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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1158

때 지난 빛 ‘별빛을 우러러 보았을 때 그 별은 이미 죽어있을 지도 모른답니다!’ 한겨레신문 한 귀퉁이, 늘 그만한 크기로 같은 책을 고집스레 소개하는 , 짧게 짧게 실리는 글들이 늘 시선을 끌었는데 며칠 전에 만난 글은 위와 같았다. 기쁨이나 슬픔, 그 어떤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하여도 우리가 다른 이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 때론 그것이 때 지난 것일 수도 있다는, 어쩜 늘 그런 것이 아니냐는 아픈 지적. - (1992년) 2021. 2. 16.
꽃봉오리 “얘들아, 이리와 봐! 기쁜 일이 생겼다!” 마당에서 놀던 소리가 커다란 소리로 놀이방 친구들을 부릅니다. 무슨 일일까, 마루에서 귀를 기울였더니 “이것 봐, 꽃이 피려고 봉오리가 하나 생겼어.” - (1993년) 2021. 2. 15.
사진집 마음이 메마를 때면 꺼내드는 책이 있습니다. 왠지 허전하고 허전한 마음에 물기 마를 때 그냥 편하게 꺼내드는 책이 있습니다. -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가난한 이들을 주로 카메라에 담았던 최민식 - 최민식 사진집 입니다. 슬픔의 표정이, 냉엄한 생의 표정이 곳곳에 담겨 있습니다. 단색의 표정들이 마른 가슴에 실비를 뿌려주곤 합니다. 슬픔의 한 표정을 본 다는 건 얼마나 위로가 되는 일인지요. 이따금씩 사진집을 꺼내듭니다. - (1992년) 2021. 2. 14.
새가족 창규 한 달 동안의 겨울방학을 마치며 햇살 놀이방엔 식구가 한 사람 늘었습니다. 조귀농에 사는 창규가 새로 온 것입니다. 또래가 없어 늘 혼자 지내는 어린 아들의 모습을 딱하게 여기던 창규 아빠가 햇살놀이방 이야기를 들었다며 교회를 찾았습니다. 흔쾌히 수락을 했고, 그날부터 창규는 아빠의 트럭을 타고 아침마다 놀이방에 오게 되었습니다. 뒤늦게 들어와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면 어떡하나, 창규 성격이 사납다던데 아이들과 싸우면 어쩌나 은근히 걱정이 되었지만 모두가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걱정했던 창규의 사나움은 낯선 친구들과도 서슴없이 어울리는 활달함으로 표현됐고, 놀이방 아이들도 새로 온 친구를 이내 친한 친구로 맞아 주었습니다. 그런 면에선 아이들에게 배워야 할 것이 적지가 않습니다. 밖에서 혼자 노는데 익숙했.. 2021. 2. 13.
요란한 것과 조용한 것 “이따가 밥 잡수러 오세유!” 아침 일찍 교회 마당을 쓸다가 일 나가던 이필로 속장님을 만났더니 오늘 당근 가는 일을 한다며 점심을 함께 먹자고 청합니다. 봄이 온 단강에서 제일 먼저 시작되는 농사일은 당근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단강의 특산물이기도 한 당근 씨를 강가 기름지고 너른 밭에 뿌림으로 한해 농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일을 마치고 강가 밭으로 나갔습니다. 유유히 흘러가는 남한강이 가깝게 내다보이는 강가 밭, 많은 마을 사람들이 나와 씨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일일이 발로 밟아 씨 뿌릴 골을 만들어야 했던 것이 불과 이삼년 전 일인데, 이제는 트랙터가 골을 만들며 밭을 갈아 일이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앞사람이 씨를 뿌리고 나가면 뒷사람이 손으로 흙을 덮어나가야 했는데, .. 2021. 2. 12.
