란엔 '단강교회 한희철'이라 쓰여 있었다. 누굴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짚이는 구석이 없었다. 조심스레 상자를 열었을 때 상자 안에는 커피와 크림, 초콜릿 등 다과가 하나 가득 담겨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사연은 없었다. 궁금증은 다음날 풀렸다. 역시 항공우편으로 온 편지에는 전날 받아 든 소포에 대한 사연이 담겨 있었다. 머나 먼 이국땅에서 한 외진 마을로 부쳐온 쉽지 않은 정. 예배를 드리고 둥그렇게 둘러앉아 다과회를 갖는 자리엔 낯설고 의아한, 그러나 무엇보다 따뜻한 감동이 흐르고 있었다. 이.. 2021. 3. 1.
봄 들판 들판에 가 보았네 아이들의 웃음소리 아이들은 들판을 가로 질러 아지랑이처럼 달렸네 들판에 가 보았네 조용한 푸름 번지고 있었네 하늘이 땅에 무릎 꿇어 입 맞추고 있었네 들판에 가 보았네 언덕 위 한 그루 나무처럼 섰을 때 불어가는 바람 바람 혹은 나무 어느 샌지 나는 아무 것이어도 좋았네. - (1995년) 2021. 2. 26.
사랑하며 사람 사랑하며 이야기 사랑하며 바람과 들꽃과 비 사랑하며 눈물과 웃음 사랑하며 주어진 길 가게 하소서 두려움 없이 두리번거림 없이 - (1992년) 2021. 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