정균 형, 그 우직함이라니 영진을 다녀오게 되었다. 강원도 영진에서 목회하고 있는 정균 형이 한번 예배를 같이 드리자고 불렀다. 임원헌신예배를 드리는 날이었다. 꼭 찾고 싶었던 곳, 보고 싶었던 형을 그렇게 찾게 되었다. 철썩이는 파도소리가 해송들 사이로 가까이 들려오는 곳, 영진교회는 바다와 잘 어울려 아담하게 세워져 있었다. 저녁예배를 드리고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눌 때도, 다음날 아침 이웃마을 사천에서 목회하고 있는 진하 형을 만나 같이 이야기 나눌 때도 난 내내 정균 형의 우직함과 묵묵함에 압도를 당하고 말았다. 언젠가 기석 형은 정균 형을 두고 ‘소 같은 사람’이라 했는데, 그 말은 정균 형을 두고선 가장 어울리는 말이었다. 아직도 내 마음에 흔들림과 주저함으로 남아있는 막연함을 형은 흔쾌히 털어낸 채였고, 홀가분하면서도 .. 2021. 2. 11.
어떤 새 한 마리 새가 있었습니다. 그는 밤이 되면 하늘로 날아오르곤 했습니다. 다른 새들이 잠이 들면 슬며시 혼자 깨어 일어나 별들 일렁이는 향해 날아올랐습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그 일은 쉬는 법이 없었습니다. 날이 밝기 전 그는 어김없이 둥지로 돌아왔고 잠깐 눈을 붙였다가 다른 새들과 함께 일어나 함께 지냈습니다. 아무도 그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다른 새 한 마리가 그 일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연히 한밤중 깨었다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내 눈에서 사라지는 까마득한 높이였습니다. 다음날 새벽, 그가 둥지로 돌아온 새에게 물었습니다. 돌아온 새의 깃털엔 아직 하얀 서리가 그냥 남아있었습니다. -어딜 갔다 오는 거니? -하늘 -모두들 하늘을 날잖니?.. 2021. 2. 10.
다람쥐의 겨울나기 아랫마을 안 속장님 네를 들어서다 보니 문 한쪽 편으로 빈 철망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전에 다람쥐를 키우던 철망인데 다람쥐는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고, 철망 안엔 난로연통에 쓰이는 ‘ㄱ’자 모양의 주름진 연통과 보온 덮개로 쓰는 재생천 쪼가리들만 널려 있었습니다. 먹을 걸 넣어주던 조그만 통 안에는 잘 까진 호박씨들이 한 움큼 잘 담겨 있었습니다. 안 속장님께 다람쥐에 대해 물었더니 두 마리 중 한 마리는 모이를 주려고 문을 여는 순간 밖으로 뛰쳐나와 도망을 쳤고 한 마리만 남았는데, 남은 한 마리가 날이 추워지자 연통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춥지 말라고 바닥에 깔아준 재생천을 조금씩 쏠아서 연통 속에 꾸역꾸역 쑤셔 넣더니 그 안에 틀어박혀 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남은 한 마리마저 보이질 않아.. 2021. 2. 8.
끝내 돌아서지 못하는 것은 수없이 돌아섭니다. 부름 받은 땅 이 땅에 발 붙여 살면서도 마음은 수없이 돌아섭니다. 떠날 갈 이 모두 떠난 텅 빈 땅 껍질 같은 땅에 주름진 삶이 상흔처럼 남았습니다. 숯 같은 가슴에서 떨어지는 눈물 받을 길 없고 퍼렇게 멍든 얘기 피할 길 없을 때 수없이 돌아섭니다. 말뚝처럼 불쌍한 몸뚱일 남기고서 마음은 수없이 돌아섭니다. 하면서도 끝내 돌아서지 못하는 것은 당신 때문입니다. 갈 테면 가라는 질책도 원망도 아닌 그저 나직한 음성 당신 때문입니다. 텅 빈 땅에 홀로 남는 당신의 긴 그림자 때문입니다. 아니 당신의 맑은 얼굴 때문입니다. 이 땅 끝내 돌아서지 못하는 것은. - (1993년 2021. 2. 8.